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측의 9식관과 관련해서 주목할 것이 있다. 그것은 원성실상(圓成實相)에 대한 견해이다. ‘유식삼성설(唯識三性說)’이라 회자(膾炙)되는 것이 그것이다. 유식불교는 모든 존재에 대하여 3가지 조망을 한다.

<삼성설(三性說)>

①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 : 미망의 자기, 두루 분별된 자성
→ 의타적인 존재가 잘못 인식되면 변계소집성이 된다. 중생들이 만들어내는 세계(토끼의 뿔, 석녀의 아이)

② 의타기성(依他起性) : 연기의 자기, 다른 것에 의존한 자성
→ 존재가 어떻게 존재하는가를 보여줌. 존재는 다른 존재들에 의존해 연기적으로 존재한다. 인식주체를 떠나서 존재 자체가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보여줌

③ 원성실성(圓成實性) : 깨달음의 자기, 완전하게 성취된 자성, 무분별지(無分別智), 공성(空性)
→ 의타적인 존재를 제대로 파악하면 원성실성이 된다. 깨달은 사람이 보는 세계는 원성실성을 가진 세계이다.

삼성설에서 말하는 세 가지 존재형태는 인식 주체 쪽에서 본다면, 자기 마음의 세 가지 존재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수행과 실천의 입장에서 본다면, 의타기성은 실천적으로 수행생활을 성립시키는 기체(基體)로서 조건에 따라 변화하는 자기라고 할 수 있고, 변계소집성은 미망에 휩싸여있는 자기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으며, 원성실성은 깨달음에 도달한 자기의 모습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삼성설은 존재형태에 대한 해명이라기보다는, 미혹의 세계에서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가는 실천적인 관점에서 설해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중국 법상종은 식설(識說)을 중심으로 해서 유식설을 전개한다. 즉 아뢰야식을 중심으로 한 식의 변화로써 현상세계를 설명하는 데 역점을 두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삼성설은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취급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1)

반면에 원측은 삼성설을 중심으로 하여 유식사상을 체계화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원측은 구유식과 입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원측이 이처럼 유식사상의 기본 틀을 삼성론 중심의 구유식에서 취하는 까닭은 자명하다. 그것은 원측이 자신의 교학 속에 현상세계에 대한 설명과 깨달음에로의 전환이라는 양 측면을 모두 포괄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중국의 법상종이 현상세계에 대한 논리적 설명에 치우친 나머지, 종교적이고 실천적인 측면을 소홀히 하는 것과 크게 대조되는 것이다. 원측은 전체적 체계를 구축하는 틀에 있어서는 구유식의 삼성론을 지지하지만, 그 구체적 내용에 있어서는 진제의 구유식을 비판하고 현장의 신유식을 지지하고 있다. 원측이 현장의 견해를 지지하는 것은 그것이 유식불교의 이치에 부합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원측은 보다 포괄적인 구유식의 틀에다 보다 논리적인 신유식의 이론을 결합하여 자신의 체계를 완성했다고 할 수 있다.2)

원측의 일승적(一乘的)인 유식 또한 독창적인 사상이다. 유식에서 제시하는 다섯 가지 인간 유형인 오성각별설(五性各別說)은 중국 법상종(法相宗)의 현장(玄奘)·규기(窺基) 등에 의하여 제창되었으며, 이들 인간 유형이 성불(成佛)이라는 불교의 목적에 어떻게 접근하는가를 현실적으로 제창한 학설이다. 대승불교의 근본이상에 의하면 “모든 생명에는 부처의 성품이 있다〔一切衆生 悉有佛性〕.”고 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보면 인간에게는 근기(根機)에 따른 천차만별의 상이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대별한 인간관이다.

<오성각별설(五性各別說)>
① 성문종성(聲聞種性):진리를 즐겨 듣기는 하나 실천이 없는 소승(小乘)의 성자.
② 독각종성(獨覺種性):이타(利他)의 보살행을 결여한 소승적 수도인. 성문보다는 우월.
③ 보살종성(菩薩種性):보살의 이상과 행위를 실천하는 대승의 수도자.
④ 부정종성(不定種性):선도 악도 될 수 있는 일반적 가능성을 가진 이.
⑤ 무성종성(無性種性):무지몽매, 진리를 망각하고 악업을 범하는 이.

