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사도>(2015)를 만든 이유에 대해 이준익 감독은 사람들에게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고 싶어서라고 대답했습니다. 영조의 아들이자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 세자 이야기는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다 아는데, 이 이야기를 굳이 다시 하는 이유는, 우리 사회가 많은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는데 그런 사람들에게 작은 위로라도 되고 싶어서라고 변을 했습니다. 많이 웃었을 때도 스트레스가 해소되지만 실컷 울고 났을 때도 비슷한 효과가 있기에 감독은 슬픈 이야기를 통해 대중의 마음을 정화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감독의 의도는 적중했습니다. 200년도 지난 이야기에서 현재의 상황과 접점을 만들어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이성적인 인물과 감정적 인물의 차이점 등 시대를 뛰어넘는 공통된 주제를 통해 사도 세자 이야기를 훨씬 가깝게 만들어냈습니다. 실패한 삶을 살았던 한 인물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했습니다. 영화의 순기능을 충분히 발휘한 영화였습니다.

궁중은 권력과 암투의 지배를 받는 공간입니다. 그곳에서는 이성적이고 권력욕이 강할수록 유리합니다. 냉철한 이성에 따라 움직이고 권력욕이 강한 사람일수록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의 주인공인 사도 세자는 궁중에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이성 보다는 감정적인 인물이었습니다.

뒤주에서 죽어가면서 사도 세자는 그의 어미인 영빈 이씨가 아버지인 영조에게 아들의 죄를 고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병증이 심해진 사도 세자가 아버지를 죽이기 위해 경희궁으로 쳐들어갔을 때 세손이라도 살려야겠다는 마음에 영빈 이씨는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도 세자 입장에서는 어머니와 아버지 모두에게 버림받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내인 혜경궁 홍씨는 언제나 자신의 가문과 세손이 먼저였습니다. 그런 아내에게 사도 세자가, “자네, 참 무섭고 흉한 사람일세.” 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궁궐 사람들은 모두 흉한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그들은 냉정하고 이기적이었습니다.

영화 <사도>에서 영조는 아들 사도 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였습니다. 7월 삼복더위에 뒤주에 가둔 채 서서히 죽게 만든 것입니다. 뒤주에 갇힌 지 8일째 되는 날 사도 세자는 죽어서 그곳을 나올 수 있었습니다. 비록 아들의 죄가 심각하다고 하더라도 참 잔인하게 죽였습니다. 여러 가지 복잡한 상황을 고려하더라도 굳이 그렇게까지 고통스럽게 죽일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사도 세자에 대한 영조의 미움이 얼마큼 컸는지 이해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아주 많이 미워하지 않고는 그렇게까지 죽이는 경우는 드뭅니다. 사도 세자가 울화증이 있어 내관 등 사람을 여럿 죽이고 또 아버지인 자신에게까지 칼을 들이 댈 정도였다고는 하지만 다른 방법도 분명 있었을 것 같은데, 극한의 고통 속에서 죽도록 했다는 것은 영조의 사도 세자에 대한 미움이 얼마큼 컸는가를 보여주었습니다.

사도 세자는 영조라는 아버지의 희생자가 되기 위해 태어났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에 그는 영조의 귀한 아들이었습니다. 아들 하나를 잃고 40이 넘어 얻은 귀한 아들이었습니다. 영조는 그 기쁨이 얼마나 컸으면 백일도 안 된 아들을 세자로 책봉했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에게 줄 책을 직접 지었습니다. 아들이 훌륭한 군주가 되기를 기대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들 사도 세자는 그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문치주의를 지향하는 자신과 달리 사도 세자는 무술을 좋아했으며 예능에 재능을 보였습니다. 공부를 게을리 하고 그림 그리거나 활쏘기를 좋아했으며 성격 또한 자유분방했습니다. 사도 세자의 이런 모습은 점점 영조의 마음을 거슬렸습니다. 미운 털이 하나 둘 박히기 시작한 것입니다.

신하들에게 빈틈을 주지 않을 만큼 완벽한 왕이고자 했던 영조는 자신의 아들 또한 매사 치밀하고 완벽했으면 했고, 공부를 열심히 해서 신하들을 능가하는 왕이었으면 했으며, 또한 성실한 왕이 되었으면 했습니다. 영조는 사실 이렇게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들 사도 세자는 성실하지 않았으며 공부 보다는 놀기를 좋아했습니다. 기대가 클수록 미움도 커진다고 어느새 기대했던 만큼 영조의 마음에는 미움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이런 미움에는 영조의 특별한 성향도 한몫했습니다.

