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세에 출가해 설봉 참학 후에 구봉선사의 법 잇고
 강서성 화산에서 교화 펼쳐, '해타고'가 중심 문답

화산무은(禾山無殷, 884~960)선사의 속성은 오(吳)씨이며, 오늘날의 복건성(福建省) 연강현(連江縣) 출신이다. 7세에 출가하여 처음에는 설봉의존선사에게 참학하였으나 후에는 구봉도건(九峰道虔, ?~921)선사의 법을 이었다. 일가를 이룬 후에는 강서성(江西省) 화산(禾山)에서 교화를 펼쳤다. 화산은 가화(嘉禾, 보리의 일종)의 산지로 유명한 곳으로, 일명 추산(秋山)이라고도 한다. 화산에는 71개의 높고 험준한 봉우리가 있는데, 그 중 최고봉을 적면봉(赤面峰)이라고 하였다. 화산선사는 적면봉 아래에 화산사(禾山寺)를 창건하여 주석하였다. 시적한 후 징원선사(澄源禪師)의 시호를 받았으며, 《조당집》에 의하면 《십일위집(十一位集)》이라는 책을 남겼다고 한다.
그의 스승 구봉선사는 인가를 받은 후 작별을 고하는 화산에게 다음과 같은 게송을 주었다고 한다.

보배를 가지고 보배에 견주니 뜻이 다르지 않고(將寶類寶意不殊)
유리줄로 유리구슬을 꿴다(琉璃線貫琉璃珠).
안팎이 다 통해 있어 다른 길이 없나니(內外雙通無異逕)
우리 집 정원의 한그루인 계수나무를 울창하게 해다오(鬱我家園桂一株).

이 게송에 의하면 구봉은 떠나는 제자 화산에게 ‘너와 나는 마치 보배와 보배를 잇고 유리줄로 유리구슬을 꿰었듯이 서로 연결되어 있고, 하나의 계수나무에서 난 것과 같아서 우리 종문을 더욱 번창하게 해 줄 것’을 당부하고 있다. 제자에 대한 애정과 기대가 듬뿍 담겨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벽암록》제 44칙에는 ‘화산타태고(禾山打太鼓)’라는 공안이 있는데, 그것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화산이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습학(習學)을 문(聞)이라 하고, 절학(絶學)을 린(隣)이라 한다. 이 둘 보다 나아야 참된 초월[眞過]이라고 할 수 있다.” 하였다. 그러자 어떤 스님이 나와서 묻기를 “참된 초월[眞過]이란 무엇입니까?” 하니 화산이 답했다. “북을 칠 수 있는 것[解打鼓].” 이에 스님이 또 묻기를 “참된 가르침[眞諦]이란 무엇입니까?” 하니 화산이 “북을 칠 수 있는 것.”이라 했다. 스님이 또 묻기를 “‘마음이 곧 부처이다[卽心卽佛]’에 대해서는 묻지 않겠습니다.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非心非佛]’는 것은 무엇입니까?”하니 화산은 “북을 칠 수 있는 것.”이라 답했다. 스님이 또 묻기를 “향상인(向上人)이 왔을 때에는 어떻게 응대해야 합니까?”하니 화산이 또 답했다. “북을 칠 수 있는 것.”

이 구절은 원래 승조(僧肇) 《보장론(寶藏論)》관조공유품(觀照空有品)의 ‘대저 도를 배우는 데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진이고 둘째는 린이며 셋째는 문이다. (문과 린의) 두 가지보다 나은 것이 바로 진이다(夫學道者有三. 其一謂之眞, 其二謂之隣, 其三謂之聞. 過此二者, 是爲眞)’에서 유래한 말이다.
한편 습학[학문을 익히는 것]이란 《논어(論語)》학이편(學而篇)의 ‘배우고 때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 不亦悅乎)’에 의한 것으로, 여기서는 점수(漸修)에 비유한 것이다. 또 절학[학문을 끊는다]이란 《노자(老子)》제20장에 나오는 ‘학문을 끊으면 걱정이 없다[絶學無憂]’에 의한 것으로서 여기서는 돈오(頓悟)를 가리킨다. 화산은 습학과 절학을 뛰어넘어야 ‘참된 초월[眞過]’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제자가 ‘참된 초월이란 무엇입니까?’하는 질문에 대해서 화산은 ‘북을 칠 줄 아는 것[解打鼓]’이라고 답한다. ‘북을 친다’는 것은 절에서는 시간을 알리는 신호였다고 생각되지만, 어쨌든 북을 칠 줄 아는 것이 왜 참된 초월이 되는지는 필자로서는 알 수 없다. 더구나 화산은 제자들이 어떤 질문을 하든지 간에 언제나 ‘북을 칠 줄 아는 것[解打鼓]’이라고 답할 뿐이다. 이와 같이 화산은 제자들의 질문에는 언제나 ‘해타고’로서 답하였다.

