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허 스님이 해인사 조실로 있을 때였습니다. 폭설이 내린 어느 날 마을에 내려갔다가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눈 속에서 죽어가는 한 여인을 발견했습니다. 스님은 그 여인을 자신이 머물던 해인사 퇴설당으로 데려와 함께 살았습니다.

스승에 대한 존경과 신뢰가 깊은 제자였지만 스승의 행동은 이해하기 곤란했습니다. 여자를 조실실로 데려와 함께 산다는 것을 상식적인 차원에서는 용납하기 어려웠던 것입니다. 다른 대중이 이 사실을 알았다가는 스승의 명예가 크게 실추될 상황이었으므로 제자는 스승에게 간곡하게 부탁했습니다. 제발 여인을 내보내라고.

그러나 스승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고, 퇴설당에 여자가 있는 것 같다는 소문을 듣고 대중은 조실실로 몰려가려 하고, 제자인 만공 스님만 애가 탔습니다. 무애행(無礙行)을 실천하는 스승이지만 지금의 상황은 보통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제자는 스승의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제자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눈과 코가 없을 정도로 얼굴이 문드러지고 냄새가 고약한 여인이 거기 있었습니다. 여자는 문둥병을 앓는 여인이었던 것입니다.

전후 상황을 이해한 제자 만공은 절망감을 느꼈다고 합니다. 자신이라면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병이 옮을 지도 모르는 그런 여인과 방을 함께 쓰는 것도 그렇고, 대중의 의심을 살만한 행동을 하면서도 이렇게 초연할 수 있는 것도 불가능하게 여겨졌던 것입니다. 만공 스님의 이 마음이 대부분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경허 스님이 더욱 특별한 것입니다.

경허 스님의 위 일화에서 가장 감동적인 부분은 순수한 자비심입니다. 이렇게 순수한 자비심은 다른 것을 고려할 여지를 남기지 않을 정도로 강했습니다. 해인사 조실의 명예, 문둥병에 대한 두려움, 더러움에 대한 혐오 등 일체의 잡다한 감정이 자리 잡을 수 없을 만큼 힘이 셌습니다. 이러한 경지의 자비심은 ‘나’라고 하는 작은 마음을 부셔버리게 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아무나 흉내 낼 수 있는 자비심이 아니었습니다.

이번 영화 <하루>(2015)는 자비심에 관한 영화입니다. 이란영화 <하루>의 주인공 유네스가 하루 동안 겪은 이야기는 경허 스님의 일화와 많이 닮았습니다. 절박해 보이는 여인을 도와준다는 것도 그렇고, 그 여인을 도와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오해를 산다는 이야기 구조도 닮았으며, 한 사람의 넘치는 자비심이 주는 감동도 비슷했습니다.

