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선설과 성무선악설

노인이 애물단지가 되어가고 있다. 머잖아 나도 노인이 될 텐데, 씁쓸하다. 옛날에는 안 그랬다. 노인은 어른으로 존경을 받으며 여생을 보냈다. 세태가 변한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이 나빠진 건가?

전통적인 농경사회에서 노인의 경험은 매우 큰 자산이었다. 노인은 언제 씨를 뿌리고 어떻게 가꿔야 하는지를 알았다. 그들의 오랜 경험은 자연의 변화를 예측하여 필요한 대비를 할 수 있게 해주었다. 하지만 과학이 발달하고 인터넷 시대가 되면서 노인의 경험은 하찮은 게 되었다. 인터넷에 들어가면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 준다. 노인들보다 훨씬 정확하고 과학적인 지식을 알려준다. 어디 그뿐인가? 노인들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줄 모른다. 그러다 보니 필요한 혁신을 하지 못해 언제나 뒤쳐진다. 노인들 얘기를 듣고 따라하다가는 기회를 놓치거나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이런 시대에 노인이 천덕꾸러기 애물단지가 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다. 지금처럼 젊은이들에게 부담만 주는 노인이 되어서는 현대판 고려장의 등장도 얼마 남지 않을 듯싶다. 이쯤에서 한 번 물어보자. 나이 드신 어른을 공경해야 한다는 도덕적 명제는 과연 타당한가? 사회적 필요에 의해서 생긴 것이라면 마찬가지로 사회적 필요에 의해 폐기될 수 있는 것 아닌가?

도덕적 명제는 불변의 과제이며 지상명령임을 강조하며 평생을 보낸 사상가가 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널리 전파하기 위해 왕들을 설득했고, 이단(異端)들과 논쟁했다. 전국시대(戰國時代)를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살아간 사상가, 그는 맹자(孟子)이다. 먼저 인간의 본성에 대한 맹자와 고자(告子)의 논변을 살펴보자.

고자 : 식욕과 성욕이 사람의 본성이다. 그러니 인(仁)은 나의 안에 있고 밖에 있는 것이 아니며, 의(義)는 밖에 있고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맹자 : 어찌하여 인은 안에 있고 의는 밖에 있다고 말하는가?

고자 : 저들이 어른이라고 하므로 내가 그를 어른으로 여기는 것이지 나에게 그를 어른으로 섬기려는 존경심이 있어서가 아니다. 이는 마치 저들이 흰색이라고 하므로 내가 그것을 흰색이라고 여기는 것으로 밖을 따라 하얗다고 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이것을 밖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맹자 : 흰 말을 희다고 하는 것은 흰 사람을 희다고 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잘 알지 못하겠지만, 나이 많은 말을 나이 많다고 하는 것과 나이 든 사람을 나이 들었다고 하는 것은 다른가? 또한 나이 많은 사람이 의(義)인가, 아니면 나이 많은 이를 어른으로 높이는 것이 의(義)인가?

고자 : 내 아우이면 사랑하고 진나라 사람의 아우이면 사랑하지 않는다. 이는 나를 위주로 기쁨을 삼는 것이다. 그러므로 안에 있다고 하는 것이다. 초나라 사람의 어른은 어른으로 여기며 내 어른 또한 어른으로 여기니, 이는 어른을 위주로 기쁨을 삼는 것이다. 그러므로 밖에 있다고 하는 것이다.

맹자 : 진나라 사람이 불고기를 즐기는 것이 내가 불고기를 즐기는 것과 다를 게 없다. 모든 사물이 또한 그럴진대, 그렇다면 불고기를 즐기는 것도 또한 밖에 있는 것이라고 하겠는가?1)