영조는 트라우마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숙종의 아들이긴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궁중에서는 천민에 해당하는 무수리였기에 그는 출신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었으며, 또 그의 배 다른 형인 경종 독살설에 시달렸습니다. 이런 트라우마 때문인지 그는 사도 세자 못잖게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우선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이 분명했습니다. 좋아하는 사람은 지나치게 좋아했고 싫어하는 사람은 죽어라 미워하는 성격이었습니다. 그 미움의 대상이 불행하게도 아들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스트레스를 사도 세자를 미워하는 것으로써 풀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는 아들을 미워했습니다. 이래도 야단 치고, 저래도 야단치고, 늘 꾸중만 하는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경종 독살설 트라우마를 갖고 있는 영조는 자신이 왕위에 미련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인지 사도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대리청정을 하였는데, 이때도 사도 세자가 일처리를 혼자서 독단적으로 하면 “니가 왕이냐, 건방지다”고 하고, 그래서 이번에는 국정에 대해 자문을 구하면 “그런 것도 혼자서 처리 못하느냐”면서 한심하다고 했습니다. 이래도 마음에 안 들고 저래도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한 번 미워하면 절대로 그 마음을 바꾸지 않는 영조였기에 사도 세자는 계속 미움과 구박을 받고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당했습니다. 결코 반항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왕이라는 절대 권력 앞에서 누가 감히 반항을 하겠습니까? 오롯이 아버지의 미움을 흡수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습니다.

사도 세자는 점점 이상증세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큰 특징이 의대증이었습니다. 아버지 영조는 사도 세자에게 나무랄 게 없으면 ‘대님 똑바로 매라’할 정도로 뭔가 꼬투리를 잡았습니다. 옷을 제대로 갖춰 입는다는 것은 아버지 영조를 만나러 간다는 뜻이었는데 아들은 아버지를 만나는 것이 두려워서 옷을 입지 못하는 병증을 보였습니다. 옷이 계속 마음에 안 든다면서 다른 옷을 가져오게 하고, 더 이상 옷이 없다고 하자 내관을 죽이는 상태까지 이르렀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이 옷을 입지 못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옷을 입지 않으면 아버지를 만나러 가지 않아도 되기에 그런 심리상태를 보였던 것입니다. 그만큼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이 컸습니다.

몇 개월 동안 아버지에게 문안조차 드리지 않았으며 동궁 뒤뜰에 무덤을 파고 거기 관을 만들어 두고는 누워 있곤 했습니다. 이런 행동의 이면에는 죽어 이렇게 누워있고 싶다는 심리가 있습니다. 그 정도로 삶이 고달프다는 뜻이었을 것입니다. 거기서 무당들을 불러 《옥추경》을 읽었습니다. 귀신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사도 세자는 《옥추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왕인 아버지의 절대 권력을 넘어설 수 있는 것은 귀신 정도라고 생각할 정도로 그는 궁지에 몰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옥추경》은 오히려 사도 세자의 광증을 부추겼고, 그는 사람을 죽여 머리를 들고 다니면서 자랑 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사도 세자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어느 모로 보나 아버지인 영조가 원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지극한 기대와 그것에 대한 실망감이 미움으로 변질된 것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사도 세자는 죽으면서 영조에게 “당신이 나한테 한 짓을 생각해보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영화 <사도>는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게 볼 수도 있지만 가장 나쁜 아버지의 예를 보여준 영화였습니다.

영조는 아들을 원한 게 아니라 뛰어난 후계자를 원했던 것이고, 자신의 아들이 거기에 미치지 못하자 어떻게 하면 세자를 버릴까를 궁리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들을 그렇게 잔인하게 죽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영화 <사도>는 역사를 다룬 것이지만 감독이 말한 것처럼 이야기는 가장 비극적인 가족사였습니다. 자식에 대한 지나친 기대는 오히려 미움으로 발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과 자식을 동일시하거나 자식을 소유물화 하는 생각은 비극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는 영화였습니다. 부모의 은혜는 태산보다 깊어서 그 은혜를 헤아릴 수 없다고 하지만 한편으로 부모는 또한 자식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기도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부모와 자식은 전생에 빚쟁이 관계거나 원수가 만날 가능성이 높다고 했습니다. 자식은 끊임없이 받으려고만 하면서도 고마움을 모르고, 부모 또한 자식에게 알게 모르게 상처를 주고 있습니다. 영화 <사도>는 이러한 부모와 자식의 인연을 가장 극단적인 방법으로 보여준 영화였습니다.

김은주 |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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