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담 스님은 제칠 <무득무설분(無得無說分)>에서 석가여래는 아무 법도 얻은 법이 없고 깨달은 법도 없으며, 49년 동안 설법을 하셨지만 꼭 해야 할 말씀은 하나도 없음을 말한 것이라고 설한다. 이 마음 깨치는 데는 여행하는 것 같은 길이 있는 것도 아니고 8만 4천 가지 방편(方便)이 있지만 그것도 결정된 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제가 알기로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뜻은 결정된 법이 있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라고 이름 한 것이 없사오며, 또한 결정된 법 없는 것을 여래께서 설명해 주셨사옵니다. 왜냐 하오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법은 취할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고 법도 아니고 법 아닌 것도 아니기 때문이옵니다. 그것은 모든 성현께서 함이 없는 법으로 차별이 있기 때문이옵니다.”

깨달음은 설할 수 없는 근본자리

이에 대해 청담 스님은 부처님께서는 당신도 아무것도 얻은 게 없고 누구를 얻도록 해줄 방법도 없고, 또 말할 수 있는 어떤 진리도 없고 45년 동안 단 한 마디도 말한 적이 없다고 잡아떼신다고 설한다. 이는 불법(佛法)은 이 《금강경(金剛經)》에 있는 것이 아니고 글자나 말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개념으로 규정될 성질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한 것이다.

스님은 여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깨달았다고 하고 그것이 무상(無上)의 최고정법이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또 그 정법(正法)은 우주의 어디에도 없는데, 없이 꽉 차 있는 것이 마음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정법이란 사실 그대로를 보는 것을 뜻하며, 사실 그대로를 아무 조건 없는 마음으로 사물이나 사람을 보고 대할 때 이것이 정각(正覺)이라고 설한다.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깨달음이란, 그 어디에서도 구할 수 없고 누구에게서 얻을 수도 없는 근본과 줄 수 없고 받을 수 없는 지혜의 근본 텃밭에서 무득법(無得法)에 자리한 지혜를 부처님도 부처가 될 수 있는 근본 텃밭은 줄 수 없고 받을 수 없는 것이었기에 근본적으로 설할 수 없는 무설의 근본자리를 말한 것이다.

그러나 얻을 수 없고 구할 수 없으며〔無得〕 줄 수조차 없는〔無說〕 깨달음이었건만 다겁(多劫)의 긴 세월 속에 이 땅에 투현한 부처님의 수효는 항하의 모래알보다 더 많다고 했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으로 그 수없이 많은 부처님들이 이 땅에 투현할 수 있었겠는가? 어리석음, 무명(無明)만 다 털어 없애면 남는 것이 바로 자신의 본래면목(本來面目), 누구라도 머무를 수 있는 지혜의 본 자리다. 그 자리에 머물러 밝음이 작용했을 때에 어두움이 자연스럽게 사라지듯 어리석음〔無明〕이 없는 밝은 생각과 그 작용이 살아있는 부처를 이룬다. 언제 어디서나, 그리고 나도 이롭고 남도 함께 이로운 그 자리에 맞는 것이 법이라고 스님은 설하고 있다.

여래께서 설한 법은 취할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고 법도 아니라는 것은, 여래는 법신(法身)으로 있는 것이 아니므로 모양으로 이름으로 말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부처〔覺〕는 여래로 법신(法身)으로 보신(報身)으로 화신(化身)으로 하나이고 인연 따라 나타나므로 여래는 법신으로 가히 말할 수 없고 취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래는 한 말씀도 설함이 없다는 말처럼 집착(執着)으로 보지 말고 번뇌(煩惱)로 보지 말라는 것이다.

본래면목(本來面目)은 이름으로 모양으로 보면 없다는 말은, 집착으로 번뇌로 문자로 언어로 하기 때문에 볼 수 없는 것이다. 법신은 반야(般若)로 말 없는 말로, 집착 없는 말씀으로 부처님께서 45년 동안 하신 말씀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한 것은 법신으로 집착을 타파한 진실한 말이다.