옛사람들의 말이다 보니 현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억지스럽고 비논리적인 것이 많다. 그렇더라도 억지와 비논리를 걷어내고 진의를 보는 건 그리 어렵지는 않다. 하여튼, 먼저 고자가 보는 사회적 규범, 혹은 도덕은 의(義)이다. 고자에게서 인(仁)은 도덕과는 무관한 자연적 본능이다. 식욕과 성욕이 일어나는 곳, 굳이 해석해야 한다면 ‘인간다움’ 정도가 되겠지만, 이 경우도 도덕성을 가리키기 보다는, 수염이 석자라도 먹어야 양반인 차원의 인간다움이다. 그래서 고자는 타고난 그대로가 본성이라고 하였다. 배고프면 먹어야 하고, 먹었으면 싸야 하는 건 모든 자연인의 본성이다. 이런 본성을 인으로 보기 때문에 인은 안에 있다고 하는 것이다.

반면 의는 어른을 보면 자리를 양보하는 것이다. 고자에게서 이런 양보는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다. 상대가 어른이니까 하는 것이다. 의가 밖에 있다고 하는 이유이다.

맹자의 경우는 한국 사람이나 미국 사람이나 불고기 좋아하는 건 똑같고, 그 좋아함은 내가 좋아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맹자가 말하는 도덕은 보편적이며 주체적인 것이다. 인간의 주체 안에 내재해 있는 것이다.

고자 : 사람의 본성은 물과 같다. 물은 동쪽으로 터놓으면 동쪽으로 흐르고 서쪽으로 터놓으면 서쪽으로 흐른다. 그렇듯 사람의 본성에 선과 불선의 구별이 없는 것은 마치 물에 동서의 구별이 없는 것과도 같다.

맹자 : 물은 진실로 동서의 구별이 없다. 그렇다고 하여 상하의 구별도 없는가? 사람의 본성이 선한 것은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과도 같아서, 사람이 선하지 않은 것이 없고 물이 아래로 흘러가지 않는 것이 없다. 지금 저 물을 쳐서 튕기면 이마 위로도 넘어가게 할 수 있고, 막아서 흘러들게 하면 산중에도 있을 수 있지만 이것이 어찌 물의 본성이겠는가? 그 형세가 그런 것이다. 사람이 선하지 못한 행위를 하는 것도 그 본성은 이와 같은 것이다.2)

고자에게서 인간이 선한가 악한가의 문제는 전적으로 후천적인 영향에 달려 있다. 마치 물이 동으로 트면 동으로 흐르고 서로 트면 서로 흐르듯이 인간 또한 환경을 비롯한 외부적 요인에 의해 선해지기도 하고 악해지기도 하는 것이다.

반면에 맹자는 동으로 흐르든 서로 흐르든 반드시 높은 데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성질이 물의 본성이라는 것이다. 때로 흐름을 거스르는 경우는 인위적인 힘이 가해진 것이지 물의 본성은 아니라는 입장이다. 맹자의 주장은 물의 본성이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인간의 본성 또한 선한데, 때로 악한 행위를 하는 이유는 형세나 환경에 따른 것이지 본성 때문은 아니라는 것이다.

고자 : 사람의 본성은 버드나무와 같고 의는 그릇과 같다. 인성으로 인의를 행하는 것은 버드나무를 갖고 그릇을 만드는 것과 같다.

맹자 : 그대는 버드나무의 성질에 좇아 그릇을 만드는가? 아니면 버드나무를 휘고 꺾은 후에야 그릇을 만드는가? 만일 버드나무를 휘고 꺾은 후에야 그릇을 만든다면 또한 사람도 휘고 꺾은 후에야 인의를 행할 수 있을 것이다. 천하의 사람들로 하여금 인의를 해치게 하는 것은 반드시 그대의 말일 것이다.3)

맹자가 볼 때, 고자의 말대로라면 젊은이가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행위는 교육과 훈련을 거친 이후라야 가능하다. 도덕적 사회는 후천적인 노력과 훈련의 결과인 것이다. 맹자는 이런 후천성과 인위성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맹자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자리를 양보하는 세상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서로 사랑하고 서로 아끼며 악이 발붙일 곳이 없는 세상을 꿈꾸었다. 맹자의 그런 꿈은 너무도 강렬하고 분명히 실현가능하다고 여겼기에, 이를 거부하는 모든 주장과 학설을 맹렬히 비판하였다. 고자에 대한 경멸적인 언사는 그만큼이나 맹자의 이상이 강했다는 얘기에 다름 아니다.

