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경도광(招慶道匡, 생존연대미상)선사는 원래 조주(潮州, 오늘날의 廣東省)사람으로 속성은 이(李)씨이다. 어릴 때 출가하여 여러 선지식을 참학하다가, 장경혜릉(長慶慧稜, 854~932)이 천주(泉州, 오늘날의 福建省)의 초경원(招慶院)에 주석할 때부터 입실하여 공부하였다. 후에 장경의 법을 이었으며, 명성이 사해(四海)에 떨치자 민왕(閔王)이 자의(紫衣)를 하사하였고 법인대사(法因大師)라고 호하였다고 한다.
우선 《조당집》권 13에는 다음과 같은 문답이 전한다.

선사가 상당하여 양구(良久)했다가 말했다. “대중은 자세히 들어라. 내가 그대들에게 진정하게 거양하려 하나니, 낙처(落處)를 알겠는가? 만일 낙처를 알거든 나오라. 대중이 증명하리라. 만일 없다면 한꺼번에 멍청하게 속게 될 것이다.” 이때 어떤 승려가 나와서 말했다. “대중이 구름같이 모였으니 진정하게 거양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에 선사가 양구했다가 말했다. “듣는 이가 누군지 모르겠다.” 승려가 물었다. “듣는 이가 듣습니다[聞者聞]. 듣는 이는 어떤 사람입니까?” 선사가 답했다. “참새가 봉을 쫓아 나는 것이니라[雀逐鳳飛].”

낙처(落處)란 ‘결론’ ‘요점’을 뜻하는 말이다. 초경이 상당해서 불법의 핵심을 아는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요구하자, 과연 한 승려가 법거량을 걸어왔다. 그러자 초경은 ‘듣는 이가 누군지 모르겠다’고 응수한다. 이 때 ‘듣는 이’란 눈앞에 보이는 청중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본래의 자기’ ‘본래면목’을 가리킨다. 임제식으로 하자면 ‘주인공’에 해당된다. 그러자 승은 ‘듣는 이가 듣겠죠[聞者聞]’하고 응수한다. 나아가 승이 ‘듣는 이는 어떤 사람입니까?’하고 재차 묻자, 초경은 ‘참새가 봉을 쫓아 나는 것이니라[雀逐鳳飛]’고 답한다.
이 말은 원래 《장자(莊子)》에 나오는 것으로, ‘대붕이 날개를 펴서 십주를 덮으니 울타리가의 참새가 공허하게 짹짹거린다(大鵬展翅蓋十州, 籬邊燕雀空啾啾)’라는 구절에서 유래한 것이다. 대붕에 비하면 참새는 그야말로 미약한 존재이다. 위의 문답에서 참새와 봉이 누구를 가리키는 지는 명확하지 않다. 혹 초경자신을 봉에, 질문한 승려를 참새에 비유한 것일까?
이 다음의 문답도 똑같이 ‘보고 듣는 주인공’에 대한 문답이다.

어떤 승이 묻기를 “영산의 법회에서는 가섭이 친히 들었는데, 초경의 회상에서는 누가 보고 듣습니까?” 하니 초경이 말했다. “너는 들리는가?” 승이 “그렇다면 가섭이 귀를 기울여 헛되이 이름만 얻은 것입니다.”했다. 초경이 “다시 한 수[一著子]가 있는데 어떠한가?” 하니 승이 또 물으려 하자, 선사가 할을 해서 내쫒아 버렸다.

 "수행하기를 구한다면 자신을 배반하는 일"
 제자 "흐름에 따르면 되는 것이네요."
 초경 "내가 언제 그렇게 말했느냐?"

앞의 문답에서도 그렇지만, 이번의 문답도 초경과 제자 사이에 긴장감이 흐른다. 제자도 만만치 않다. 이 문답에서는 초경화상을 석가모니에, 질문자인 승을 가섭에 비유하고 있다. 초경이 상당하자 한 승려가 나와서 묻는다.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는 가섭(迦葉)이 친히 들었는데, 초경의 회상에서는 누가 보고 듣습니까?’. 처음부터 제자의 질문은 도전적이다. 그러자 초경은 ‘너에게는 들리는가?’하고 되묻는다. 자기의 설법을 듣고 이해할 수 있다면 제자는 가섭이 되는 것이다. 즉 ‘너는 가섭의 역량을 지니고 있는가?’하는 질문과 같다. 그러나 제자는 초경의 대답이 마땅치가 않았다. 그래서 ‘그 정도의 대답이라면 듣고 있었던 내[가섭]가 쓸데없는 짓을 한 셈이다’고 반발한다. 그러나 이 정도로 물러날 초경이 아니다. 초경은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 다시 한수[一著子]가 있어야 하는데 어떠한가?’라고 되묻는다. 그러자 이에 속임을 당한 제자가 한마디 더 하려고 하는 순간 할을 해서 쫒아내 버린다. 일착(一著)이란 원래 바둑용어로서 ‘한수(一手)’라는 의미이다.
초경화상과 관련하여 《조당집》에 나오는 다른 선문답을 들면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 삽화=장영우 화백

