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에 있어서 꽃은
 단순한 식물이 아니라
 관세음 보살의 현신


1933년, 만해는 진성당 병원의 간호원 유숙원과 결혼을 하고 여러 지인의 도움을 받아 성북동 산자락에 조촐한 집을 마련하여 ‘심우장(尋牛莊)’이라 이름 지었는데, 총독부를 마주 보는 게 싫어 북향으로 터를 잡은
일은 잘 알려져 있다.

그가 재혼을 하고 사가(私家)를 지은 일은 승려이자 독립지사 만해의 표상과 모순되는 행위 같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조선불교유신론」 등을 통해 꾸준히 강조해온 자신의 종교적 신념과 철학을 실천한 일관된 행위의 결과이다. 그는 유숙원과 함께 심우장에 살면서도 그 이전과 전혀 다르지 않은 삶을 실천함으로써 결혼이 수행생활에 근본적인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실천해 보여주었던 것이다.

심우장에 기거하며 만해는 주로 소설을 썼다. 이것은 백담사에 머물며 《님의 침묵》의 원고를 썼던 일과 좋은 대비가 된다. 한국 근현대시사의 가장 탁월한 성취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님의 침묵》과 근대소설에 미달하는 작품으로 폄하되는 《흑풍》 등을 동일한 차원에서 비교하는 것에 반론이 있을 수 있으나, 그러한 가치평가는 문학적 관점에서의 판단일 뿐 전인적 인간으로서의 만해에겐 《님의 침묵》과 《흑풍》이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은 글쓰기였다.

그는 시대적 상황이나 독자의 수준‧취향을 고려하여 시·논설·수필·소설 등을 발표한 것이지 전문작가로서 예술적 가치를 고려한 문예물을 쓴 게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시인으로서의 명성이나 영예에 추호라도 관심이 있었다면 《님의 침묵》으로 이룬 성가(聲價)에 위해가 되는 글쓰기를 하지 않았으리라는 점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소설 《흑풍》에서 원수 갚기를 주장했던 그는 《박명》에서는 거꾸로 은혜에 보답하기를 강조했다. 그것은 민족 혁명가 한용운이 진정한 승려 만해로 성숙해가는 과정이라 볼 수 있다.

만해는 심우장에서 작은 꽃밭을 만들어 아침저녁으로 생생한 잎사귀, 어여쁜 꽃송이들이 자라나는 모습을 보며 즐거워했다고 한다. 이 세상에 꽃을 싫어하고 미워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만해는 특히 꽃을 사랑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를테면 그는 1929년 광주학생의거 당시 잠시 감금된 적이 있었는데, 친지에게 면회를 오라 하여 자신이 재배하는 화초가 얼어 죽지 않게 잘 보살펴달라고 부탁했을 정도다. 그것은 1911년 만해가 만주 굴라재에서 총격을 받고 사경을 헤맬 때 관세음보살이 현신하여 꽃을 던지며 “네 생명이 경각에 있는데 어찌 이대로 가만히 있느냐?”고 꾸짖는 바람에 정신을 차렸다는 일화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다시 말해 만해에게 꽃은 단순한 식물이 아니라 관음보살의 현신, 또는 자아와 우주의 동일체의 표상으로 여겨졌던 것 같다. 불교에서 꽃은 광대무변한 진리의 상징(華嚴)이며, 부처님의 가르침이 전해지는 아름다운 과정의 상징(拈花微笑)이다. 그러므로 만해가 심우장 뜨락의 꽃밭을 가꾸며 말년을 보냈다는 것은 단순한 노인의 취미생활을 넘어 우주와 혼연일체가 되어 정신의 자유를 누린 것으로 볼 수 있다.

최근 성북동 심우장에 꽃밭을 조성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동안 몇 차례 심우장에 들렀을 때마다 뭔가 허전하고 썰렁한 느낌을 받았었는데, 예전 만해선사가 즐겨 보던 작은 꽃밭을 만들었다는 얘기를 듣고 무척 기뻤다.

흔히 유명 고찰이나 문화재를 ‘복원(復元)’한다며 이상한 모양으로 망쳐놓는 일이 많은데 지난 주 고창 미당축제에 가 본데없이 함부로 세워놓은 미당생가를 보고 절로 한숨을 쉬었다. 그나마 이번에 조성된 심우장 꽃밭은 그리 난잡하고 요사스럽지 않아 다행이었다. 말년의 만해선사가 참선과 사색을 하며 돌보던 꽃밭은 소박하고 단아해야 제격이다. 심우장을 찾는 중생들이 만해선사의 다음 시 한 구절을 떠올리면 작히 좋으랴!

“가자가자 사막도 아닌 빙해(氷海)도 아닌 우리의 고원(故園)
아니 가면 뉘라서 보랴 한 송이 두 송이 피는 매화(梅花).”

-동국대 문창과 교수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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