말없는 말로 보인 것이 선(禪)이다. 마음으로,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삼처전심(三處傳心)으로, 부처님 당시 말없는 말로 참 마음을 보였다. 이를 알아챈 제자는 마하가섭으로 전법(傳法)으로 부촉하고 호념했다. 청담 스님은 여래의 법신은 거짓으로 집착으로 번뇌로 말할 수 없고, 취(取)할 수도 없고, 억압(抑壓)으로 시기질투로 원한으로 원망으로 싸움이나 전쟁이 아니므로 가히 취할 수도 없다고 설한다.

법신은 청정이고 참마음으로, 거짓 집착을 인정하면 번뇌가 순간 진실의 진리로 전환하므로 법신은 참으로 가는 지도이고 안내자고 나침판으로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이다. 부처의 본성(本性)은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 그대로이다. 과거의 부정이 현재 긍정으로, 현재의 긍정이 미래의 부정으로 고정인식으로 집착이 아니므로 항상 부처의 불성(佛性), 반야(般若)로 작용함으로 반야를 알면 성품 자리를 볼 수 있다고 설한다.

분별(分別)을 떠나 머무름이 없어야

청담 스님은 제십 <장엄정토분(莊嚴淨土分)>에서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오탁악세(五濁惡世)이니 다섯 가지 욕심을 탐내서 죄만 짓고 서로 살육을 안 하면 안 될 환경을 만들어 사는 세상이라며, 우리는 참으로 남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 마음 한 번만 돌이켜서 정화를 해 놓으면, 그 때는 세계가 달라지고 산천초목까지 달라진다고 설한다. 마음에 머무름이 없어야 함을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그러므로 수보리야, 모든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청정한 마음을 낼 것이니, 마땅히 물질에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내며, 또 소리·향기·맛·부딪침·법에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낼 것이니, 마땅히 머무름 없이 그 마음을 쓸 것이니라.”

청담 스님은 객관적 만유(萬有)의 대상을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의 육경(六境)으로 인식하지 않는 청정한 마음을 내야하고 이 육경(六境)에 대하여 작용하는 인식 작용인 육식(六識) 또한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意) 육근(六根)이 끝없는 예부터 번뇌를 여의고 청정해져서 낱낱의 근(根)이 서로서로 다른 근(根)을 갖춘 것이라고 인식하는 것이다. 이렇게 현상적으로 보이는 것조차도 그 실체는 자성이 없는 연기적 현상에 불과한 것이라고 인식하는 것이 근원적인 본래심(本來心)으로 돌아가 일체의 번뇌망상(煩惱妄想)과 사량분별(思量分別)로부터 떠난 머무름이 없는 자리인 것이다.

스님은 우리 몸의 감각기관인 육근이 그 대상인 육경을 만나 접촉함으로써 좋고 싫은 느낌이 일어난다. 그 좋고 싫다는 느낌의 분별에서 온갖 집착이 생겨난다. 육근이 육경을 접촉할 때 그 사이에서 온갖 시비분별(是非分別)이 생겨나는 것이라고 설한다.

이 세상의 일체 모든 형상과 소리, 냄새, 맛, 감촉, 대상은 모두 무분별, 무차별이다. 우리들의 의식에서 차별을 일으키는 것일 뿐이지 이 세상에는 본래부터 나뉨이란 없다. 일체의 모든 차별과 분별로써 세상의 모든 것들을 나누고 차별하고 점수 매기고 등수를 매기는 따위의 나눔은 오직 인간들만이 한다며 대상에 대한 일체 그 어떤 분별도 다 우리들의 의식이 만들어 내는 거짓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세상은 늘 그 자리에 그대로 있으며 여여(如如)하다. 다만 변화할 뿐 그 어떤 차별도 있지 않다. 본질은 무엇이든 다 부처이며 청정한 것이다. 본질에 있어서는 옳고 그름도, 잘나고 못남도, 미추(美醜)도, 장단(長短)도, 대소(大小)도, 그 어떤 나뉨도 없다고 스님은 강조한다.