올해 전주국제영화제 출품작이자 칸영화제 출품작으로 올해 가장 주목받은 영화인 <하루>는 이란영화의 전통을 따르고 있습니다. 다큐멘터리 형식의 담백한 화법과 오늘의 이란사회에 대한 비판, 그러면서 종교국가답게 인간성 회복에 대한 염원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레자 미르카리미 감독의 <하루>는 이타심 많은 한 남자의 특별하고 아름다운 하루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자동차만 넘쳐나는 삭막한 도시에서 진정한 이타심을 가진 한 택시운전사를 통해서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이타심이 얼마큼 세상을 윤택하고 아름답게 만들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네스(파르비즈 파라스투이)는 이란의 수도 테헤란의 택시 운전사입니다. 작고 낡은 택시는 그의 직장입니다. 그는 그곳에서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고, 식사도 택시에 앉아서 했습니다. 개인택시도 아니고 회사에 고용된 택시 기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돈입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돈이 결여됐기 때문입니다. 결여를 채우려고 하는 마음은 당연한 것입니다. 다른 나라를 여행할 때 택시기사에게 바가지 쓰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택시 기사는 돈에 유혹당하기 쉬운 직업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유네스는 이런 편견에서 벗어난 인물입니다. 그는 탑승한 손님을 가는 방향이 다르다면서 내리게 하고, 다른 기사를 대신해 공장에서 퇴근하는 노동자들을 태울 때도 그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돈을 삶의 중심에 두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비록 낡은 택시를 운전해서 근근이 살아가고, 한쪽 다리를 절고, 가끔 통증이 있는지 알약을 먹고, 거기다 나이도 많지만, 그에게는 돈 보다 중요한 것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유네스가 대부분 사람과 다른 점입니다. 물질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돈을 삶의 중심에 두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자비심을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겉으로 봤을 때 매우 불친절한 사람입니다.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에 말은 거의 없습니다. 영화 주인공이지만 대사가 별로 없을 정도로 그는 말이 없습니다. 침묵이 그의 언어입니다. 유네스는 이런 모습으로 살아왔습니다. 이 날도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하루가 지나가는 것 같았습니다. 일을 끝내고 늦은 점심을 먹고 있는데 한 여자가 정말 갑작스럽게 택시에 탔습니다. 여자의 모습은 누군가에 쫓기는 것도 같고 불안하게도 보이고 상황이 심상치 않았습니다. 하루 일과를 끝냈기에 다른 때 같으면 유네스는 여자에게 내리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유네스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딱 봐도 여자의 상황이 절박하게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택시가 출발하고 항상 그랬던 것처럼 유네스가 문을 잠그자 여자는 화들짝 놀라면서 문을 잠그지 말아 달라고 하고, 과속방지턱에 걸려 차가 덜컥 하자 과도하게 놀랐습니다. 그러면서 여자는 자신이 갈 병원 이름도 정확하게 모르고 뭔가 좀 이상하게 보였습니다. 여자 주인공 세디게(소헤일라 골라스타니)는 몸도 마음도 많이 힘들어 보이는 임산부였습니다. 겉으로는 무뚝뚝하지만 자비심 많은 유네스는 자비심에 한해서만은 그 어떤 사람보다도 감이 발달했기 때문에 불쌍한 여자 세디게의 딱한 상황을 바로 알아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요구를 다 들어주었고, 그녀가 원하는 병원도 인내심을 갖고 찾아주었습니다.

일반적으로 택시 기사의 역할은 승객을 목적지까지 태워다주는 것이 전부입니다. 세디게는 좋은 승객은 아니었습니다. 목적지를 정확히 몰랐기 때문에 헤매게 했으며, 또 유네스는 일과를 마친 시간이었기에 유네스 입장에서는 이래저래 세디게에게 많은 걸 양보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세디게는 오늘 처음 만난 택시 운전사에게 어려운 부탁을 했습니다. 자신과 함께 병원에 들어가고, 가족인 척 해달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란사회는 혼외임신을 법적으로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여자 혼자서 병원에 가서 아기 낳는 일은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디게는 금방이라도 아이가 나올 상황이었으므로 어떻게든 병원으로 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유네스에게 동행을 부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감독은 세디게가 도대체 어떻게 살아왔고, 또 지금은 어떤 상황인지 전혀 설명해주지 않았습니다. 금방이라도 아이를 낳을 것 같지만 병원에는 갈 수 없는 현재 모습을 보여줄 뿐이었습니다. 이런 불친절한 설정은 결국 세디게라는 여인의 딱한 사정 같은 건 영화에서 큰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유네스가 보여주는 자비심을 표현하려는 게 영화의 목적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황당한 요구를 받고 흔쾌히 허락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유네스는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다른 사람하고는 다른 사람입니다. 그는 세디게에게 가족은 왜 없느냐, 왜 혼자서 아이를 낳으러 왔느냐 등 어떤 질문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세디게가 원하는 대로 그녀와 함께 병원으로 들어갈 뿐이었습니다. 아기를 낳으러 가는 여자의 보호자로 병원에 함께 간다는 것은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를 가져올 수 있는 상황이므로 자신에게 어떤 불똥이 떨어질 것인가, 그런 걸 재보는 게 일반적인데 자비심 많은 유네스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를 도와줄 때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자신이 치러야 할 희생입니다. 이 희생 때문에 대부분 사람은 남을 도와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쉽게 남을 잘 도와주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따라올 희생 같은 것은 미리 계산하지 않습니다. 유네스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유네스가 치러야 할 희생은 오해였습니다. 세디게의 보호자로 함께 병원에 갔기 때문에 병원 사람들은 유네스를 세디게의 늙은 남편쯤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세디게의 상황이 좋지 않았습니다. 누군가에게 폭행을 당했는지 갈비뼈가 부러져 있고 태반도 분리돼 아기도 산모도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녀의 상황을 지켜본 대부분 사람들은 그 가해자로 유네스를 의심했습니다. 약하고 젊은 아내를 무자비하게 폭행하는 그런 남자로 유네스를 차갑게 바라봤습니다.

