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복종전(保福從展, ?~928)선사는 설봉의존의 법사이다. 속성은 진(陳)씨이며, 복주(福州, 현재의 福建省) 복당현(福唐縣) 사람이다. 15세에 설봉에게 출가하였으며, 18세에 대주(大州) 대중사(大中寺)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설봉에게 출가한 후 제방을 돌아다니면서 아호지부(鵝湖智孚)·장경혜릉(長慶慧稜) 등에게서 가르침을 받았으나 최종적으로는 설봉의 법을 이었다. 장경혜릉과는 사형사제로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음은 전회에서 말씀드렸지만, 《조당집》에도 장경혜릉과의 문답이 대단히 많다. 917년에 창주자사(彰州刺史)인 왕흠(王欽)의 도움으로 보복원(保福院)을 개창하여 입적할 때까지 12년 동안 교화를 폈는데, 가르침을 받는 무리들이 항상 700명을 넘었다고 전해진다.

보복종전과 《조당집》의 관계를 말할 때 중요한 것은 정수성등(淨水省僜, 생몰년미상) 선사에 관한 것이다. 정수성등선사는 보복종전의 제자로서 문등(文僜)이라고도 한다. 《조당집》에는 선사들을 기리는 송(頌)이 많이 실려 있는데, 그것은 모두 정수선사가 지은 것이다. 이 이유로 《조당집》을 편찬한 정(靜)·균(筠)의 두 선사는 정수성등의 제자라고 추측된다.
《조당집》에는 보복선사가 설봉의존에게 참학하게 되는 계기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설봉이 주장자로 밀치자 현묘한 이치에 계합
 문하에 7백여 명 북적, 존엄한 가르침이 특징


보복은 15세에 설봉에게 귀의해서 출가하였으나 잠시 오초(吳楚)의 지방을 돌아다니다가 이내 다시 돌아와 제자의 예를 갖추고 인사를 하였다. 그러자 설봉이 즉문했다. “알겠는가?” 보복이 앞으로 가려는데 설봉이 주장자로 밀치니, 선사가 그 순간 현묘한 이치에 계합하여 더 이상 다른 곳으로 갈 생각이 없어지고 모든 기연에 은밀히 계합하였다.

이와 같이 설봉의 문하에서 오랫동안 단련하여 인가를 받은 보복선사는 제자를 가르치는데 있어서도 준엄하였다. 선승들에게는 보통 제자들을 가르치는 고유의 방편이 있는데, 예를 들어 임제할(臨濟喝)·덕산방(德山棒)과 같은 것이다. 마찬가지로 보복선사는 다음과 같은 문답으로서 제자들을 지도하였다고 전해진다.

선사가 어느 날 상당하여 말했다. “누구든지 물으려면 큰 소리로 물어라.” 이때 어떤 사람이 나서서 물었다. “학인이 큰 소리로 물을 테니, 화상께서도 큰 소리로 답해 주십시오.” 그러자 선사가 물었다. “뭐라고 하는가?” 학인이 다시 앞의 질문을 하니, 선사가 말했다. “나는 귀머거리가 아니니라.”

이때 보복이 ‘뭐라고 하는가?’라고 반문한 것은 듣지 못해서가 아니다. 제자를 낚기 위해 낚시바늘을 드리운 것이다. 그런데도 이를 눈치 채지 못한 제자는 앞의 질문을 되풀이하기만 한다. 그러자 보복은 ‘나는 귀머거리가 아니다!!’하고 비난한다. 이와 같은 문답이 《조당집》에는 여러 개 실려 있다.

제자가 물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무생(無生)의 길을 알려면 모름지기 본원을 알아야 한다’하였는데, 어떤 것이 본원입니까?” 선사가 양구(良久)했다가 문득 시자에게 물었다. “저 스님이 좀 전에 뭐라고 물었느냐?” 그 스님이 다시 물으니 선사가 꾸짖으면서 말했다. “나는 귀머거리가 아니다.”

한편 《조당집》에는 다음과 같은 문답이 존재한다.

어떤 제자가 보복선사에게 물었다. “마등(摩騰)이 한(漢)나라에 들어와서 일대장교가 분명해졌는데, 달마께서는 무엇을 가르치기 위해 서쪽에서 오신 것입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상좌가 행각하고 있는 일은 무엇인가?” 제자가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이에 선사가 말했다. “남의 몫만 취하려 하지 말고 알아차리는 것이 좋으리라.” 

