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철학은 플라톤의 각주
영국의 철학자 화이트헤드는 “유럽의 철학 전통은 플라톤에 대한 일련의 각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였다. 이 말이 플라톤 철학에 대한 긍정에서 나온 것이든 부정에서 나온 것이든, 플라톤을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서양을 알기 어렵다는 의미임에 틀림없다. 플라톤 철학이야말로 서양의 사상과 문화의 근저에 있고, 그 위에 서양의 법과 제도가 발달하여 왔다고 할 때, 플라톤 철학을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현재의 나를 이해하는 근본 중의 하나라고 하여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오랜만에 다시 펼친 플라톤. 쉬운 듯하면서도 어렵고, 젊어서 읽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에 젖게 한다. 이 글에서는 플라톤의 《국가》에 나오는 유명한 동굴 속 죄수의 비유를 따라가며 떠오르는 감흥과 생각을 적어볼까 한다.
【1】
“그러면 다음으로 교육 및 교육 부족과 관련된 우리의 성향을 이런 처지에다 비유해 보게나. 이를테면, 동굴 모양을 한 거처에서, 즉 불빛 쪽으로 향해서 길게 난 입구를 전체 동굴의 너비만큼이나 넓게 가진 그런 동굴에서 어릴 적부터 사지와 목을 결박당한 상태로 있는 사람들을 상상해 보게. 그래서 이들은 이곳에 머물러 있으면서 앞만 보도록 되어 있고, 포박 때문에 머리를 돌릴 수도 없다네. 이들의 뒤쪽으로 멀리에서 불빛이 타오르고 있네. 또한 이 불과 죄수들 사이에는 위쪽으로 [가로로] 길이 하나 나 있는데, 이 길을 따라 담(흉장)이 세워져 있는 걸 상상해 보게. 흡사 인형극을 공연하는 사람들의 경우에 사람들 앞에 야트막한 휘장(칸막이)이 쳐져 있어서, 이 휘장 위로 인형들을 보여주듯 말일세.”
내가 말했네.
“상상해 보고 있습니다.”
그가 말했네.
“더 나아가 또한 상상해 보게나. 이 담(흉장)을 따라 이 사람들이 온갖 인공의 물품들을, 그리고 돌이나 나무 또는 그 밖의 온갖 것을 재료로 하여 만들어진 인물상들 및 동물상들을 이 위로 쳐들고 지나가는 걸 말일세. 또한 이것들을 쳐들고 지나가는 사람들 중에서 어떤 이들은 소리를 내나, 어떤 이들은 잠자코 있을 수도 있네.”
“이상한 비유와 이상한 죄수들을 말씀하시는군요.” 그가 말했네.
그래서 내가 말했네. “우리와 같은 사람들일세. 글쎄, 우선 이런 사람들이 불로 인해서 자기들의 맞은 편 동굴 벽면에 투영되는 그림자들 이외에 자기들 자신이나 서로의 어떤 것인들 본 일이 있을 것으로 자네는 생각하는가?”
……
“이런 사람들이 인공적인 제작물의 그림자 이외의 다른 것을 진짜라고 생각하는 일은 전혀 없을 걸세.” 내가 말했네.1)
어쩌면 우리는 동굴 속에 태어나 결박당한 채 오직 보여주는 것만 보며 살아가는 존재인지 모른다. 내가 만약 일본인으로 태어났다면 독도에 대해 지금처럼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이 땅에 한국인으로 태어나 한국인으로 교육받으며 성장했기에 일본사람과는 다르게 생각한다. 그러니 나라고 해서 동굴의 죄수와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누구라도 태어나면서 처한 실존적 상황에 예속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다.
사실 플라톤이 말하고자 하는 이 죄수의 비유는 특정 체제 속에 태어나 그 체제에 맞는 교육을 강요당하는 상황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 보다는 훨씬 근원적인 한계,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비유이다.
인간은 감각기관을 통해 사물을 인식한다. 눈·코·귀·입(혀)·몸(피부)은 불교에서 오근(五根)이라 하고, 도가에서는 칠규(七竅)라고 한다. 전자는 인식의 뿌리라는 의미이고 후자는 사물과 소통하는 통로라는 뜻이다. 인간은 이 구멍을 통하여 사물을 인식하고 세계를 만난다.
그런데 이 구멍은 사물과 세계를 똑바로 알려주지 못한다. 그게 구멍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잘못되든, 아니며 뿌리가 본래부터 잘못된 것이든, 사물은 구멍을 통과하며 왜곡되거나 변형된다. 당연히 인간의 의식에는 잘못된 세계가 그려진다. 이런 오류는 감각의 태생적 한계에서 비롯된다. 감각을 통한 세계인식―이를 철학에서 감각적 경험이라고 한다―은 주관성과 개별적 특수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런 인식의 문제를 먼저 적시코자 플라톤은 동굴 죄수의 비유를 든 것이었다. 플라톤에 의한다면 감각기관을 통한 인식은 개인적 의견(意見, doxa)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참된 인식(認識, episteme)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감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동굴 속 죄수가 사슬을 풀고 밖으로 나와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감성적 한계의 문제는 동양에 오면 다른 색깔을 띤다. 《장자(莊子)》에는 감각기관을 뚫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플라톤과는 느낌이 다르다.
