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를 처음 인공재배한 보혜 선사를 모신 몽산 감로사 다신전.

2. 수대(隋代) 이전의 사천 차업(茶業)

1) 파촉(巴蜀) 시기의 차사(茶事) 활동

‘차(茶)’ 자의 유래와 변천 과정은 고대인들의 차를 마시고, 차를 심고 재배했던 기간이 매우 장구했음을 반영한다. 아울러 이러한 오랜 변천 과정은 중국의 여러 각지에서 동시에 시작되었거나 또한 동시에 진행된 것이 아니다.

중국의 고대 문헌 중에서 ‘중국 최초의 종차와 음차지역’에 관해 가장 명확하게 기록된 것을 보면 사천지역의 동부인 파국〔巴國 : 지금의 중경(重慶)시 일대〕 경내(境內)로 나타난다.

파족(巴族 : 파나라 사람)은 주(周)나라 때 이미 차(茶)를 중요한 진귀작물(珍貴作物)로 여겼으며, 아울러 차는 파국(巴國)이 주(周)왕조에 바치는 중요한 대표적 공물(貢物)이었다.

진(晋)나라 사람 상거(常璩)가 지은 《화양국지(華陽國志)》 <파지(巴志)>에 의하면,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 주왕(紂王)을 정벌할 때, 실제로 파촉의 군대를 얻었다.”고 기록돼 있으며, 또한 “파나라 군대가 주나라의 은나라 정벌에 참가하여 선봉에 서서 용맹을 떨치며, 가무(歌舞)로써 은나라 사람들을 능멸하는 등 은나라 주왕의 군대를 압박하여, 주(周)나라의 무왕(武王)이 은상(殷商) 정권을 전복시키는 데 혁혁한 공로를 세웠다.”고 하였다. 그 후 주나라 왕실이 정식으로 수립되자 그 공로를 인정하여 정식으로 파족을 제후국으로 책봉하고 작위를 주었으며, 파족의 수령을 ‘파자(巴子)’라 칭하였다.

파족(巴族)이 파자국(巴子國)으로 책봉된 이후, 파국은 주나라 왕실에 정기적으로 여러 가지 특산물(뽕, 누에, 마, 비단, 생선, 소금, 구리, 철, 옻, 주사, 차, 굴, 거북이, 소뿔, 거위 등등)을 공물로 바쳤는데, 차도 그중에 하나였다.

아울러 파국(巴國) 경내에는 “뜰에 방약(芳蒻 : 향기로운 부들싹)과 향명(香茗)이 있다.”고 하였는데 방약은 사천사람들이 말하는 마우(磨芋 : 토란 같은 것)이고, 향명(香茗)은 곧 찻잎을 말한다. 이 기록은 파국(巴國) 경내의 차나무가 이미 야생(野生)에서 인공으로 종식(種植)하고 재배되는 작물로 변화ㆍ발전되었음을 의미한다. 아울러 찻잎의 생산이 이미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음을 의미함과 동시에 인류가 자연으로부터 찻잎을 채취하여 본격적으로 생활에 이용하였음을 입증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당시 차나무의 인공재배 수준은 여전히 초기 단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또한 차가 아직은 광범위하게 보급·확산되지는 않아서 사람들은 여전히 야생 찻잎을 주로 식용하였다. (왕상귀족과 평민·서민 간의 생활의 차이를 엿볼 수 있음)

선진(先秦) 시기에는 사천 동부 파족〔巴族 : 중경(重慶)〕 지역에서 차가 생산되는 것 외에도, 사천 서부 지역인 촉국〔蜀國 : 성도(成都)〕 경내에서도 차가 생산되었다.

명나라 양신(楊慎)이 찬술한 《군국외이고(郡國外夷考)》에는 “《한지(漢志)》에서 이르기를 ‘가맹(葭萌)은 촉군(蜀郡)의 이름’이다. 가(葭) 음은 망(芒)이며, 방언이다. 촉인(蜀人)들은 차(茶)를 일러 ‘가맹(葭萌)’이라 하며, 대략 차씨(茶氏)의 군(郡)이라는 뜻이다.”라고 기록돼 있다.

‘가맹(葭萌)’은 현재 광원시(廣元市) 경내에 있으며, 고대 촉국의 성읍 중 하나였다. 진(秦)나라가 촉(蜀)을 멸하고 가맹(葭萌)현을 두었으며, 당나라 때 이곳에서는 여전히 차의 생산이 왕성했다. 가맹(葭萌)이 차로 명명(命名)되었다는 것은 전국(戰國)시대 이전에 이 지역에서 이미 분명히 차가 생산되었음을 설명하는 것이다.

문헌에 의하면 파촉(巴蜀) 외 기타 지역에서도 음차활동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예를 들면 《화양국지》보다 훨씬 이른 시기의 문헌인 《주례》 <장도(掌荼)> 조와《안자춘추(晏子春秋)》에 차에 관한 기록이 보인다.《안자춘추》에는 제나라 재상 안영(晏嬰)에 관한 기록이 있는데, “안영이 제나라 경공의 재상으로 있을 때 궂은 쌀밥과 세 마리의 새 구이, 다섯 개의 알, 차, 뺑쑥을 먹었을 뿐이다.”고 하였다.

이것은 바로 서주와 춘추시대에 북방에서도 이미 차를 마실 줄 알았다는 증거이다. 즉 춘추시대의 제나라는 현재의 산동성 일대이며, 비록 왕상귀족이긴 해도 이는 분명히 북방지역에서도 차를 마셨다는 것을 입증하는 기록이다.

