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복만으로 수행과 성불 이루지 못해
 어느것에도 걸림없는 마음이 곧 자재


본래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알고 마음 속 헛고생이었습니다. 술에 취한 사람이 헛것을 보고 헤매듯 색안경 쓴 친구가 노랗게도 보이고 빨갛게도 보이고 제정신 못 차리듯 저도 이제야 본마음에 되돌아왔답니다. 눈병난 사람에게 허공꽃이 틀림없이 보이고 눈병이 나으니 자취도 없이 사라지듯 곧 그것이었습니다.

때는 가을입니다. 모든 곡식과 나무들이 싹이 트고 꽃을 피우더니 이젠 결실의 열매를 선보이며 스스로 수그러들고 겸허해지고 있습니다. 인간도 나이가 들고 갱년기가 무르익게 되면 자기의 인생에 대하여 한 번쯤 되새겨 보기도 하고 자기 자식들을 제대로 키웠는가 생각도 해보겠지요. 집을 떠나 수행의 길에 들어서서 얻은 것도 없이 세월만 보낸 듯 부끄럽지만 그나마 마음 속 어렵게만 여겨진 불사조(不死鳥)가 갑자기 사라져 텅 빈 허공처럼 빈 가슴 이나마 부처님께 엎드려 공양 올리고 불은(佛恩)에 보답하고자 합니다.

우리의 고정관념은 망상번뇌, 곧 전도된 몽상에서 비롯되는 바 이를 내려놓기는 쉽지가 않습니다. 과거의 경험 속에서 인식 속에 각인(刻印)되어 자리 잡고 있는데요. 지혜의 눈으로 보면 이는 공(空)이지만 무명의 업식(業識)에 종자가 무르익어 환(幻)으로 나타난답니다.

우리 중생놀음이 본심(本心)을 망각하고 자기의 주관적인 고집에 사로잡혀 참모습을 외면하며 괜스레 쓸데없는 고민과 걱정 속에 세월을 허송하나니 이렇기에 불교는 선(禪)을 통하여 본 자리로 되돌아 갈 것을 권고합니다.

누구든 수행정진의 마음을 잃지 않고 계속 나아가다보면 꼭 객진(客塵)의 구름같은 허깨비가 사라지고 견성(見性)의 그날을 맞아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의 있는 그대로를 보는 안목(眼目)을 회복하리라 믿습니다.
본래 한 물건도 없다 함이 선가(禪家)의 지침이거니와 분별심이란 못난 짓입니다. 마치 ‘학의 다리 길고 뱁새 다리 짧더라’, ‘넌 에쿠스를 타고 난 티코를 타니 다른 사람인가?’ 나누는 격입니다.

절은 평등하지만 사회는 우열을 가리나니 불법을 만나 불심(佛心)에 장엄된 참불자라면 적어도 13평 아파트에 살지언정 50평 호화맨션을 부러워하지 않을 수 있는 고운 마음이었으면 합니다. 관세음 보살님이 대학 나온 이를 좋게 보고 초등학교 나왔다고 폄하(貶下)하지 않습니다. 원각(圓覺)의 묘(妙)한 마음 그저 연기요, 공이요, 무아입니다. 이에 반야심경의 큰 법문이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색이 공이며 공이 색이고, 어느 것에도 걸림 없는 마음을 지닌 이가 곧 자재로우신 존재에 해당될 것입니다.

의상대사가 <백화도량 발원문>에서 관세음보살님을 모셨듯이 본인 또한 피안(彼岸)이 문자상의 허구가 아님을 믿고 내 마음을 비워 크게 쓸 수 있는 진실한 불가인으로 거듭나고자 합니다. 마음의 마(魔)는 탐진치(貪嗔癡) 사견(邪見)이라 할 것이니 불보살께서 인증할 수 있는 경계에 들어야 비로소 부처님 법해(法海)에 노닐지라 이는 한맛이겠거니 그날을 기약하고자 합니다. 하사관이 별 달 수 없다 하는데 기복(祈福)만으로 어찌 수행과 성불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우리 불교도 세속적인 복놀음의 소박한 기원과 함께 적어도 머리 깎고 상(相)을 버린 불가수행자만큼은 의식이 하늘의 별이라도 따겠다는 마음을 잃지 않고 평생 올곧게 길을 가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본디 ‘생사가 없다[本無生死]’고 하는데 무생(無生)의 법인(法印)을 얻고자 언제나 자유인 되어 세상의 등대가 되기 위해 늘 쉼 없이 나아가길 서원합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

-소찾는 집 주지



저작권자 © 불교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