“힘이 없어 지켜주지 못한 소녀에게
더 큰 슬픔 주는 일 없었으면”

각국의 수도(首都)나 고도(古都)에는 그 나라의 역사와 위인을 기념하기 위한 비(碑)•탑(塔)•사원(祠院).상(像) 등이 많다. 우리 서울만 하더라도 광화문의 세종대왕과 이순신장군 동상을 비롯하여 셀 수 없을 정도의 기념물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나는 지하철로 출퇴근을 하는데, 출근길에 항상 사명대사 동상을 뵙는다. 그 동상은 오래 전부터 장충공원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있다가 몇 년 전 동국대학교 입구에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되면서 일반인에게 노출되었다. 그 동상은 학교와는 아무 관련 없이 세워진 것이지만 하필이면 동국대학생들이 주로 사용하는 에스컬레이터와 연결되면서 등교할 때마다 뵙게 된 것도 시절인연 탓으로 생각된다.

장충단에는 사명대사 동상 외에도 이준(李儁)과 유관순 열사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이준은 일제 침략의 부당함을 전세계에 알리기 위한 고종의 밀서를 가지고 헤이그에 갔다 뜻을 이루지 못한 순국열사이고, 유관순은 3•1운동 때 일제에 체포되어 옥사한 순국소녀로, 흔히 ‘한국의 잔다르크’라 불린다. 장충단 부근에 사명대사•이준•유관순 등 애국지사의 동상이 세워진 것은 각각 1968년 5월, 1964년 7월, 1966년 8월의 일이다.

왜 이들 동상이 이곳에 건립되었는지는 자세히 살피지 못했지만, 조선시대와 일제 때 왜적에게 저항한 애국자라는 공통점은 쉽게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세 분 동상은 다소 외진 곳에 자리하고 있어 시민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퇴계 이황, 다산 정약용 선생의 동상이 남산도서관 앞에 있어 그곳을 찾는 이들에게 잘 알려진 것과 좋은 대비가 된다.

유럽을 여행하다 보면 도시에 즐비한 각종 동상을 보고 그 인물과 역사의 상관관계, 예술적 가치 등을 생각해보며 감탄한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사는 곳에 어떤 역사적 인물의 기념비나 동상이 있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광화문의 이순신 장군 동상은 그 위치뿐만 아니라 오른 손에 칼을 잡고 서 있는 자세 때문에 여러 논란이 있어 한국인이라면 모르는 이가 별로 없을 것이다.

광화문에 또 하나의 역사적 인물 동상이 세워졌으니 바로 세종대왕상이다.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성군(聖君)과 성웅(聖雄)의 동상이 서울의 중심대로 앞뒤에 세워진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두 동상의 건립날짜는 이순신 동상이 1968년, 세종대왕 동상이 2009년이어서 40년의 차이가 나지만,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중심부에 두 분 동상이 자리한 것은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상당히 커다란 의미를 갖는다.

광화문에 또 하나의 동상이 있다. 그 동상은 특정한 역사적 인물을 기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침략자의 야만적 행위를 영원히 기억하고 다시는 그런 슬프고 아픈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우리 국민의 간절한 마음을 모아 김운성•김서경 부부가 2011년 조상(彫像)한 것이다.

단발머리의 맨발로 의자에 앉아 두 손을 꼭 쥔 채 일본대사관을 정시(正視)하고 있는 소녀상(少女像)에는 ‘평화의 소녀상’이란 이름이 붙여졌고, 한국인뿐만 아니라 많은 외국인들이 이곳을 찾아 어린 나이에 외국에 끌려가 잔혹한 일본군인의 성노예로 혹사당했던 그들에게 분노와 참회의 꽃과 기도를 바친다. 따뜻한 마음을 가진 이들이 소녀가 추울까 털모자와 목도리를 둘러주기도 하지만, 신발도 없이 까치발로 간신히 의자에 앉아 두 손을 움켜쥔 채 일본정부의 진실한 사죄를 촉구하고 있다.

그곳을 지나거나 생각할 때마다 나는 늘 죄송한 마음과 큰 분노를 느낀다. 일본정부가 소녀상 이전(移轉)을 요구하는 것도 그러한 불편한 마음 때문일 터이다. 보다 많은 일본인이 불편하고 죄송한 마음을 갖도록 소녀상은 지금 이 자리에 있어야 한다. 소녀상을 옮기자는 이야기는 우리의 양심과 혼을 포기하자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가 힘이 없어 지켜주지 못했던 소녀에게 더 큰 슬픔과 절망을 주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동국대 문창과 교수 · 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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