▲ 삽화=장영우 화백

 중국에 불교가 전해진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우선 전설상으로는 후한(後漢)의 명제(明帝)가 어느 날 서쪽에서 괴인이 날아와서 궁정뜰에 내리는 꿈을 꾸고서 신하에게 물으니 어떤 신하가 답하기를 ‘제가 듣기로 서역지방에 성인이 태어났는데, 그는 하늘을 날고 몸에서 광채가 납니다. 아마 서역의 성인일까 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명제는 사신을 파견하여 불교를 수입하였는데, 이때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이 최초로 전해졌다고 한다. 그러나 《고승전(高僧傳)》에 의하면, 가섭마등(迦葉摩騰)이 축법란(竺法蘭)과 함께 중국에 와서 백마사(白馬寺)에서 《사십이장경》을 번역한 것이 최초라고도 한다.


여기서 제자는 ‘가섭마등이 한나라 때 이미 불교를 전했는데, 달마는 왜 또다시 중국에 온 것입니까? 이미 불법은 가섭마등에 의해 전해지지 않았습니까?’하는 질문이다. 이에 대해 보복은 상좌에게 ‘너는 무엇을 수행하고 있는가?’하고 물으니 제자는 답을 하지 못했다. 자기의 본분사도 알지 못하면서 마등이니 달마니 하는 남의 보배만 세고 있는 것을 비난한 것이다.
또 《조당집》에는 다음과 같은 문답이 존재한다.

보복선사가 “어떤 스님이 동산(洞山)에게 묻기를 ‘예로부터 몇 사람이나 이 문안에 들어왔습니까?’하니, 동산이 답하기를 ‘한 사람도 이 문안에 들어온 이가 없느니라’ 하자, 스님이 다시 묻기를 ‘그렇다면 사람을 너무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까?’ 하니, 동산이 대답하기를 ‘만일 참으로 그러하다면 사람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니라’ 하였다.” 한 이야기를 드니, 어떤 제자가 선사에게 물었다. “옛사람의 뜻은 부축해 문에 들게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부축하지 않고 문에 들게 하는 것입니까?” 그러자 보복이 말했다. “너는 행각을 다니면서 어떤 사람의 힘을 빌렸는가?”

예로부터 선림에서는 깨달음에 드는 것을 ‘문에 들어가는 것’에 비유하였는데 이를 입문삼구(入門三句)라 한다. 상세하게는 깨달음에 도달했을 때를 당문(當門), 막 깨달음에 든 것을 입문(入門), 이미 깨달음에 들어서 익숙한 것을 리문(裏門)이라 한다. 원래 입문삼구는 당나라 분양선소(汾陽善昭, 947~1024)의 분양오문구(汾陽五門句)에서 유래하였는데, 분양선소는 깨달음의 상태를 오문구로 나누어서 제시하였다. 오문구란 입문구(入門句)·문리구(門裏句)·당문구(當門句)·출문구(出門句)·문외구(門外句)이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출문구와 문외구는 ‘깨달음의 세계에서 나와서 중생교화를 행하는 상태’를 의미한다고 생각된다. 입전수수(入廛垂手)와 같은 것일 것이다.

예로부터 많은 선사들이 입문삼구로서 제자들을 가르쳤는데, 고려시대의 나옹혜근(懶翁惠勤, 1320~1376)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 나옹혜근은 공민왕이 직접 참석한 승과(僧科)에서 공민왕이 ‘무엇으로 승려들을 점검할 것인가?’하고 질문하자, 입문삼구(入門三句)와 공부십절목(功夫十節目)·삼관(三關)을 차례로 질문하여 점검하겠다고 답하였다. 그런데 환암혼수(幻庵混修, 1320~1392)를 제외한 다른 승려들은 모두 입문삼구에 막혀서 공부십절목과 삼관은 묻지도 못했다고 전해진다. 나옹의 입문삼구란 ‘문에 들어오는 구를 분명히 말하라(入門句分明道)’ ‘문에 도달한 구는 어떠한가?(當門句作麽生)’ ‘문안의 구는 어떠한가?(門裏句作麽生)’를 질문하는 것이다.

위의 문답에서 제자가 말한 ‘부축해서 문에 들게 한다’는 것은 타인의 도움으로 깨달음에 이르는 것일 것이다. 즉 제자가 보복에게 ‘깨달음에 이르는 것은 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까, 혼자 힘으로 이르러야 하는 것입니까?’하고 물은 것이다. 이에 대해 보복은 ‘너는 행각을 다니면서 어떤 사람의 힘을 빌렸는가?’하고 반문한다. 이는 자력으로 깨달아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깨달음은 결국 다른 사람의 힘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대혜종고는 일찍이 ‘장사는 팔을 뻗을 때 다른 사람의 힘을 빌리지 않는다[壯士展臂不借他力]’고 하였다.

-동국대 불교학술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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