청담 스님은 나누게 되면 거기서부터 질긴 집착과 그로 인한 괴로움이 시작된다며 분별할 것이 없으면 집착할 것도 없고 따라서 괴로울 것도 없다고 강조한다. 그렇기에 머무는 바 없는 마음을 내기 위해서는 어떤 대상도 분별하거나 차별하지 말아야 한다. 양 극단(極端)을 설정해 놓고 그 가운데 하나를 택해 대상을 분별하지 말아야 한다. 양 극단은 세상을 올바로 보는〔正見〕 눈이 아니다. 오직 중도(中道)만이 세상을 바로 보게 해 준다는 것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이 둘이 아니다.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낸다는 말이나, 집착을 놓아야 한다는 말이나, 분별을 버려야 한다는 말이 둘이 아니다. 또한 이러한 말이 그대로 중도(中道)의 가르침이며 연기의 가르침이라고 설한다.

집착이 없음이 무심(無心)이며 무아(無我)

청담 스님은 “우리가 ‘응무소주(應無所住) 이생기심(而生其心)’하기 위해서는 일체의 모든 차별과 분별을 놓아야 한다. 머무는 바가 없으면 차별하는 마음이 생겨나지 않는다. 그 어떤 마음도 일어날 것이 없다. 바로 그 때 일체 모든 분별이 타파되며, 그랬을 때 비로소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편견(偏見)없이 바라보는 정견(正見)의 눈이 열린다.”며, “선(禪)에서 말하는 ‘아무것도 주착(住着)하지 않는 상태에 응하여 일어나는 마음’ 즉, ‘무주(無住)’에 대해 제십사 <이상적멸분(離相寂滅分)>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일체 상을 여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킬 것이니, 물질에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내며 마땅히 소리·향기·맛·부딪침·법에 머무르지 말고 마음을 낼 것이며, 마땅히 머무르는 바 없이 마음을 낼 것이니라. 설사 마음에 머무르는 것이 있어도 머무르는 것이 아니니, 그러므로 부처님이 ‘보살은 마음을 물질에 머무르지 말고 보시하라’고 말하느니라.”

청담 스님은 적멸에 들어 적멸을 체득했다는 생각도 없을 때 깨달음을 체득해야겠다는 발심(發心)을 해서 불과(佛果)가 나타나도록까지 용맹정진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색(色)에 머물지 말고, 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에도 머물지 말고, 불법(佛法)이나 구공(九空), 열반(涅槃) 어디에도 마음을 두지 말고 이생기심(而生其心)하라고 설한다.

그러면서 아무 생각 없이 무조건으로 무심(無心)하게 베풀라고 설한다. 그래야 이익이 되고, 나중에는 이 중생이 보리심(菩提心)을 발할 때가 있게 되고, 그러면 그 중생도 또 나를 보고 남과 같이 무심히 받을 수 있다면서, 나한테 밥그릇이나 얻어먹었다고 나를 보면 그만 황공무지해서 고개를 못 들게 해서야 되겠느냐고 경책한다. 청담 스님은 아무런 생각 없이 보시를 하면 똑 떨어진 보시가 된다면서 그야말로 평등하고 청정한 마음으로 깨끗한 보시를 하면 참인간이 생긴다고 설한다.

청담 스님은 집착(執着)에 대해, ‘자아에 대한 집착이 없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어떠한 경계도 없으며 무아이면서 무심의 경지에서 수행하는 것이 제십사 <이상적멸분(離相寂滅分)>에서 말하는 머무름이 없다는 것이라고 설한다. 머무름이 없다는 것은 현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본질에 달관하려는 마음작용을 말한다. 이런 점에서 제십사 <이상적멸분(離相寂滅分)>에서 설하고자 하는 것은 선(禪)과 맥락을 함께한다고 보면서 《금강경》에서 선(禪)사상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곳은 제십팔 <일체동관분(一體同觀分)>이라고 주장한다.