2. 성선설과 성악설

고자의 사상은 오직 맹자를 통해서만 알려져 있다. 그가 누구이고 누구로부터 배웠는지 등등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거의 없다. 당시에는 아마도 크게 주목받던 사상가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맹자가 “지금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이 천하를 덮고 있으니, 양주와 묵적을 비판하는 자들은 모두 성인의 무리이다.”라고 했는데, 《맹자》에서 고자와의 논쟁을 크게 다루고 있는 것으로 보면, 아마도 양주계열의 사상가로 짐작될 뿐이다. 양주는 “머리 한 올을 뽑아 천하가 평화로워진다고 해도 하지 않겠다”는 입장이고, 묵적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온몸이 갈아 없어지더라도 천하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하겠다”는 주의이다. 극단적 위아주의(爲我主義)와 극단적 위타주의(爲他主義)로 이해되는 이들의 사상을 맹자는 무부무군(無父無君), 어버이도 없고 임금도 없으니 금수와 다를 게 없다고 극렬하게 비판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맹자로부터 다시 한 세대쯤 지나 순자(荀子)가 등장하여 성악설(性惡說)을 주장한다.

▲ 맹자(왼쪽)와 순자. 전국시대를 대표하는 사상가로 각각 성선설과 성악설을 주장하였다.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 그 선한 것은 인위(人爲)이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이익을 좋아하기 때문에 서로 싸우고 빼앗으며 사양할 줄 모른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질투하고 증오하기 때문에 남을 해치고 성실과 신의가 사라진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감각적 욕망이 있어서 좋은 소리와 좋은 빛깔을 좋아하기 때문에 음란해지고 예의와 문리가 사라진다.”4)

순자가 인간의 본성을 악으로 보는 근거는 욕망과 이기심이다. 순자에 의한다면 인간은 본질적으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고 욕망을 충족시키려 한다. 이런 욕망과 이기심은 필연적으로 충돌을 유발하기 때문에 사회에는 싸움과 음란함이 끊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예(禮)로써 본성을 교정하여야 개인과 사회는 도덕적일 수 있다.

“예란 어디에서 나오는가? 사람은 태어나며 욕망이 있게 되는데,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구하게 되고, 구하는데 그 한계(限界)를 헤아릴 줄 모르면 서로 다투게 된다. 서로 싸우면 사회가 어지러워지니 선왕이 그 어지러움을 미워하여 예의를 제정하여 분수가 있게 하였다.”5)

욕망이 무한히 허용된다면 사람들은 서로 싸우고 사회는 혼란스러워질 것이다. 그러므로 욕망에 대한 통제와 한계를 분명히 하여야 할 필요가 있어서 선왕이 예를 제정하였다는 게 순자의 생각이다. 이기적인 욕망덩어리를 마치 굽은 나무를 펴고 쇠를 달구듯, 철저한 교육과 훈련을 통해 바르게 하여야 비로소 도덕적일 수 있는 것이다.

순자의 예는 인간의 욕망과 본능을 통제하는 규범(規範)이다. 선왕이 제정한 것으로 외재적이며, 강제력을 갖는다. 하지만 맹자의 예는 내재적이며 자발적인 것이다. 사람들의 착한 본성이 자연스럽게 밖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어른을 보면 저절로 공경하는 마음이 우러나와 얼른 자리를 양보하는 예의 바른 청년이 바로 맹자가 보는 인간이다.

3. 인간의 본성, 선한가? 악한가?

가끔 학생들로부터 성선이 맞는지 성악이 맞는지 질문을 받았다. 토론도 있었고……. 지금은 그나마 그런 질문조차 없다. 어쩌다 이 땅의 젊은이들은 질문할 줄 모르는 세대가 되었다. 의문조차 품지 않는 젊은이들이 되어버렸다. 의문이 없어서가 아니라 답을 구할 스승이 없기 때문은 아닌지…….

