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적 사고력을 길러주지 못한 교육
 맹목적 경쟁으로 몰아
 성찰하는 연말 되었으면

우리 사회에는 비판적이고 냉철한 판단에 근거한 현실 분석이나 대안 제시보다는 이분법적 편견과 적대감에 근거한 비난이나 냉소주의가 훨씬 더 강하게 뿌리내려져 있다. 20세기 한국인의 가치관이 지니는 특징을 물질주의와 감정주의 등으로 규정했던 윤리학자 김태길의 주장이 그가 이미 피안의 세계로 돌아간 21세기까지 유효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 이유는 아마도 흥과 멋이 있는 삶을 추구해온 우리 조상들의 문화 유전자가 일탈하여 쉽게 흥분하는 감정만 남게 된 탓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우리 교육이 비판적 사고력을 길러주지 못한 채 아이들을 맹목적인 경쟁의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온 현대 교육사의 잔혹한 결과물일 수도 있다. 문제는 그런 즉흥적인 감정 위주의 판단과 비난, 냉소가 사회 전반에 너무 강하게 퍼져 있어 쉽게 극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이른바 사회지도층이라는 정치인들의 극단적이고 적대적인 언사나 그것을 부추기는 언론인들의 편향적이고 반양심적인 글들, 그리고 마지막 보루 역할을 해주어야 할 책임이 있는 종교인들의 막행막식 등이 부정적인 의미에서 상호작용하여 정상적이고 냉철한 판단과 그 판단에 근거한 말과 글을 폄하하는 분위기가 광범위하게 조성되어 있다. 그러다보니 이제는 일부 극단적인 청소년들의 집합소인 ‘일베’ 같은 암적인 영역이 점차 우리 사회의 다른 곳으로 확산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까지 하게 된다.

다행히도 아직 우리 사회가 완전히 배가 뒤집어지는 않을 정도의 균형감각을 지니고 있다는 판단을 할 수 있는 정황적 증거들이 있지만, 그것들도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렵다.

이런 가운데 최근 국정교과서의 부당성과 노동법의 일방적 개정 등에 항의하는 시민들의 집회와 그 집회를 경찰력이라는 폭력으로 봉쇄하고자 하는 정권의 권력 사이에 극단적인 대립이 생겼다. 그 과정에서 시위의 주최측 중 하나인 민주노총 위원장이 우리 조계사로 피신해왔고, 자연스럽게 불교계가 그 중재에 나서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조계종 화쟁위원회가 중심이 되어 진행된 피신 요청 수용과 중재는 일부 조계사 신도들의 극단적인 행동과 경찰의 지속적인 압력에도 일정한 성과를 거두어 지난 12월 5일 집회가 평화롭게 진행될 수 있게 하는데 일조했다.

이제 남은 과제는 평화시위 자체에 담겨 있는 시민들의 정당한 주장을 정부와 정치권이 얼마나 잘 수용하게 할 것인가와 아직 조계사에 머물고 있는 민주노총 한상균위원장에 대한 우리 불교계 내부의 지혜로운 대응 문제이다.

조계사가 조계종을 중심으로 하는 한국불교계의 상징적 공간이고, 그곳으로 피신해온 약자를 보호하는 일은 일상적인 법회나 행사를 넘어서는 심오한 종교적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수용하는 일이 모든 일의 출발점이다.

실정법만을 들먹이는 냉소적인 언사나 빨갱이 등으로 몰아붙이는 극단적인 행동은 여실지견(如實知見)에 기반한 자비의 실천을 역설하신 붓다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일이다.

이제 우리 불교인들부터 무관심과 냉소주의의 짙은 어둠을 떨치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서도 연기적 연결망을 바탕으로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따뜻한 눈길과 손길을 보내는 자비행에 나서야만 하는 시기이다.

화쟁위원회의 활동에 대해서도 객관적으로 평가하면서 내부의 일에 더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라고 요구해야 하지만, 그들이 하는 모든 노력이 의미 없다는 식의 비난과 냉소주의도 함께 넘어서야만 한다. 자신은 우리 사회의 미래를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함께 성찰하는 연말이었으면 한다. 그런 노력들이 쌓이다보면 새해는 어쩌면 조금은 밝은 햇살로 다가올 지도 모른다.

-한국교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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