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당(中唐)1) 이후 매년 차 따는 계절이 되면 차상(茶商)들이 차(茶) 생산지역으로 구름처럼 몰려들어, 강남에서 생산된 차(茶)를 광대한 화북(華北)지방으로 실어 나르기 위해 마차(馬車)와 배가 즐비하게 늘어서고 포장된 차엽 화물들은 마치 산처럼 쌓이게 되었다.

특히, 수주(壽州 : 안휘성 수현), 서주(舒州 : 안휘성 잠산현), 호주〔湖州 : 절강성 호주시(오흥현)〕, 악주(鄂州 : 호북성 무창현), 기주(蘄州 : 호북성 기축현 남쪽), 면주(綿州 : 사천성 면양현), 아주(雅州 : 사천성 아안시), 촉주(蜀州 : 사천성 숙경현) 등지의 명차(名茶)들은 멀리 서장(西藏)의 티베트(吐藩)족에게까지 수출되었다.

안휘성의 기문(祁門)에서 품질이 우량한 차화(茶貨 : 차 상품)가 생산됨에 따라 전국의 차상(茶商)들은 매년 2,3월이 되면, 많은 은괴(銀塊)와 비단 등의 견직물을 가득 싣고 왔다. 이곳에 이르는 자들이 줄을 이어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많았는데, 그들은 은괴와 비단 등의 견직물을 팔아 차를 사서 다른 군에 팔았다. 즉, 차상들이 차를 사들이기 위해 서로 앞을 다투어 각자 물건을 이고 지고, 수레에 싣고, 배에 싣는 등 갖가지 수단을 다 동원하여 몰려들어 안휘성 기문은 매우 번거롭고 바쁜 상황이 고조에 이르렀다.

또한 낙양(洛陽)2) 상인 왕가구(王可久)란 자는 “매년 강남(江南)과 호주(湖州 : 浙西도에 속함) 간에서 차를 팔아 항상 풍성한 이익을 취하여 돌아갔다〔歲鬻茗于江湖間, 常獲豊利而歸〕.”3)고 한다. 여용지(呂用之)의 아버지 여황(呂瑝) 또한 “차를 파는 일을 생계로 삼아, 회남(淮南)과 절강지역(절서, 절동)을 왕래하였다〔以賣茶爲生, 來往于淮浙間〕”4)고 한다.

그 외에도 백거이의 “늙어 장사꾼의 아내로 시집갔더니, 장사꾼은 이익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아내와의 이별은 가벼이 여기네. 지난달 부량(浮梁)으로 차를 사러 간 뒤, 오고가는 강구(江口)에서 (나만) 홀로 빈 배만 지키네〔老大嫁作商人婦, 商人重利輕別離. 前月浮梁買茶去, 去來江口守空船〕.”5)라고 쓴 시와 왕건이 쓴 “수문은 저녁까지도 열려 있어 차상들은 여전히 북적거리고, 다리 위 시장엔 밤새도록 취객들이 다니네〔水門向晩茶商閙, 橋市通宵酒客行〕”6)란 시구에는 모두 중원지구에서 차상들이 매우 번거롭고 바쁘게 활동하였음과 그 당시 차엽무역이 매우 흥성했던 사회적 정황을 잘 반영해주고 있다.

(2) 차 전문 저서(著書)의 출현

차(茶) 생산의 발전과 차(茶) 무역이 흥성함에 따라 차엽경제는 국민경제생활 속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커지게 되었다. 이에 봉건정부도 곧 차세(茶稅)를 징수하여 국가 재정 수입의 중요한 기반으로 삼았다. 이렇듯 중국 전체 사회가 차엽경제에 대해 보편적으로 중시함에 따라 이에 적응하여 전문적으로 차의 생산과 가공(加工)기술 등을 비롯한 차사(茶事) 활동에 대해 기술하는 전문서 등이 줄을 이어 세상에 출현하게 되었다.

세계 최초의 다서로 유명한 육우의 《다경》은 육우가 몸소 차 생활을 실천하고, 여러 분야를 광범위하게 조사하였으며, 수많은 고서들을 인용하여 필생의 유작으로 심혈을 기울여 써낸 작품이다.

그 뒤로도 배문(裴文)의 《다술(茶述)》, 장우신(張又新)의 《전다수기(煎茶水記)》, 온정균(溫庭筠)의 《채다록(採茶錄)》, 소이(蘇廙)의 《십육탕품(十六湯品)》과 오대 전촉(前蜀) 때의 모문석(毛文錫)의 《다보(茶譜)》등의 차(茶) 전문 저술들이 줄을 이어 세상에 출현하게 된다. 또한 유림(儒林)의 시인(詩人)ㆍ묵객(墨客)들은 더욱 차 마시는 일을 시의 소재와 제재로 삼아 창작활동을 하게 되어 이미 당시에 음차(飮茶)를 읊조리고 찬양하는 문장들이 문단에 가득하게 되었다.

이는 당(唐)과 오대(五代) 시기가 ‘중국차엽경제(中國茶葉經濟)’에 있어 그야말로 공전(空前)의 발전을 하고 있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 당대(唐代) 8대 茶區7)

주) -----
1) 초당(初唐) : 고조 무덕 원년(高祖武德元年, 618년)에서 예종 태극 원년(睿宗太極元年,712년)까지의 94년간. 성당(盛唐) : 헌종 개원 원년(憲宗開元元年, 713년)에서 대종 영태 원년(代宗永泰元年,765년)까지의 52년간. 중당(中唐) : 대종 대력 원년(代宗大曆元年, 766년)에서 문종 태화 9년(文宗太和9年,835년)까지의 69년간. 만당(晩唐) : 문종 개성 원년(文宗開成元年, 835년)에서 애제 천우 4년(哀帝天佑4年,907년)까지의 71년간.
2) 여러 조대(朝代)에서 이곳에 도읍을 정함.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낙양시(洛陽市) .
3) 《太平廣記)》卷172
4) 《太平廣記)》卷290 <呂用之>
5) 《全唐詩》卷435 白居易 <琵琶行>
6) 《全唐詩》卷300 王建 <寄蘆州令孤相公>
7) 도표 출처 : 당(唐) 육우(陸羽) 《다경(茶經)》 <팔지출(八之出)>

박영환 | 중국 사천대학 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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