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식사상은 소승불교의 부족한 교리를 보충하고 용수(龍樹)의 공(空)사상이 지나치게 공허한 사상으로 치우쳐 가는 것을 바로잡고자 나타난 사상이다. 대승불교의 근본은 ‘무자성공(無自性空)’이다. 중관학파의 용수도 중론에서 여덟 가지의 부정(八不)을 통해 공을 밝히고 있다. 하지만 후대의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일체법이 무자성공이라는 것을 잘못 이해해서 일체가 무(無)라고 혼동하여 받아들이게 된다. 공은 진리를 표현하고 공관(空觀)은 진리를 바르게 바라보는 방식이지만 공견(空見)은 하나의 분별에 불과하다.

유식설은 공견을 타파하고 일체법이 무자성임을 바로 세우고자 한 사상운동이다. 유식설이 악취공자를 비판하면서 세운 학설은 식(識)의 존재를 인정하자는 것이다. 즉 만약 일체가 비존재(非存在)라면 어떤 곳에서 어떤 사람이 무엇을 갖고 공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묻고, 공성이 성립하는 장으로서의 식(識)의 존재를 피력하고 있다.

유식은 산스크리트어로는 비지냐프티마트라타(vijñapti-mātratā)이다. 비지냐프티는 우리들의 인식(vijñāna)의 표상(表象)을 말한다. 마트라는 ‘다만’, ‘뿐’을 나타내며 -tā는 추상명사를 만드는 접미사이다. 따라서 유식이란 자기와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우리들의 인식의 표상에 불과하고, 인식 이외의 사물은 실재(實在)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존재는 인식의 영역 속에서만 성립하며, 인식의 영역을 벗어난 존재는 있을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세계는 마음의 그림자’이다.

유식(唯識), 즉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식의 연기(緣起)가 일체의 모든 것이라는 뜻이다. 주관적 인식과 감각기관, 그리고 대상의 연기적 관계에 의해서 나타나는 것이 ‘일체의 모든 것’이다. 이때 연기적 관계 형성의 근원은 아뢰야식(阿賴耶識)이므로 모든 가능성과 현실은 아뢰야식에 뿌리를 두게 된다. 따라서 아뢰야식이 무엇이고 어떠한 것인가 하는 것을 파악하는 것은 유식학의 중요한 주제가 된다. 아뢰야식을 어떻게 이해하는 가에 따라서 각각 다른 주장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유식학의 발달과정이다.

‘식(識)’이란 용어는 세계를 18계로 설명하는 불교의 체계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인간의 인식기관(육근 : 眼․耳․鼻․舌․身․意根)이 여기에 대응하는 여섯 가지 인식대상(육경 : 色․聲․香․味․觸․法)과 상호관계 함으로써 인식작용인 육식(六識 : 眼․耳․鼻․舌․身․意識)이 일어난다. 그런데 불교의 심식설이 발전하면서 의식의 근거처로 자아의식이라고 말할 수 있는 제7의 마나식(末那識)과 일체 의식의 종자가 모여 있는 제8의 아뢰야식이 설정되었다. 다시 말해서 육식이 현실적 인식작용이라면 거기에 대한 자아의식이 제7식, 모든 의식의 종자가 모여 있는 것이 제8식이 된다.

8식은 앞에서 말한 7식에 대하여 뿌리와 같은 역할을 하므로 근본식(根本識)이라 한다. 그리고 장식(藏識)이라고도 하는데 능장(能藏), 소장(所藏), 집장(執藏) 등 삼장의 뜻이 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식의 행위와 육체적인 행위가 선행이든 악행이든 모든 행위가 곧 선악의 업력이 되어 반드시 아뢰야식에 보존된다. 이때 선악의 업력은 능히 아뢰야식에 진입하여 위탁하게 능장의 입장이 되고, 동시에 아뢰야식은 수동적인 입장에서 그 업력을 받아들여 보존하는 역할을 하므로 소장이라 한다. 이와는 반대로 모든 업력이 아뢰야식에 보존되므로 수동적인 입장에서 소장이 되고, 아뢰야식은 그 업력을 능히 포장하여 보존하므로 능장의 입장이 된다. 이와 같은 내용으로 능장과 소장의 뜻이 있게 되고 집장의 뜻은 마나식에 의하여 집착되어진 망집의 뜻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정신과 육체의 업력을 종자라고 하는데 이들 종자가 심식과 더불어 완전히 정화되지 않는 한 아뢰야식도 유루식으로서 집장의 뜻이 항상 있게 된다. 그리고 이 식은 모든 업력을 보존하면서 선악업력을 여타의 식에 공급하여 발동케 하며 모든 선악의 행동을 나타나게 하는 기능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식, 즉 아뢰야식을 중심으로 해서 살고 있으며 이 세상에 태어날 때에도 과거세의 업력을 보존한 이 식이 최초로 태어난 것이다. 내생으로 떠날 때에도 금생의 업력을 보존하고 있다가 육체로부터 최후로 떠난다. 그리하여 육도 가운데에 어디론가 강한 업력에 따라 최초의 생명체가 되어 출생하게 된다. 그러므로 아뢰야식은 윤회의 주체이다.

