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자혜랑(報慈慧朗, 唐末五代) 선사는 현사사비에게 나아가 출가하였으나, 구족계를 받은 이후에는 장경혜릉(長慶慧稜, 854~932)선사에게 참학하였다. 장경의 26인의 제자 가운데 가장 뛰어났으며, 보통 낭상좌(朗上座)로 불리었다고 한다. 후에 장경의 법을 이었으며, 복건성(福建省)의 보자원(報慈院)에 주석하였다.
우선 《조당집》에는 다음과 같은 문답이 실려 있다.

어느 날 보자선사가 상당해서 말하기를 “사방에서 온 이들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점검하여 갈 곳이 없는 무리는 대나무로 아프게 때리리라. 설사 완전하게 대답했다 해도 역시 아프게 때리리라”. 했다. 그러자 한 스님이 물었다. “이미 완전하게 대답했는데, 어째서 때립니까?”. 이에 선사가 대답했다. “듣지 못했는가? ‘일구의 사리에 부합되는 말은 백 년 동안 나귀를 매는 말뚝이다[一句合頭語, 萬劫繫驢橛]’는 말을.”

합두어(合頭語)란 ‘진리를 남김없이 드러낸 말’이란 뜻으로서 선에서는 좋지 않은 의미로 쓰인다. 스승은 불법 내지 선의 진리를 남김없이 가르쳐 주어서는 안 되며, 제자로 하여금 스스로 체득하도록 해야 한다. 만약 언구(言句)로서 진리를 남김없이 가르쳐 준다면, 그것은 제자를 망치는 지름길이 된다. 보통 석가모니가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은 진리를 사성제(四聖諦)니 십이연기(十二緣起)니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필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석가모니가 깨달은 진리 그 자체는 아무도 모른다고 해야 한다. 스스로 깨쳐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이다. ‘석가모니께서 진리를 깨치고 나서 그 혜안(慧眼)으로 보니, 세상은 사성제와 십이연기의 원리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해야 옳다.

 합두어란 '진리를 남김 없이 드러낸 말' 뜻
 스스로 체득 강조하는 선가에선 부정의미

《조당집》에는 또 다음과 같은 문답도 실려 있다.

어떤 스님이 물었다. “경전에 말하기를 ‘문수가 유마를 찬탄했다’하는데, 유마는 궁극적 진리를 얻은 것입니까?”. 그러자 보자선사가 답했다. “아직이다. 단지 교(敎)가 다했을 뿐이다.” 스님이 또 물었다. “궁극적 경지를 얻으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보자선사가 “차를 마시고 밥을 먹는다[喫茶喫飯].”고 하니 스님이 “그렇다면 문수는 궁극적 진리를 얻었습니까?” 재차 물었다. 보자가 답했다. “어릴 때부터 출가했으므로 대강은 알고 있다.”

이 이야기는 《유마경(維摩經)》‘불이법문품(不二法門品)’에 나오는 것이다. 문수보살을 비롯한 보살들이 각자 법을 설하고 나서, 문수가 유마거사에게 말했다. “우리는 모두 법을 설해 마쳤다. 이제 당신이 법을 설할 차례이다. 무엇이 보살이 둘이 아닌 법문[不二法門]에 들어가는 것인가?” 그러자 유마거사는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默然無言]. 이에 문수보살이 찬탄하기를 “훌륭하구나! 문자언어가 없는 것, 이것이야 말로 참으로 둘이 없는 법문에 들어가는 것이다”라고 한 구절을 근거로 한 것이다. 그런데 보자선사는 유마거사의 경지도 ‘단지 교(敎)가 다했을 뿐 궁극적인 것은 아니다’고 비판하고 궁극적 경지란 ‘차를 마시고 밥을 먹는 것’에 있을 뿐임을 주장하고 있다.
한편 다음과 같은 문답도 존재한다.

어떤 스님이 물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스승 때문에 삿되게 된다[因師故邪]’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선에서는 어째서 달마를 이은 것입니까?” 그러자 보자선사가 답했다. “만약 달마선사를 뵈었다면, 달마는 어디서 자기의 분상을 드러내고 있던가[若見達摩師,向什摩處出頭]?”

