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서 말하는 중도는 길이(거리)의 중간이 아니다. 무게의 중간이다. 어느 한쪽이 무겁다면 가벼운 쪽으로 치우쳐 평형을 유지하는 중립이 중도인 게다.

화쟁이 갈등을 조정하고 치유하는 불교적 합의의 틀이 되기 위해서는 중도의 가르침인 무게의 중립에 기반한 것이어야 할 것이다.

어제 화쟁위원장 도법 스님이 기자회견을 열어 한상균 민노총 위원장이 조계사로 피신한 뒤 자진 출두하기까지 화쟁위의 역할과 활동을 알렸다. 도법 스님은 이 자리에서 정부와 경찰이 대화에 응하지 않아 한상균 위원장을 설득할 수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도법 스님은 그럼에도 최선을 다했고 모두가 만족할 수는 없지만 차선의 결과를 얻었다고 했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화쟁위의 활동이 과연 화쟁이었는지. 그건 화쟁이 아니다. 화쟁이란 대립하는 양쪽 의견을 중도적 입장에서 조화시키는 것이지 어느 한쪽의 편을 들거나, 어느 한쪽에 상대의 입장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제대로 화쟁할 것이었다면 한상균 위원장의 자진 출두를 설득할 게 아니라 정부와 경찰이 대화에 나서도록 압박했어야 한다. 그게 부처님의 중도 가르침에 합당한 화쟁일 게다.

화쟁위는 기자회견을 통해 그간의 활동과 성과를 자랑하고 싶었는지 모르지만, 결과는 제 얼굴 깎아내리기에 불과했다. 어제 기자회견은 화쟁위의 정체성과 지향점을 보여주는 최악의 자화자찬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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