그러나 중국의 고대 어느 문헌에도 북방에서 차가 생산되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북방은 지리적 환경이 차나무가 생장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그들이 마신 차엽은 사천에서 공납되었거나, 혹은 상업무역을 통해 유입되어 들어간 것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고로 선진(先秦) 시기에 북방에서는 차가 생산되지 않았으며, 오직 유일하게 사천에서만 차가 생산되었다는 게 비교적 학계에서 공인된 사실이다.

2) 양한(兩漢) 시기 사천의 차엽 생산

진(秦)나라가 파촉을 멸망시키고 사천을 통일하면서 사천의 경제와 문화는 신속하게 발전하였으며 사천과 중원지역의 왕래는 한층 더 활발하게 강화되었다. 고대 문헌에는 양한(兩漢) 시기의 사천(四川) 차사(茶事) 활동에 관한 기록이 선진 시기보다 훨씬 더 많다.

고대의 여러 문헌을 종합하면 양한(兩漢) 시기 사천 차엽(茶葉) 생산의 특징은 세 가지 정도로 요약 정리해 볼 수 있다.

(1) 차 생산 지역의 증대

사마상여의 《범장편(凡將篇)》에는 “서한 전기에 촉군에는 차가 있다.”라고 기록돼 있고, 양웅(楊雄)의 《방언(方言)》에는 “촉서남인들은 차를 일러 ‘설’이라 한다.”고 하였는데, 이는 촉(蜀)지역에서 이미 차가 생산되고 있음을 설명해 주고 있다.

《화양국지(華陽國志)》에 의하면 “한나라 때 광한(廣漢)군 십방(什邡)현 일대 산에서는 좋은 차가 나온다.”고 하였고, <건위군(健爲郡)> 조에는 “한(漢)에는 염정(鹽井)이 있고, 남안(南安), 무양(武陽)에서는 모두 명차가 난다.”고 하였다. “천(川)ㆍ전(滇)ㆍ검(黔) 주변 지역인 평이군(平夷郡) 일대에서는 산에 차와 꿀이 난다. 이외에도 명산(名山)현의 몽정산(蒙頂山)도 역시 차엽의 생산이 풍부한 곳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2) 사천(四川)의 차엽(茶葉)시장의 존재

문헌에 의하면, 한(漢)나라 때 사천에는 이미 차엽시장이 존재하였다. 이곳에서 찻잎은 이미 시장의 유통 상품이 되어 있었다. 서한(西漢) 선제(宣帝) 때 촉군 사람인 왕포(王褒)가 쓴 《동약(童約)》에 보면, 촉군 자중(資中)현 사람인 왕자연(王子淵)이란 사람이 동노(僮奴)의 임무를 조목조목 규정하여 써 놓았는데, 노비의 임무 중 하나가 바로 다기를 씻고 정리하여 수납하며, 무양에 가서 차를 사오는 일〔烹荼盡具……, 武陽買荼〕이었다.

무양은 현재 도교의 시조인 팽조(彭朝)의 무덤이 있는 팽산(彭山)현이며, 자중(資中)에서 무양(武陽)까지 차를 사러 올 정도면, 그곳에는 분명히 번성된 차엽 시장이 있었을 것이다. 이곳은 필자가 2000년 사천대 유학시절 직접 답사한 적이 있었다. 지금은 시장의 직접적인 흔적을 찾을 길은 없으나, 그래도 당시 시장의 흔적을 짐작케 하는 몇 가지 흔적들은 찾아 볼 수 있었다. 그 인근 지역인 인수현(人壽縣)에 ‘인수사(仁壽寺)’라는 절이 있는데, 답사 당시 절의 문이 잠기어서 들어가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절 마당 한 가운데 비석이 하나 있는데, 문틈 사이로 보이는 비석에는 “이곳은 차의 집산지이다.”라는 문귀가 새겨져 있었다. 기록이나 유물의 흔적으로 보아 이곳은 분명 아주 오래 전부터 차의 최대 집산지(集散地)였음을 알 수가 있었다.

(3) 사관(寺觀) 승도(僧道)의 종차(種茶)와 차나무의 재배

한대(漢代)의 사찰(寺刹)과 도관(道觀)에서는 승려와 도사들도 이미 차나무를 심고 찻잎을 식용으로 이용하였다.

《사천통지(四川通志)》권 40에 의하면, 한(漢)나라 때 명산(名山)현 서쪽 15리에 떨어져 있는 몽산(蒙山) 감로사(甘露寺)의 조사(祖師)인 보혜 선사(普慧 禪師) 오리진(吳理眞)이 차를 심고 재배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은 차를 인공 재배했다는 최초의 기록이다.

주) -----
1) 졸고 ‘차자소고(茶字小考)’. 계간 <다담(茶談)> 2002년 가을호 참고 바람.
2) “園有芳蒻ㆍ香茗”
3) 당대(唐代) 육우의 《다경(茶經)》에는 야생 찻잎을 최상의 질(質)로 치고 있다.
4) 《안자춘추》“嬰相齊景公時, 食粟之飯, 灸三弋五卵茗萊而已”
5) 또는 ‘몽정산(蒙頂山)’이라고 한다. 현지의 학자들에 의하면, 몽산과 몽정산은 크게는 같은 산이나, 세부적으로 보면 몽정산과 몽산은 달리 구분, 분류된다. 그러나 일반인들에게 있어 몽정산, 몽산은 같은 산명(山名)으로 간주되고 있다.
6) 후한 말(A.D. 200년 경) 운남성 망경(芒景)에서 포랑족(布朗族)의 시조이며 족장이었던 ‘아이링(哎冷)’이 보이차(普洱茶)를 최초로 인공 재배했다는 기록보다 무려 180년~200여년 앞선 기록이다.

박영환 | 중국 사천대학 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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