남해의 왕 숙(儵)과 북해의 왕 홀(忽)이 중앙의 왕 혼돈(混沌)의 땅에서 만나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숙과 홀이 혼돈의 호의에 보답할 방법을 상의하다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사람들은 모두 일곱 개의 구멍이 있어 보고 듣고 먹고 숨을 쉬는데, 이 혼돈은 없으니 구멍을 뚫어주자.” 그리고 하루에 하나씩 구멍을 뚫어 주었는데, 칠 일째 되는 날 마침내 마지막 구멍이 뚫리자 혼돈이 그만 죽어 버렸다는 것이다.
장자의 이 우화는 본원적 생명에 관한 이야기이다. 우리가 감각기관을 따라 아름다운 색, 듣기 좋은 소리, 맛난 음식을 좇기 시작하면 본래 갖고 있는 생명력을 상실하고 만다는 이야기이다.
플라톤과 장자의 주안점이 어디에 있든, 두 사람이 공통으로 하는 말은 ‘감각은 믿을 수도 없고 의지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두 사람의 말이 아니더라도 감각은 실로 엉터리이다. 뱀을 밟은 줄 알고 놀라 시름시름 앓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뱀이 아니라 새끼줄이었다는 류의 이야기는 매우 많다. 플라톤은 이처럼 감각기관을 통해 보이는 세계, 즉 가시계(可視界), 혹은 현상계(現象界)는 거짓이며,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2】
“그러면 생각해 보게. 만약에 이들에게 다음과 같은 식으로 사태가 자연스레 진행된다면, 이들이 결박에서 풀려나고 어리석음에서 치유되는 것이 어떤 것이겠는지 말일세. 가령 이들 중에서 누군가가 풀려나서는, …… 이제는 진짜(실재; to on)에 좀 더 가까이 와 있고 또한 한결 더한 실상을 향하여 있어서, 더욱 옳게 보게 되었다고 한다면, …… 만약에 누군가가 그를 이곳으로부터 험하고 가파른 오르막길을 통해 억지로 끌고 간다면, 그래서 그를 햇빛 속으로 끌어내 ...... 하늘에 있는 것들과 하늘 자체를 밤에 별빛과 달빛을 봄으로써 더 쉽게 관찰하게 될 걸세. …… 다음으로 그는 태양에 대해서 벌써 이런 결론을 내리고 있을 걸세. 즉 계절과 세월을 가져다주며, 보이는 영역에 있는 모든 것을 지배하며, 또한 어느 면에서 그를 포함한 동료들이 보았던 모든 것의 ‘원인이 되는 것(aitios)’이 바로 이것이라고 말일세.”2)
속박에서 풀리고 동굴 밖으로 나와야 비로소 참된 세계를 보게 된다. 햇빛 아래 환히 드러나는 세계. 그리고 이렇게 세계를 드러내게 하는 궁극의 원인자 태양을 알게 된다. 이런 참 실재의 세계를 플라톤은 이데아(idea)계라고 하였다.
이데아계는 감각을 통하여 알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완전히 감각을 배제하고 오직 이성(理性)에 의지하여 냉철한 사유(思惟)를 따라가야 도달할 수 있는 세계이다. 그림자를 그냥 수용하는 게 아니라 그 원형을 상상하며 완전한 모습을 추론하여야 하는 것이다. 예컨대 무수히 많은 삼각형에서 삼각형의 공통점을 찾아내고 추론하여 세 개의 직선으로 이루어지고 내각의 합이 180°인 특성을 이끌어 내어야 하는 것이다. 이성의 사유를 통해서 알 수 있는 세계, 가지계(可知界)이다.
현상계의 삼각형은 불완전하고 변하는 것이지만, 삼각형의 이데아는 영원히 변치 않는다. 이 이데아만이 참이며, 현상세계는 이데아의 모방에 불과하다는 것이 플라톤의 생각이었다. 진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이데아에 대한 것뿐이다. 잡된 감각을 배제하고 순수한 사유를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세계. 영원히 변치 않는 고결한 세계가 플라톤이 사람들을 이끌어 보여주고 싶었던 세계이다.
【3】
“어떤가? (동굴 밖의 참 세계를 본) 이 사람이 최초의 거처와 그곳에 있어서의 지혜 그리고 그 때의 동료 죄수들을 상기하고서는, 자신의 변화로 해서 자신은 행복하다고 여기되, 그들을 불쌍히 여길 것이라고 자넨 생각지 않는가?”
“그러고말고요.”