▲ 삽화=장영우 화백

《조당집》에는 또 다음과 같은 화산의 가르침이 실려 있다.

도를 닦는 것은 정말 쉽지가 않다. 여러 스님들이여. 옛 스승들이 제자를 제접할 때 한번 열고 닫자 문득 깨달아 버리는 것을 보지 못했는가? 이는 유정(有情)세계의 방편이다. 이보다도 영운이 복숭아꽃을 보고, 앙산이 구름을 본 것은 무정(無情)세계의 사물이니, 어떻게 대처해야 문득 깨달아 사람들로 하여금 들어갈 수 있게 하겠는가? 나아가 귀종이 솥을 두드리고 주먹을 세운 일들이 있는데, 이것은 마치 병아리가 안에서 쪼고 닭이 밖에서 쪼는 일과 같다. 이렇듯 최상의 근기라야 비로소 된다.

 화산 최고봉 아래 화산사 창건
 시적한 후 '징원선사' 시호 받아
 '십일위집' 저서 남겨

화산이 제자들이 질문할 때마다 항상 ‘해타고’라고 대답한 것은 일조일석에 이루어진 답이 아니다. 오랫동안 제자를 가르치면서 고심 끝에 고안해 낸 방편인 것이다. 위 구절에서는 선림에서 그러한 방편을 고안해 낸 사례들을 들고 있다.
우선 ‘영운(靈雲)이 복숭아꽃을 보고 깨달은 기연(靈雲見桃花)’은 영운지근(靈雲志勤) 선사가 어느 봄날 우연히 꽃송이가 무성하게 핀 것을 보다가 갑자기 깨달음을 얻어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은 것에서 유래한다.

30년 동안 검을 찾던 나그네(三十年來尋劍客)
몇 차례나 꽃이 피고 몇 차례나 잎이 돋았는가?(幾逢花發幾抽枝)
복숭아꽃을 한 차례 본 뒤로(自從一見桃花後)
지금까지 다시는 의심하지 않는다(直至如今更不疑).

또 ‘귀종이 솥을 두드리고 주먹을 세운(歸宗敲鼎豎拳)’ 기연은 《조당집》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귀종지상(歸宗智常)선사가 솥뚜껑을 세 차례 두드리고는 물었다. “들리는가?” 승이 대답하기를 “들립니다.”하니 귀종이 “그런데 어찌하여 나에게는 들리지 않는가?”했다. 승이 대답을 못하자 선사가 때렸다.

이만권(李萬卷)이 물었다. “대장경은 어떤 일을 밝힌 것입니까?” 그러자 선사가 주먹을 치켜들면서 물었다. “알겠는가?” 이만권이 “모르겠습니다.”하니 귀종이 말했다. “이공이 주먹도 알지 못하는구나.”

화산의 해타고와 마찬가지로 귀종지상도 제자들의 물음에 언제나 주먹을 치켜세울 뿐이었으므로 ‘귀종수권(歸宗豎拳)’은 제자를 가르치는 방편으로 유명해졌다. 이와 같이 뛰어난 스승들에게는 제자를 가르치는 고유의 방편이 있었다.
화산과 관련해서 《조당집》에는 다음과 같은 문답도 실려 있다.

어느 날 제자가 물었다. “어떤 것이 불법(佛法)의 대의입니까?” 그러자 선사가 대답했다. “나를 알아주는 이를 위해서 기꺼이 죽는 것이니라.” 제자가 다시 “어째서 죽습니까?” 물으니 선사가 말했다. “좋은 마음에는 좋은 과보가 없느니라.”

‘불법의 분명한 뜻[佛法的的大意]’을 묻는 제자에게 ‘나를 알아주는 이를 위해서는 기꺼이 죽는 것이니라(爲知己者喪身)’라고 화산은 대답한다. 이 말은 ‘불법을 위해서는 신명(身命)을 바쳐야 한다’는 뜻이겠지만, 원래 이 말은 《사기(史記)》에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고, 여인은 자기를 사랑해주는 사람을 위해 화장을 한다(士爲知己者死, 女爲悅己者容.)’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런데 제자는 ‘불법을 위하는데 왜 하필 죽어야만 합니까?’라고 의문을 제기한다. 이에 대해 화산은 ‘좋은 마음에는 좋은 과보가 없느니라(好心無好報)’고 답한다. 이는 ‘불법을 위하면 좋은 과보를 받을 것이다’라든가 심지어 ‘좋은 과보를 받기 위해서 보시하거나 공양하는’ 안이한 태도를 비난한 것에 다름 아니다.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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