‘스승 때문에 삿되게 된다[因師故邪]’라는 말은 원래 《속고승전(續高僧傳)》‘혜가전(慧可傳)’에 유래하는 것이다. 도항(道恒)선사는 선정을 배워서 왕의 귀의를 받고 제자들이 수천명이나 되었는데, 혜가의 설법을 듣고는 ‘이것은 마군이의 말[魔語]이다’라고 생각하여 제자들 가운데서 뛰어난 자를 골라 혜가에게 보내 시험하게 하였다. 그런데 그 제자는 혜가의 설법을 듣고 감복하여 돌아오지 않았다. 도항은 수차례나 그를 불렀으나 제자는 명령을 듣지 않았다. 후에 우연히 제자를 만난 도항은 ‘내가 입실을 허락하여 너의 눈을 열어주었건만 너는 어째서 이처럼 무례한 것이냐?’고 하였다. 그러자 제자가 답하기를 ‘제 눈은 원래 바른 것이었는데, 스승님 때문에 삿되게 되었습니다[眼本自正, 因師故邪]’라고 한 데서 유래한다.
좋은 스승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이 말은 《조당집》‘설봉의존장’에도 보이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 삽화=장영우 화백

어느 날 제자가 묻기를 “옛사람이 말하기를 ‘내 눈은 원래 바른데, 스승 때문에 삿되게 되었다[我眼本正,因師故邪]’고 하는데, 무엇이 내 눈이 원래 바른 것입니까?” 했다. 그러자 설봉의존선사가 답했다. “달마를 만난 적이 없다.” 제자가 “제 눈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하니 설봉이 말했다. “스승으로부터 얻는 것이 아니다.”

석가모니께서 불법을 깨닫기 이전에도 진리는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것처럼, 달마가 중국에 선을 전하기 이전부터 선의 진리는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혜가가 달마의 가르침을 받아 깨친 것도 자신의 눈으로 진리를 본 것이지 달마로부터 얻은 것은 아니다. 만약 자신이 아닌 타인으로부터 얻은 진리라면 그것이야말로 ‘나귀를 매는 말뚝[繫驢橛]’이 되어버리고 만다.
다시 보자선사의 문답으로 돌아가 보자. 중국선에서는 달마를 초조로 간주한다. 따라서 달마 이후의 선사들은 모두 자신을 달마의 후예라고 주장하였다. 원래 당대(唐代)이전에는 ‘선종’이란 용어가 존재하지 않았고 ‘달마종(達磨宗)’ ‘남종(南宗)’이라고 자처하였다. 제자의 질문은 “선에서는 ‘스승 때문에 삿되게 되었다’고 하면서 왜 달마를 이었다고 자처하는 것입니까?”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에 대해 보자선사는 “만약 달마선사를 뵈었다면, 달마는 어디서 자기의 분상을 드러내고 있던가[若見達摩師,向什摩處出頭]?”라고 되묻는다. 여기서 ‘달마선사를 뵈었다면’이라는 말은 ‘선의 진리를 체득했다면’이라는 말과 같다. 따라서 이 구절은 ‘너는 지금 달마를 이었느니 어쩌니 말하고 있다. 참으로 네가 달마를 이었다면[깨달았다면], 그것을 한번 제시해 보라’라고 하는 말이다.
한편 《벽암록》제48칙에는 보자선사와 왕태부(王太傅) 사이의 문답이 공안으로서 실려 있다. 좀 난해하지만 소개한다.

어느 날 왕태부가 장경혜릉이 주석하던 초경원에 와서 차를 끓이고 있었다. 그 때 낭상좌[보자혜랑]가 명초선사를 위해 차병을 손에 들자마자 그것을 엎어버렸다. 왕태부가 그것을 보고 묻기를 “차로(茶爐)의 밑에는 무엇입니까?” 그러자 낭상좌가 답하기를 “봉로신[捧爐神]입니다”고 했다. 왕태부가 “봉로신이라면 어째서 차병을 엎는 것입니까?” 하니 낭상좌가 “관리로서 천일을 근무해도 하루아침에 실각합니다.”고 했다. 이에 왕태부는 나가버렸다. 이를 본 명초가 말하기를 “낭상자는 초경원의 밥을 먹으면서, 장강(長江)에 가서 장작을 구하고 있구나” 하니 낭상좌가 “스님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고 물었다. 명초가 답했다. “인간도 아닌 놈이 끼어들었구나[非人得其便].”

왕태부란 당시의 천주자사(泉州刺史)로서 초경원(招慶院)을 지어 희사한 왕연빈(王延彬)을 말한다. 왕태부가 차를 끓이고 있는 앞에서 낭상좌가 일부러 차병을 엎었다. 이를 본 왕태부는 법거량을 걸어온다. 봉로신(捧爐神)이란 ‘차로의 다리에 그려져 있는 귀신’을 말한다. 즉 낭상좌는 자신을 봉로신에 비유한 것이다. 그러자 왕태부는 ‘봉로신이라면서 어째서 차병을 엎는 것인가?’하고 반문한다. 한편 명초는 명초덕겸(明招德謙)을 말하는데, 명초덕겸은 일명 독안룡(獨眼龍)이라고도 불린다. 그것은 실제로 눈이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선기(禪機)가 뛰어났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공안에 대한 해석은 독자들에 맡긴다.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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