어느 날 제자가 물었다. “어떻게 수행하면 자기자신[當人]을 배반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러자 초경이 답하기를 “만약 수행하기를 구한다면 그것은 자기자신을 배반하는 것이다.”했다. 승이 말했다. “그렇다면 성(性)에 맡기고 흐름에 따르면[任性隨流] 되는 것이네요.” 그러자 초경이 말했다. “너에게 언제 그렇게 말했느냐?”

이 문답에서는 제자가 ‘수행의 방법’에 대해서 질문하고 있다. ‘어떻게 수행해야 본래면목을 배반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하고. 당인(當人)이란 원래 ‘본인’의 뜻이지만 여기서는 본래면목을 가리킬 것이다. 하지만 초경은 ‘의식적인’ 수행을 거부한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 말을 들은 제자가 ‘그렇다면 성에 맡기고 흐름에 따르면[任性隨流] 되는 것이네요.’라고 답한다.
‘자기의 본성에 맡기고 의식의 흐름에 따른다[任性隨流]’라는 말은 원래 선종 제 22조인 마나라존자(摩拏羅尊者)의 게송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조당집》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마나라존자가 어느 날 제23조인 제자 학륵(鶴勒)에게 말하였다. “내가 이제 이 정법안장을 그대에게 전하나니, 그대는 잘 지니어 끊이지 않게 하라. 그리고 나의 가르침을 받아라.”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송했다.
마음은 온갖 경계를 따라 굴러다니니 心隨萬境轉
구르는 곳마다 참으로 그윽하다. 轉處實能幽
흐름에 따라 성품 깨달으면 隨流認得性
기쁨도 없고 근심도 없으리라. 無喜復無憂

다시 초경의 문답에 돌아가서 보면, 초경이 수행을 부정하자 제자는 금방 ‘그렇다면 본성에 맡기면 되는 것이네요’하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마저도 초경은 ‘너에게 언제 그렇게 말했느냐?’하고 부정해 버린다. 초경은 임성수류가 또다시 집착이 되고, 하나의 ‘수행방법’이 되는 것을 걱정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다른 선문답을 하나 더 들고 본회를 마치고자 한다.

어느 날 제자가 묻기를 “고인이 상견할 때는 눈으로 보자마자 도가 있음을 알았습니다[目擊道存]. 오늘날에는 어떻게 상견합니까?”했다. 그러자 초경이 답했다. “오늘날에는 목격도존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제자가 “그렇다면 제 질문이 틀린 것이네요?”하니 초경이 말했다. “잘못을 알면 반드시 고쳐야 한다[知過必改].”

목격도존(目擊道存)이란 원래 《장자(莊子)》전자방(田子方)편에 나오는 말로서, 공자(孔子)가 어느 날 온백설자(溫伯雪子)를 만났는데 보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제자인 자로(子路)가 묻기를 ‘스승님께서는 오랫동안 온백설자를 만나고자 하셨는데, 어째서 보고도 말이 없으십니까?’하였다. 그러자 공자가 답하기를 ‘대저 사람은 눈으로 보자마자 도가 있는지 없는지를 알 수 있다. 외모와 목소리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한 고사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초경은 ‘오늘날의 상견은 목격도존 조차도 말할 필요가 없다. 그것을 초월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에 제자가 잘못을 바로 시인하자 초경은 ‘잘못을 알면 반드시 고쳐야 한다[知過必改]’고 충고한다. 지과필개는 《천자문(千字文)》의 ‘선을 보면 그것을 따르고, 잘못을 알면 반드시 고쳐야 한다(見善從之, 知過必改)’에서 유래한 것이다.

-동국대불교학술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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