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문언(雲門文偃, 864~949)선사는 출가 후 목주도명(睦州道明)선사에게 참학하여 일시적인 깨달음을 얻었지만, 그 후에 설봉의존(雪峰義存)선사를 만나 최후의 깨달음을 얻고 그 법을 이었다. 운문이 설봉선사에게서 인가를 받는 과정을 《오등회원(五燈會元)》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운문이 설봉의 처소에 도달해 보니 한 스님이 보였다. 그에게 말하기를 “스님은 오늘 설봉화상을 만나 뵐 예정입니까?”하니 스님이 “예.”라고 답했다. 운문이 “그렇다면 설봉선사에게 제 대신 질문을 하나 해주십시오. 단지 다른 사람의 말이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하니 스님이 “알겠습니다.”했다. 운문이 “만약 설봉화상이 법좌에 오르거든 그의 팔을 붙잡고는 ‘이 늙은이의 머리에 씌어있는 철가(鐵枷)를 어째서 벗지 않는가?’ 라고 물으십시오.”라고 했다. 스님은 법당에 올라가 운문이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러나 설봉은 이 말을 듣자마자 스님의 말이 아님을 알고 추궁하였다. 스님은 사실대로 운문이 시킨 것임을 고했다. 그러자 설봉이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은 밑으로 내려가서 오백인의 선지식을 맞이할 준비를 하여라.”했다. 다음날 운문이 도달하니 설봉이 보자마자 곧 말했다. “어째서 이렇게 누추한 곳에 오셨습니까?” 이때부터 설봉과 운문은 서로 계합하였다.

철가(鐵枷)란 ‘쇠로 만든 칼’로서 죄수들의 목에 씌워 움직이지 못하도록 만든 형틀을 말한다. 여기서는 번뇌망상을 가리킨다. 이 문답에서 보면 운문은 설봉을 만나기 전에 이미 일가견을 이루고 있었다. 그래서 설봉과 만나자마자 서로 계합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벽암록》 제54칙에는 다음과 같은 공안이 실려 있다.

어느 날 운문이 승에게 물었다. “근래 어느 곳을 떠나왔는가?” 그러자 승이 “서선(西禪)선사입니다.”하고 답하니 운문이 “서선은 요즘 무슨 말을 하던가?”고 물었다. 그러자 승이 양손을 벌렸다[展兩手]. 운문은 손바닥으로 승을 때렸다. 승이 “저에게는 아직 할 말이 남았습니다.”하니 이번에는 운문이 도리어 양손을 벌렸다[展兩手]. 승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자 운문은 또 때렸다.

‘근래 어느 곳을 떠나왔는가[近離甚處]?’는 선어록에서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말이다. 아마도 새로 입실한 승려에게 과거에 공부한 이력을 묻는 말이라고 생각된다. 승이 서선선사에게서 공부했다고 답하자, 다시 운문은 ‘서선은 요즘 무슨 말을 하던가?’하고 되묻는다. 이는 스승의 말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는지를 테스트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 승이 양손을 벌리는 것[展兩手]은 ‘저는 하나도 빠짐없이 다 말씀드렸습니다. 보십시오. 더 이상 남은 것이 없습니다’는 의미이다. 운문이 불만족하고 때리자, 승은 ‘아직 할 말이 남았습니다’하고 또 다른 대답을 하려고 한다. 그러자 이번에는 운문이 도리어 양손을 벌린다.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는걸!!’. 운문의 완승이라고 볼 수 있다.

▲ 삽화=장영우 화백
 
 운문이 제자들에게 스스로 묻고 답한다
 "무엇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광명인가?"
 "부엌과 삼문, 좋은 일도 없으니 못하다"

《벽암록》 제62칙은 다음과 같다.

운문이 시중하여 말했다. “건곤의 내, 우주의 사이에는 하나의 보배가 있어서 형산에 감추어져 있다[乾坤之內 宇宙之間 中有一寶 秘在形山]. 등롱을 들고 불전으로 향하고, 삼문을 가지고 등롱 위에 놓는다[拈燈籠向佛殿裏, 將三門來燈籠上].”

