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위진(魏晋) 시기 음차의 전파

위진(魏晋)·육조(六朝) 1)시기는 중국의 차 생산이 크게 발전한 시기였다. 종차(種茶)와 음차(飮茶)는 이미 남방 각지에서 보편화되었고, 음차의 보급도 점차 화북지역으로 확산되어갔으며, 회하(淮河) 이남의 동남 각지에서도 비로소 산차(山茶)의 기록이 명확하게 출현하게 되었다.

(1) 중국 동남 각 지역의 차나무의 확산과 보편화

《속수신기(續搜神記)》에서는 진나라 무제 때, “선성(宣城)사람인 진정(秦精)이란 자가 무창산(武昌山)2)에 들어가 차를 땄다.”라고 언급하였고, 《형주토지기(荊州土地記)》에는 “무릉(武陵)의 일곱 현에서 모두 차가 나는데, 최고 좋다.” 또 “부릉차가 최고 좋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배연(裴淵)의 《광주기(廣州記)》에는 “유평현(酉平縣)에서는 고로(皐盧)가 나는데, 명(茗)의 별명이다. 잎이 크고 떫으며, 남쪽 사람들은 이를 음료로 삼는다.”라고 했으며, 산겸지(山謙之)의 《오흥기(吳興記)》에는 “오정현(烏程縣) 서쪽에는 온산(溫山)이 있는데, 어천(御荈)이 난다.” 또 “매년 오흥(吳興)과 비릉(毘陵)의 두 군수가 이곳에서 차를 따서 연회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왕부(王浮)의 《신이기(神異記)》에는 “여요(余姚)사람인 우홍(虞洪)이란 자가 입산하여 명을 땄는데, 명(茗)을 크게 얻었도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상의 기록들은 모두 위진·육조 때 이미 차나무가 중국 동남 각 지역에 보편적으로 분포되어 있음은 물론 이미 인간에 의해 발견되고 생활에 이용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2) 위진·육조 시기 동남지역의 음차 활성화와 생활화

그 외에도 여러 고대문헌에는 위진(魏晋)·육조(六朝) 때 동남지역에서 음차활동이 활발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삼국지·오지(吳志)》에는 “손오(孫吳 : 손씨 오나라) 때 대신(大臣) 위요(韋曜)가 주량이 작아서 조정 연회 때마다 오왕 손호(孫皓)가 각별히 배려하여 다른 대신들 몰래 술 대신 차를 내려주었다.”3)고 전하고 있다. 《진서(晋書)》 <환온전(桓溫傳)>에는 “환온은 성정이 검소하여 매 연회 때에는 항상 일곱 쟁반의 다과만을 진설하였을 따름이다.”고 기록하고 있다.

《남제서(南齊書)》에는 남제(南齊)의 무제(武帝)가 임종 전에 유언하기를 “제사 때에 동물을 희생하여 제물로 삼지 말라. 오직 떡과 차음(茶飮), 건반(乾飯), 주포(酒鋪)만을 진설해 올릴 따름이니, 세상에 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이 제도와 같이 하라.”고 기록하고 있다.

(3) 북방의 남방 차 수입과 음차활동의 전개

아울러 같은 시기에 중국의 북방에서도 남방의 차를 대량으로 수입하게 된다. 《낙양가람기(洛陽伽藍記)》에 의하면, 왕숙(王肅)이란 자가 남제(南齊)에서 북위(北魏)로 도망갔는데, 낙양(洛陽)에서 살면서도 양고기와 버터, 밀크 등의 기름진 것들을 먹는데 여전히 습관이 안 되어 매 식사 때마다 항상 붕어탕으로 식사를 하고, 목이 마를 때는 차(명즙, 茗汁)을 마셨다.”한다. 또한 북위의 급사중(給事中)인 유호(劉縞)는 “왕숙의 풍을 사모하여 전문적으로 차(명,茗)를 마시는 법을 배웠다.”고 전한다.

이상의 기록으로 볼 때, 당시 낙양에도 이미 차가 공급되었음을 물론, 북방에서도 이미 음차의 풍속이 형성됨과 동시에 남방에서 생산되는 차가 북방으로 끊임없이 수출되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겠다. 그러나 당시에는 아직 차나무를 인공적으로 재배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고로 이 당시의 동남지역에서는 역시 사람들이 아직은 야생차나무를 채취하여 음료로 삼았다고 보는 것이 보편적 견해라 할 수 있다.

(4) 중국 사천(四川)의 차엽 생산 발전

이와 같은 시기에 중국의 서남지구인 사천(四川)에서는 이미 차엽의 생산이 크게 발전하게 된다. 장집(張輯)의 《광아(廣雅)》에는 “형파(荊巴) 간에 차를 따서 떡을 만들었다.”4)고 하였고, 손초(孫楚)의 《출가(出歌)》에는 “생강과 계피, 차천(茶荈)은 모두 파촉(巴蜀 : 중경과 성도)에서 난다.”5)고 하였으며, 《술이기(述異記)》에는 “파촉의 동쪽에서 진향(眞香)의 명(茗)이 난다.”6)고 하였다. 또한 《동군기(桐君記)》에 “파(巴 : 현 중경)의 동쪽지역에서는 특별한 진향(眞香)의 명(茗)이 난다.”7)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들은 위진·육조시기에 사천 서부지역에서 차가 생산되는 것 외에도 사천 동부지역에서도 차가 왕성하게 생산되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 동남지구에 비해 차의 품질(질량)이 빼어났음을 설명해 주고 있다.

(5) 차죽(茶粥) 점포와 차관(茶館)에서의 음차고객 출현

동시에 음차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사천에서는 또한 “차죽(茶粥)”을 경영하는 점포와 차관(茶館)에 와서 차를 마시는 고객이 출현하게 된다.

진(晋)나라 사람 부함(傅咸)이 쓴 《사노기〔사노교(司奴敎)〕》에 “남방의 촉노파가 차죽을 만들어 파는데, 염사(廉事 : 관직명)가 그 기구들을 부셔버려서 그 후로 또 시장에서 떡을 팔았다고 들었다. 차죽(茶粥)의 판매를 금지시켜 촉(蜀)의 노파를 곤란케 함은 어찌된 일인가?”고 기록하고 있다.

비록 촉(蜀)의 늙은 부녀자가 차죽(茶粥)을 만들어 팔다가 관리에 의해 판매 금지를 당한 일에 불과하지만, 어쨌든 이 기록은 음차(飮茶)가 당시 봉건상층부로부터 일반 하층의 민간 백성들에까지 널리 보편화되었음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 외에도 차(茶)는 사회생활의 바탕을 둔 문학창작의 소재로도 자주 등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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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위진(魏晋) : 삼국시대의 위(魏)나라와 위나라를 이어 사마염이 세운 진(晋 : 서진)나라를 말하며, 육조(六朝)는 남쪽 한족의 정권인 남조(南朝)와 남조 전의 세력인 오나라(삼국시대)와 사마(司馬) 예(睿)의 동진(東晋)을 포함한 것이다.
2) 호북성(湖北省) 악주시(鄂州市) 양자호반(梁子湖畔)의 태화진(太和镇)에 있는 산. 1911년 10월 10일 이 일대에서 무창봉기(武昌蜂起)가 일어났는데 이것이 바로 국민당 손문과 장개석이 주도한 신해혁명(辛亥革命)이다.
3) “密賜茶荈以當酒”
4) “荊巴間採茶作餠”
5) “薑(姜)、桂、茶荈出巴蜀”
6) “巴東有眞香茗”
7) “巴東別有眞香茗”

박영환 | 중국 사천대학 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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