……
그래서 내가 말했네. “그러면 이 점 또한 생각해 보게. 만약에 이런 사람이 다시 동굴로 내려가서 이전의 같은 자리에 앉는다면…… 만약에 그가 줄곧 그곳에서 죄수 상태로 있던 그들과 그 그림자들을 다시 판별해 봄에 있어서 경합을 벌이도록 요구받는다면, …… 그는 비웃음을 자초하지 않겠는가? 또한 그에 대해서, 그가 위로 올라가더니 눈을 버려 가지고 왔다고 하면서, 올라가려고 애쓸 가치조차 없다고 하는 말을 듣게 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자기들을 풀어 주고서는 위로 인도해 가려고 꾀하는 자를, 자신들의 손으로 어떻게든 붙잡아서 죽일 수만 있다면 그를 죽여 버리려 하지 않겠는가?”
“물론 그러려 할 것입니다.” 그가 대답했네.3)
플라톤은 누구보다도 먼저 동굴의 어둠에서 나와 밝은 신세계를 보았다. 그리고 거기에 머물지 않고 다시 어두운 동굴로 돌아가 그곳에 묶여 있는 사람들을 동굴 밖으로 인도하고자 하였다. 스승 소크라테스가 스스로 멍에를 자처하며 사람들의 자각을 촉구하였고, 플라톤은 실재로 사람들을 이끌고 이상사회 건설을 시도하였다. 하지만 스승은 사약을 받았고, 플라톤에겐 좌절이 안겨졌다.
좌절과 절망은 어쩌면 처음 새로운 세계를 여는 사람의 숙명과도 같은 것인지 모르겠다. 필연적으로 이들의 사상이 구체제의 기득권자들과 충돌하게 되어있기 때문에. 혹은 신세계가 열리기에는 아직은 무르익지 않아서……. 어찌되었든 새로운 세계는 선각자들의 희생을 요구한다.
이상은 현실 판단의 기준이며 미래의 목표이다
공자(孔子)는 제자백가 중의 한 명에 불과했다. 붓다도 많은 스승 중의 한 명이었고, 소크라테스와 플라톤도 많은 소피스트 중의 한명이었다. 공자는 요순(堯舜)을 따를 뿐 스스로 창조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공자 스스로 요순으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을 충실히 따를 뿐, 본인이 나서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는 게 아님을 천명한 것이다. 하지만 후인들은 공자를 유학의 개조(開祖)로 만들었다. 후인들이 잘못한 게 아니라 잘 본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요임금 왈~ 순임금 왈~”하지 않고 “공자 왈~ 맹자 왈~”하게 되는 이유가 공자에 와서 유학은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열었기 때문이다.
공자는 모든 인간의 가능성을 최고의 경지로 끌어 올렸다. 이른바 인(仁)의 경지는 당대 최고의 정치지도자에게도 허락되지 않았다. 제환공(齊桓公)이나 진문공(晉文公) 같은 영웅도, 관중(管仲)이나 안영(晏嬰)같은 탁월한 정치인도 넘보지 못한 인의 경지가 가난한 안회(顔回)에게는 쉽게 허락되었다. 인은 ‘어짐’이고 ‘사랑’이다. 완성된 인격에서 나오는 아름다움의 극치, 그 향기로 가득한 세계. 이것이 공자가 진정으로 열고자 했던 경지이며 세계일 것이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완전무결함이라고 이해되어도 무방하리라 생각된다. 인간의 이데아라면 완전한 인간의 모습, 정신적ㆍ육체적 완전체라면 그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아마도 “좋다!”는 감탄사가 저절로 튀어 나오지 않을까. 마치 하느님이 자신이 창조한 천지를 보며 좋다고 감탄한 것처럼 말이다.
플라톤이 말하는 덕(arete)은 ‘탁월함’으로 번역된다. 상상해 보자. 그의 모든 가능성이 가장 탁월하게 구현된 인간의 모습. 육체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지극히 건강하며 약한 사람을 도우면서도 전혀 티를 내지 않는 사람. 예수는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고 했고, 부처는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없다하지 않았던가.
이들이 열어놓은 경계는 이처럼 아름답고 좋은 것이다. 이들 선각자들은 인간의 정신을 한없이 높은 곳으로 고양시켰고, 인간의 영혼을 지극히 깨끗한 경지로 이끌었다. 이들은 진정 순수하고 고결한 문명세계를 열어 보였다. 그리고 현실 속에서 그들은 좌절하였고 때론 죽임을 당하였다.
생각해 보면 모두가 고결하고 모두가 선한, 그렇게 좋은 세계가 결코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라도 그 가능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상(理想)은 한 번도 실현된 적이 없다. 이상은 언제나 이상에 머물러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상은 현실 속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상의 빛은 현실의 어둠을 깨닫게 하고, 어둠속에서 나아가야할 방향을 제시해 준다. 이상은 현실을 판단하는 기준이요 미래의 푯대이다.
주) ------
1) 플라톤, 박종현 역주, 《국가ㆍ정체(政體)》
2) 위의 책.
3) 위의 책.
김문갑 | 철학박사, 충남대 한자문화연구소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