일체(一切)의 현상세계 마음에서 나와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저 세계 가운데 있는 바 모든 중생의 갖가지 마음을 여래가 다 아느니라. 왜 그러냐 하면, 여래가 말한 모든 마음은 다 마음이 아니고 그 이름이 마음이기 때문이니, 그것은 수리보리야, 지나간 마음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청담 스님은 부처님의 자리에서 보면 일체의 현상세계가 모두 마음 하나이므로 마음과 객관을 떼어서 볼 수 없다며, 중생의 마음도 그 근본을 살펴보면 다 부처님의 마음에서 나온 한마음이라고 설한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다섯 가지 신통도 따지고 보면 마음 하나이고, 중생의 온갖 번뇌망상도 과거심(過去心)·현재심(現在心)·미래심(未來心)도 다 한 가지 마음일 뿐이므로 하나로 봐야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과거심불가득(過去心不可得)’은, 아까 내가 무엇을 물었을 때 그것이 지나고 나면 그 다음에는 지나버린 그 생각을 다시는 거두어들일 수 없으니 과거는 현실화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 범부가 생각하면 현재심이 있는 것으로 보는데, ‘현재심불가득(現在心不可得)’은 지금 당장 이 마음을 잡아 쥐어볼 수 없고 챙겨볼 수 없다고 설한다. 스님은 또 ‘미래심불가득(未來心不可得)’은 마음이 나오기 전이니, 예를 들면 유심(有心)의 두 글자를 새기는 경우에 지금 위에 있을 유(有)자를 새기고 있으면 아직 마음 심(心)하는 생각이 없는 것이므로, 미래 마음은 생기지 않는 것이며 그것도 붙잡을 수 없다고 설한다.

당나라 때에 덕산(德山) 선사가 있었다. 《금강경》에 대한 연구가 매우 깊어 이 선사를 부를 때에는 덕산(德山)이라는 이름보다는 주금강(周金剛)이라고 불렸는데 항상 《금강경》에 대한 연구서적과 논문을 등에 짊어지고 다녔다.

그런데 남방에서 용담(龍潭) 스님이 나타나 문자를 부정하고 견성성불을 주장하면서 “마음을 깨달아야 부처가 된다.”고 하는 말을 듣고 “무슨 말이냐? 삼천위의(三千威儀)와 팔만세행(八萬細行)으로 오랫동안 공부를 해야 성불을 할 수 있는 것이지.”하면서 자신이 깨달은 《금강경》의 도리를 가지고 그 스님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주겠다고 생각하고 《금강경》을 등에 지고 길을 떠났다.

풍주(豊州) 고을에 이르러서 점심시간이 되었는데 마침 떡장수 할머니를 만나 떡을 팔라고 하였다. 그랬더니 떡장수 할머니가 “스님, 떡을 파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등에 지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물었다. 스님이 “아, 이것들은 내가 평생을 연구한 《금강경》에 관한 논문과 책들이지요.” 답했다. 그러자 떡장수 할머니가 “그렇다면 제가 《금강경》에 관하여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대답을 해 주시면 떡을 거저 드리고, 대답을 못하시면 저뿐만 아니라 이 고을 어디에서도 떡을 잡수실 수 없습니다.” 하였다. 덕산 선사는 《금강경》이라면 내가 모르는 구절이 없으니 오늘 떡은 공짜로 먹을 수 있겠구나하고 “무엇이든지 물어보라”고 큰소리를 쳤다.

마음은 본래(本來)가 공적(空寂)한 자리

떡장수 할머니가 묻기를 “스님, 《금강경》에 보면 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이라 하였는데, 스님께서 지금 배가 고파서 떡을 잡수시고자 하는 마음은 어느 마음입니까? 마음에 점(點)을 찍어 보십시오.”하고 질문을 하였다.