결론부터 말한다면 질문이 틀렸다. 맹자의 성선설이 맞느냐, 순자의 성악설이 맞느냐고 질문할 게 아니라, “그들은 왜 성선을 주장하고 성악을 주장합니까?”라고 물어야 한다. “본성은 이렇다.”라고 규정하는 순간 다른 주장과 그 근거가 산더미처럼 쏟아진다. 성선설에 반론을 제기할 수 있는 근거, 성악설이 틀렸음을 증명할 수 있는 근거들은 모두 엄청나게 많다. 어느 한쪽의 주장이 일방적으로 옳은 일은 없다. 이는 선택의 문제이다. 따라서 우리가 물어야 하는 것은 맹자와 순자는 왜 성선설과 성악설을 선택했냐는 것이다. 이 또한 결론부터 말한다면 각각의 정치적 입장이 다르기 때문이다. 현실적 문제를 바라보고 그 해법을 추구하는 방향이 다르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맹자는 전통적인 신분질서를 옹호하였다. 천자로부터 제후, 대부, 선비계급으로 내려오는 신분제 사회가 도덕적이며 좋은 사회라는 입장이다. 권력은 서로 조금씩 나누어 갖고, 서로의 경계를 지키며 인의를 실천하면 천하는 평화로워 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전제조건이 신뢰이다. 상대가 나를 배반하지 않고 충성과 신의를 지키리라는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제안이다. 즉 인간은 본질적으로 믿고 맡길 수 있는 존재, 도덕적인 인간, 선한 본성의 소유자이어야만 하는 것이다. 맹자가 양주와 묵적을 격하게 비난했던 이유도 그들의 사상이 전통적인 신분사회를 붕괴시킨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순자는 전통적인 신분질서를 깨뜨리려고 하였다. 춘추시대 초기 2000여 개를 헤아리던 제후국은 전국시대에 접어들며 불과 일곱 개의 국가로 통합된다. 진(秦), 초(楚), 연(燕), 제(齊), 한(韓), 위(魏), 조(趙). 이른바 전국칠웅(戰國七雄)이 천하의 대권을 놓고 치열한 전쟁을 벌였다. 이 전쟁에서 최후의 승자가 되기 위해 각국은 다투어 강력한 부국강병책을 택하였다. 동시에 이를 설계하고 시행할 유능한 인재를 필요로 하였다. 능력자라면 신분의 고하는 따질 게 없었다. 전통적인 신분질서는 설 자리를 잃고 유학자들의 향수 속에서나 남아 있게 된 것이다.

새로운 질서, 왕을 중심으로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신하와 백성들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였다. 그게 법(法)이다. 순자는 법가(法家) 사상가들의 스승이었다. 순자의 예치(禮治)는 법치(法治)로 가는 징검다리였으며. 성악설은 강력한 통제와 강제력을 정당화하는 철학적 근거였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성선설, 성악설, 성무선악설 등등의 인성론(人性論)은 모두 선택의 문제였다. 그리고 어떤 정책을 택할 것인가는 대개 권력구조가 결정하였다. 선택이 정해지면 그에 맞춰 개인은 교육되고 통제되었다. 이런 과정은 권력구조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다. 개인은 바뀐 권력구조의 필요에 따라 다시 교육되고 통제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인성론은 25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미해결인 채로 남아 있는 것이다. 천덕꾸러기 노인, 애물단지 늙은이. 싸가지 없는 젊은 것들. 자학하지도 말고 욕하지도 마시라. 그건 경제성, 효율성이 좋다고, 이 비인간적인 경쟁체제를 선택한 당신들의 몫이니까.

주) -----
1) 《맹자(孟子)》 〈고자 상(告子上)〉
2) 위의 책.
3) 위의 책.
4) 《순자(荀子)》 〈성악(性惡)〉
5) 위의 책, 〈예론(禮論)〉

김문갑 | 충남대 한자문화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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