아래에서 이것을 간단하게 살펴보자

①안식, ②이식, ③비식, ④설식, ⑤신식
- 전오식, 육체로 성립된 기관에 의지

⑥의식
- 정신적인 기관인 의근에 의지. 따지거나 회상하거나 상상하는 등의 기능을 한다.

⑦마나식
- 7식은 제6식의 의지처인 의근의 역할을 하며 자체와 아뢰야식에 의지하여 활동하는 식.
- 무아의 이치를 모르는 어리석음, 내가 있다는 착각, 내가 잘났다는 교만, 착각된 자아에 대해 애착하는 마음 등을 유발하는 것으로 우리의 ‘자의식과 이기심의 뿌리’이다.

⑧아뢰야식(ālaya vijñāna)
- 윤회의 주체, 근본식(根本識).
- 세상만사를 수렴하고 방출하는 가장 근원적인 마음이다.
- 우리는 이 식, 즉 아뢰야식을 중심으로 해서 살고 있으며 이 세상에 태어날 때에도 과거세의 업력을 보존한 이 식이 최초로 태어난 것이다. 내생으로 떠날 때에도 금생의 업력을 보존하고 있다가 최후로 떠난다.

《섭대승론》을 번역하여 중국에 유식학을 전한 진제(眞諦)는 제 8식인 아뢰야식 외에 불성을 의미하는 무구식(無垢識)을 제 9식으로 설정하였다. 이에 현장은 진제의 9식설(九識說)에 의문을 가지고 인도에 유학을 결심하게 된다. 18년간의 인도 유학을 통하여 현장은 호법(護法) 계열의 유식을 배우고 돌아온다. 이후 현장은 진제와 다르게 오직 제8식만 인정하고 9식은 인정하지 않는다. 진제가 전한 유식학은 구유식(舊唯識)이라 불리고 현장이 전한 유식학은 신유식(新唯識)이라 불린다.

진제의 구유식과 현장의 신유식이 의견을 달리하는 부분은 제8 아뢰야식에 대한 이해이다. 진제는 9식을 주장하지만 현장은 8식만을 말한다. 양자가 견해차를 보이는 중요한 문제에 대해 원측은 진제의 9식설을 반박하면서 현장의 8식설을 지지한다. 진제는 제9식을 무구식이라 하여 8식 위에 둔다. 그러나 원측에 의하면 무구식이란 9식이 아니라 8식 중에 청정한 부분을 말할 뿐이다. 이렇게 진제의 설을 비판하는 면만을 보면 현장의 8식설만을 인정하고 진제의 9식설을 비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용상으로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원측은 제8 아뢰야식 안에 진제의 제9 무구식에 해당하는 청정분을 포함시켜 언급한다. 이 점은 현장이 아뢰야식을 오염된 염오분(染汚分)으로 보는 것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원측이 이렇게 제8 아뢰야식 가운데 특정한 부분을 청정분으로 독립시켜 설명하는 것은 무명을 지멸 시키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의도는 현장보다 진제에 가까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원측의 의도는 8식설의 형식과 9식설의 내용을 조화시키려는 태도를 가지고 있다.

구유식과 신유식을 대변하는 용어는 각각 ‘경식구민(境識俱泯)’과 ‘유식무경(唯識無境)’이다. 경식구민은 주관적 인식과 객관적 대상 양자를 모두 부정하는 것이다. 반면에 유식무경은 객관적 대상은 부정하지만 주관적 인식은 긍정하는 것이다.

진제는 ‘경식구민’의 입장에서 기본적으로 ‘식’을 부정적으로 바라본다. 진제의 이러한 논리는 역설적으로 오직 식만이 있을 뿐이라는 유식의 근본명제를 파기하고 있다. 반면에 현장은 ‘유식무경’의 입장을 가지고 ‘식’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유식의 논지에 충실한 입장이다. 원측은 이 점에서 진제를 비판하고 현장을 지지한다. 이 문제는 보다 자세한 논구가 필요하다.

이덕진 | 창원 문성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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