덕산 선사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대답을 찾았으나 찾지 못하고 결국 그 동네에서는 점심을 먹지 못하고 굶게 되었다. 그 떡장수 할머니는 덕산 선사에게 권하기를 “스님, 《금강경》 연구만 하지 마시고 용담사의 용담 스님을 한번 찾아보시지요.” 하였다. 용담사로 향한 덕산 선사는 “용담에 들어서니 못도, 용도 나타나지 않는구나.” 하며 짐짓 허세를 부린다. 용담 스님이 있는 회상(會上)에 올라가 자기는 《금강경》을 잘 알고 경에 대해서도 아주 잘 안다는 얘길 하니까 용담 스님은 아무 말씀 없이 그냥 듣고만 있었다. 용담 스님의 가르침과 법문을 듣고 방문을 나서자 깜깜한 밤중이 되었다. 신발을 찾아 신으려 하나 어두워 찾을 수가 없었다. 그때 용담 스님이 시자(侍者)를 시켜 불을 밝혀 주었다. 신발을 신고 댓돌을 내려오려는 순간 용담 스님이 불을 확 불어 꺼버렸다. 덕산 선사는 그 순간 큰 깨달음을 얻고 애지중지하던 《금강경》에 관한 서적들을 법당 앞에 쌓아놓고 불을 지른 뒤에 말하기를 “천하의 온갖 지식과 재주를 다 가졌다고 할지라도 하나의 터럭을 큰 허공에 던지는 것과 같고, 이 세상의 모든 일을 다 안다고 할지라도 물 한 방울을 큰 구렁에 떨구는 것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은 선(禪)의 세계, 마음의 깨달음 세계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실례(實例)라고 하겠다. 청담 스님은 이 말의 메시지는 과거·현재·미래의 마음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분별하지 말고 집착하지 말라는 것으로, 분별과 집착을 떠난 상태인 무상(無相)·무념(無念)·무주(無住)의 상태를 말한 것이라고 설한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번 마음이란 말을 되뇌며 생활하고 있지만 정작 마음은 찾을 수도 없고 내보일 수도 없다. 우리의 마음자리는 고상하고 귀한 것이어서, 찾을 수 없는 게 아니라 본래(本來)가 공적(空寂)한 자리이기 때문에 찾을 수도 없고 내놓을 수도 없다. 이 마음자리는 너와 나도 없으며, 남녀노소(男女老少)도 없으며, 승속(僧俗)까지도 다 벗어난 자리이다.

청담 스님은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의 구분을 만들어 지나간 마음이니, 현재의 마음이니, 미래의 마음이니 하는 분별로는 더욱 마음을 잡을 수 없는 것이다. 과거는 이미 지나가 버렸으니 과거의 마음을 잡기란 불가능하다. 현재라고 인식하는 그 순간 바로 과거의 마음으로 흘러가 버리므로 현재의 마음도 잡기란 불가능하다. 또 미래의 마음이란 아직 오지 않았으나 자기의 마음이라 할 수 없는 것”이라고 설한다.

불교는 결국 마음자리를 탐구(探究)하는 깨달음의 세계이다. 깨달음의 세계라 해서 없던 것이 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함을 알아야 한다. 마음 밖에서 아무 것도 찾을 수 없고 있을 수도 없는 도리가 바로 불교의 마음자리, 선(禪)에서 말하는 깨달음의 이치이다.

부처의 마음, 혹은 진리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마음이라는 것은 과거나 현재, 미래의 구분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온 우주가 하나인 것처럼 허공(虛空)과 같이 열려져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과거나 현재, 혹은 미래로 구분 짓는 것은 중생의 집착과 분별심에서 비롯되는 것일 뿐, 진리의 입장에서 보면 절대로 구별되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방남수 | 불교문예학 박사, 평택 청담고등학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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