중국의 규기 등은 《해심밀경》과 《유가사지론》에 근거하여, 무성종성(無性種性)에 속하는 인간은 도저히 성불할 수도 없고 구제받을 수도 없고, 대승의 부정종성(不定種性)과 보살종성(菩薩種性)만이 성불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에 대하여 원측은 《해심밀경》 등의 오성각별설을 방편(方便說)이라고 주장한다. 즉 “보살종성과 부정종성만이 성불할 수 있고 무성종성인 일천제는 성불할 수 없다”는 것은 삼승가의 방편적 담론이고, “모든 존재는 누구나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이 불설의 핵심인 중도(中道)에 입각한 진실한 담론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불설은 이치에 있어서 하등 차이가 없어 일승(一乘)이며 일불승(一佛乘)의 견지에 있지만, 방편이 방편으로 받아들여질 때에 곧 진실한 가르침이 될 수 있다고 한다.3)

인간의 근기가 고정된 것이 아니라 항상 무한한 가능성을 갖고 생활하는 것이며 무성종성도 일시적으로 무명에 의하여 진리를 망각한 것뿐이며 그 본성은 진리를 깨닫고 성불도 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원측은 그 이유로서 《보성론(寶性論)》, 《법화경(法華經)》. 《화엄경(華嚴經)》, 《열반경(涅槃經)》 등의 일승사상을 들고 있다. 이와 같은 원측의 견해는 유식을 대승교학경전인 《화엄경》, 《법화경》 등과 연계하여 일승적으로 정립한 것으로서 새로운 유식관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4)

원측은 구유식의 계보에도 신유식의 전통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는 진제나 현장을 통해 불교를 보려하지 않았다. 그는 그의 눈으로 붓다를 보고 붓다의 가르침을 듣고자 하였다.

현장과 진제는 각각 신․구 유식을 대변하지만 유식학자에 머물고 있다. 그러나 원측은 다르다. 그는 유식학자이지만, 중관과 유식을 불교라는 전체적인 골격을 바탕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 점이 유식학자 진제․현장과 다른 원측의 독자적인 성격이다. 그는 일승(一乘)의 관점에서 중관과 유식을 동등하게 평가하고 있다. 그는 유(有)와 공(空)을 모두 버린 것을 중관으로 설정하고, 유와 공을 모두 수용하는 것을 유식으로 본다. 다시 말해서 원측은 붓다의 가르침은 본래 ‘일미(一味)’라고 본다. 그런데 중관은 ‘그 맛이 없다’는 것이고 유식은 ‘맛이 없는 것, 그것도 맛’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고 한다.

원측은 유식을 중관보다 진정한 의미의 가르침이라고 판단한다. 하지만 유식만이 진정한 요의(了意)를 드러낸다고 하는 현장이나 진제의 주장에 대해서, 유식은 공․유의 두 가지를 드러내고 중관은 유․무의 집착을 제거했다고 말함으로써 유식 속에 중관을 끌어안는다.5)

원측은 여러 가지 불교 이론은 깨달음의 바다에 이르는 강줄기에 비유될 수 있다고 여긴다. 그리고 그것이 바다에 이르면 한 가지 맛이 된다는 것이다.6) 그런 의미에서 중관과 유식은 어느 것도 버려야 할 대상이 아니다. 중관이나 유식은 듣는 사람이 어디에 치우쳐 있는가에 따라서, 그것을 치유하고 바르게 하는 처방에 불과한 것이다.

주) -----
1) 정영근, <신라유식과 중국유식-그 연속과 불연속>, 《한국불교사상의 특수성과 보편성》(한국학술정보, 2008), P.136.
2) 위의 논문, pp.137∼138.
3) 고영섭, <문아의 일승학>, 《국학연구》창간호(한국국학진흥원, 2002), p.179.
4) 오형근, <원측법사>, 《한국불교인물사상사》(민족사, 1997), p.40.
5) 정영근, 앞의 논문, p.140.
6) 오형근, 앞의 논문, p.41.

이덕진 | 창원 문성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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