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계 서평진 철관음 제다 모습.

4) 위진(魏晋) 이전의 제다(製茶)와 음차방법

(1) 선진(先秦)시기의 음차

고대에서 차엽은 한방약 혹은 민간약의 제작과 마찬가지로 잎을 딴 후에 햇볕에 말리거나 그늘에서 건조시켜 만들었다. 식용(食用)으로 사용하였을 뿐 그 어떤 가공(加工)기술도 사용하지 않았다.

선진(先秦)시기에는 사람들이 야생 차나무를 발견하고, 그 신선한 잎을 따서 채소처럼 그대로 먹었을 뿐이며, 달리 특별한 ‘팽음(烹飮)방법’이나 팽다기구를 이용해서 먹지는 않았다. 그냥 밥과 함께 채소반찬을 먹듯이 하였으며, 그 맛이 쓰고 떫기 때문에 ‘고채(苦菜)’라고 불렀었다. 간혹 어떤 이들은 찻잎을 솥 안에 물을 넣고 껄쭉한 탕처럼 끓여서 한약을 조제하듯이 해서 먹었다.

(2) 차엽(茶葉) 가공의 시작과 발달

진(秦)·한(漢)·위진(魏晋) 때에 와서야 비로소 차엽 가공의 기술이 생겨났다.

장집(張輯)의《광아(廣雅)》에는 “형주(荊州 : 현 호북성)와 파주(巴州 : 현 사천성 일대) 사이에서는 차를 채취하여 떡을 만든다. 늙은 찻잎은 쌀의 끈끈이를 낸 것으로 떡을 빚는다. 차를 마시려면, 먼저 구워서 붉은 빛깔이 나게 한다. 그리고 찧은 찻가루를 자기(瓷器) 그릇에 담은 다음 끓는 물을 붓고 덮개를 덮는다. 파·생강·귤을 사용해 솎아낸 후(파·생강·귤을 가려서 사용하고), 그것을 마시면 술이 깨고 사람으로 하여금 잠을 자지 않게 한다.”1)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을 통해 차에 대한 여러 가지 일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차의 효능 및 그것이 미치는 사회적 영향에 대해서도 포괄적으로 알 수 있다.

어쨌든 이 시기에는 차에 대한 여러 가지 음차법이 발달하기 시작하는데 다른 식물과 함께 끓여먹는 ‘차죽(茶粥)’과 국수를 넣어 삶아 먹는 ‘면차(麵茶)’2)도 이때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먹는 방법은 오늘날의 객가족들의 뢰차(擂茶)와 거의 동일하며, 그 외에도 몽고의 ‘우유차’나 티베트족들의 ‘소유차’ 등도 기본적 음차법에서는 대체로 동일선상에서 생각해 볼 수가 있다.

3. 당(唐)과 오대(五代) 시기의 중국의 차업(茶業)

1) 당대(唐代) 차엽(茶葉) 생산의 발전

(1) 동남(東南)지구의 차업(茶業)

위진남북조(魏晋南北朝) 때부터 시작된 음차(飮茶)는 시간이 갈수록 점차 그 문화와 활동이 화북으로까지 전파되기에 이르렀다. 당대에 이르러서는 그 음차활동이 이미 중국 전역으로까지 확산·보급되었다. 문헌에 의하면, 이때 이미 차는 쌀과 소금만큼이나 중요한 음식물이었다. 이러한 풍속은 가까운 곳이나 먼 곳이나 할 것 없이 같은 현상으로 나타났으며, 모든 중국인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없어서는 안 될 정도로 의지하는 필수품이 되었다. 심지어 밭에 나가 일할 때나 마을에 돌아와 이웃과 한적한 시간을 보낼 때도 차는 그들에게 있어 기호음료로서 매우 절실한 것이 되었다.

이처럼 중국인들의 차엽에 대한 폭발적인 인기와 수요의 증가는 당연히 당대의 차엽생산을 촉진하여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하는 기본적인 원동력이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세계 최초의 차 전문서인 당대(唐代) 육우의《다경(茶經)》에서 “차의 기원은 동진(東晋)에서부터 기원하여, 본 조〔朝, 당조(唐朝)〕에 이르러 흥성(興盛)하였다.”라는 기록으로도 가히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3)

또한《다경》의 <팔지출(八之出)>에서는 중국의 차 생산지를 산남(山南)·회남(淮南)·절서(浙西)·검남(劍南)·절동(浙東)·검중(黔中)·강남(江南)·영남(嶺南) 등 8곳으로 구분했는데, 모두 54개 주(州)에서 차가 생산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학자들이 당·송인들의 서술을 종합하여 당(唐)과 오대(五代) 시기의 ‘차엽(茶葉) 생산지역’을 통계·산출한 결과,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69개 주였다고 한다.4)