보배란 불성을 가리키며, 형산(形山)은 육체를 말한다. 즉 인간에게는 모두 불성이 갖추어져 있음을 말한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 구절은 승조(僧肇)의 《보장론(寶藏論)》‘광조공유품(廣照空有品)’에 나오는 ‘천지의 안, 우주의 사이에 하나의 보배가 있어서 형산에 감추어져 있다. 모든 것을 신령스럽게 비추지만 내외에 텅 비어서 적막하여 보기 어렵다. 그것을 일러 현현이라 한다[夫天地之內, 宇宙之間, 中有一寶, 秘在形山. 識物靈照 內外空然, 寂寞難見, 其號玄玄]’라는 구절에서 유래한 것이다. 운문이 《보장론》의 이 구절을 먼저 인용한 후 해석을 붙인 것이다. ‘등롱~’이하가 운문의 해석에 해당되는데, 불성의 작용을 현상적인 이미지로서 구체화한 것이다.
등롱(燈籠)이란 ‘등불을 넣는 용기’로서, 등불에 벌레들이 많이 모여들기 때문에 그것을 막기 위해 종이를 바른 용기 안에 등불을 넣는데 이것을 등롱이라고 한다. 또 삼문(三門)은 절의 산문(山門)으로서, 공(空)·무상(無相)·무작(無作)의 삼해탈문(三解脫門)을 가리킨다. 옛날에는 실제로 3개의 문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등롱을 들고 불전으로 가는 것은 상식적인 행동이지만, 삼문을 그 등롱위에 놓는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불성이란 이와 같이 불가사의한 것임을 나타낸 말이다.
《벽암록》에는 불성에 관한 공안이 또 있다. 그것이 제86칙이다.

운문이 제자들에게 말했다. “사람들에게는 모두 광명이 있지만, 보려고 하면 보이지 않고 깜깜할 뿐이다. 무엇이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광명인가?” 이어서 자신이 대신 대답했다. “부엌과 삼문[廚庫三門].” 또 이어 말했다. “좋은 일도 없는 것만 못하다[好事不如無].”

여기서 광명(光明)은 불성을 가리킨다. 불성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므로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불성[光明]이란 무엇인가?’. 이렇게 제자들에게 질문을 해도 아무도 대답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자기가 대신 대답한다. 이것을 대어(代語)라고 한다. 대어는 제자들이 답을 하지 못할 경우 자신이 대신 대답하는 것인데, 나중에는 설법의 형식이 되었다.
그런데 운문은 불성을 ‘부엌과 삼문[廚庫三門]’이라고 스스로 답하였다. 주고(廚庫)는 부엌을 가리키고, 삼문은 산문이다. 송나라 때의 사찰양식으로는 산문(山門)·불전(佛殿)·법당(法堂)이 중앙에 있고, 주고(廚庫)와 승당(僧堂)이 좌우에 배치되었다. 여기에 욕실(浴室)과 서정(西淨, 변소)을 더하여 칠당가람(七堂伽藍)이라고 한다. 그러면 운문은 왜 하필이면 ‘부엌과 삼문’을 불성이라고 했을까? 부엌과 산문은 승려들이 매일 보는 너무나도 명확한 것이다. 따라서 ‘불성이란 의식적으로 보려고 하면 보이지 않지만, 너희들이 매일 보는 부엌과 산문이 바로 불성에 다름 아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뒤의 ‘좋은 일도 없는 것만 못하다[好事不如無]’는 무슨 의미일까? 그것은 ‘불성이라는 것도 결국은 없는 것만 못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불성은 분명 좋은 것이지만 그것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임제가 말하듯이 ‘무위진인은 무슨 똥막대기인가[無位眞人是什麼乾屎橛]?’에 해당된다. 이것은 앞에서 자신이 말한 ‘부엌과 삼문’을 스스로 부수어 버린 것이다.
마지막으로 운문이 스스로 대어를 내린 공안을 하나 더 살펴보고 본회를 마치고자 한다. 《벽암록》 제6칙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하루는 운문이 말하기를 “십오일 이전에 대해서는 너희들에게 묻지 않겠다. 십오일 이후에 대해서 일구(一句)를 말해보라.”했다. 그리고는 스스로 대신해서 답했다. “하루하루가 좋은 시절이다[日日是好日].”

십오일(十五日)이 무슨 날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주장이 있다. 우선 십오일이전은 하안거 결제일인 4월 15일을 가리키며, 십오일이후는 해제일인 7월 15일을 가리킨다는 주장이 있다. 그렇다면 ‘안거에 들어가기 이전의 경지는 묻지 않겠지만, 안거 후의 경지는 어떠한가?’는 의미가 될 것이다. 한편 대혜종고(大慧宗杲)는 십오일을 부처님의 탄생일인 4월 8일로 해석하고 있다. 그래서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도 ‘어떤 날이 부처님의 탄생일이 아니겠는가?’로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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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대불교학술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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