접수를 도와주던 간호사는 갑자기 싸늘해졌고, 수간호사는 “당신 같은 남자들에겐 천국이죠.”라는 이상한 말로 비아냥거리고, 경비 아저씨조차 그가 텔레비전을 시청하고 있을 때 처음에는 소리를 약하게 하더니 아예 텔레비전을 꺼버렸습니다. 아내를 폭행한 남자에 대한 비난을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것이었습니다.

밖에서 택시를 닦고 있는데 의사가 다가오더니 “차를 아끼는 것처럼 부인을 아껴주라”는 말을 하고, 병원의 다른 직원은 유네스에게 주먹질까지 했습니다. 유네스의 친절은 이런 오해로 그에게 돌아왔습니다. 그렇지만 유네스는 사람들의 이런 냉대와 멸시에 침묵으로 대응했습니다. 유네스가 사람들이 오해하도록 내버려 두는 이유는 세디게를 위해서였습니다. 세디게가 자신의 목숨을 포기하면서까지 지키려 하는 아이를 그 또한 지켜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유네스의 희생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세디게는 아기를 낳고 바로 죽는데 죽기 전 유네스를 만나고 싶어 했습니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자신의 살아온 과정을 이야기 하면서 자신은 그 누구의 축복도 받지 못한 채 태어났는데 자신의 아기 또한 그런 운명에 놓여 있다고 한탄했습니다. 자신이 죽고 나면 아기는 고아원에서 자라게 되고, 자신의 운명처럼 그런 전철을 밟게 될 걸 암시하는 말이었습니다.

자비심 많은 유네스가 이 모녀의 상황을 그냥 지켜만 보고 있을 리 없었습니다. 유네스는 세디게가 아기를 낳고 죽자 새벽에 아기를 훔쳐서 병원을 나왔습니다. 아기를 엄마 세디게와 같은 삶에서 구해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부모도 없이 세상에 외롭게 던져질 아기의 운명을 걱정해서 그는 아기에게 삶의 울타리가 돼 주기 위해 아기를 안고 택시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영화는 흰색 천들이 휘날리는 가운데 숨겨져 있던 유네스의 노란 택시를 보여주면서 막을 내렸습니다.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아름다운 자비심을 표현한 장면이었습니다.

경허 스님은 문둥병 여인을 구해주고 고질적인 피부병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유네스는 한 아이를 책임지게 됐습니다. 늙고 가난한 유네스가 아기를 키우기 위해서는 많은 어려움이 따를 것입니다. 어쨌든 누군가를 도와주는 것은 내 것을 나누는 것이고, 희생을 강요당하는 것입니다. 그 희생을 감수하면서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것은 자비심 때문이고, 자비심은 인간의 가장 숭고한 모습인 것입니다. 이란 영화 <하루>는 희생과 자비심의 아름다운 모습을 통해 정신의 정화를 가능하게 했던 영화였습니다.

김은주 | 자유기고가

저작권자 © 불교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