※ 8대 차엽 생산지역

‘산남(山南)’은 당나라 태종(太宗)은 정관(貞觀) 원년(元年, 627년)에 천하를 10개의 감찰구역인 도(道)로 나누었는데, 그중의 하나가 산남도(山南道)이다. 산남도는 2부(府) 33주(州) 60현(縣)을 통할하였다. 산남이라는 지명은 종남산과 태화산의 남쪽에 위치한 데서 그 이름이 비롯되었다. 산남도 전체를 통치하기 위한 주(州)는 양주(호북성의 양양현)에 있었다. 육우의《다경》이 완성된 상원 원년(760년)에는 산남동도〔襄州〕와 산남서도〔梁州〕로 나뉘었다. 산남도의 경계는 호북성의 대강 이북, 한수 이서, 호남성의 일부, 섬서성의 종남산 이남, 하남성의 북령 이남, 감숙성의 일부, 사천성의 검각산(劍閣山) 이동(以東)과 대강 이남 지역이었다. 육우가 산남도를 첫 번째로 적은 까닭은 산남도가 당시 차나무의 북한대(北限帶)였기 때문이다.

회남(淮南)은 당나라 태종 정관 원년(627년)에 회수(淮水)의 남쪽에 있다 하여 회남(淮南)이라고 하였다. 당나라 때 설정된 10도(733년에는 15도가 됨) 중 하나이다. 지금의 호북성 대강 이북과 한수(漢水)의 이동(以東), 강소성과 안휘성을 흐르는 대강의 이북 및 회수의 이남, 하남성의 남부를 망라하는 지역이었다. 회남도 지역 안에는 차의 역사와 관련이 깊은 천주산과 팔공산 등이 있으며, 송나라 신종(神宗)의 희녕(熙寧) 연간(1068~1077년)에는 회남에 13개소의 차장(茶場)이 있었다.

절서(浙西)는 절강의 서부지방을 가리킨다.《신당서(新唐書)》권68, 방진표 제8에 의하면, 숙종의 지덕 2년, 항주(절강성 항주현)에 강남절도사를 두었다가 건원 원년(758년)에는 승주(남경)에 절강서도 절도 겸 강영군사를 두었다. 그 이듬해에는 승주자사인 안진경(顔眞卿, 709~784년)을 절서절도사 겸 강영군사로 임명하였다. 그 해에 절서관찰사라고 개명되고 선주(宣州)로 옮겼다.

검남(劍南)은 당나라 태종 정관(627~649년) 초에 검각산맥(劍閣山脈)의 남쪽에 둔 도(道)로서 지금의 사천성에 해당된다. 헌종의 개원 2년(714년)에 검남절도사를 두었다.

절동(浙東)은 현재 절강성의 동쪽지방으로 당나라 숙종의 건원 원년(758년)에 둔 절강동도 절도사의 관할구역이다.

검중(黔中)은 당나라 현종의 개원 21년(733년)에 둔 도(道)로서 15고을을 거느렸다. 지금의 호남성과 귀주성 지역이다.

강남(江南)은 당나라 태종의 정관 원년(627년)에 둔 도(道)로서 지금의 절강, 복건, 강서, 호남, 강소, 안휘, 호북성의 큰 강 이남의 땅(즉, 장강 이남의 땅인 사천성의 동남부와 귀주성의 동북부를 포함)이며, 51개 주(州)를 거느렸다.

영남(嶺南)은 당나라 태종의 정관(627~649년) 초년에 둔 도(道)로서 광동성(廣東省)과 광서성(廣西省) 지역을 거느렸다.5)

이상과 같이 당대의 차엽 생산(生産)이 발전함에 따라 차엽의 무역(貿易) 또한 그야말로 공전(空前)의 번영을 누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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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唐) 육우(陸羽)의《다경(茶經)》 〈칠지사(七之事)〉에서《광아(廣雅)》를 인용함. “荊巴間採葉作餠, 成以米膏出之, 若煮茗飮, 先灸令色赤, 搗末置瓷器中, 以湯澆覆之, 用葱薑橘子芼之, 其飮醒酒, 令人不眠.”
2) 《전진문(全晋文)》권138 <식격(食檄)> “弘君擧欣賞食麵茶”
3) 《全唐文》卷72. 李珏《論王播增榷茶書》. “茶爲食物, 無異米鹽. 人之所資, 遠近同俗. 旣蠲渴乏, 難捨斯須. 至于田閭之間, 嗜好尤切.”
4) 張澤咸《漢唐時期的茶葉》《文史》第11集.
5) 김명배 편역 《한국의 다도(茶道)》에서 재인용.

박영환 | 중국 사천대학 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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