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그리스도교는 현실에서 다르다. 서로 대화하고 배우고 가르쳐야 한다는 화합적 당위론은 공감하면서도 양 종교의 현실적 만남은 접점을 찾기 어렵다.

‘오직 예수’라는 단일적 믿음을 통한 천국에서의 영생을 최고의 가치로 삼은 그리스도교와 ‘불성’ 회복을 통한 깨달음이 궁극적 목표인 불교는 같아 보이지 않는다. 최근 일부 종교학자들이 불교와 그리스도교, 기타 종교 간의 유사성과 공통점, 지향하는 궁극적 목표의 동일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기존 교단’의 인식은 차갑기만 하다.

최근 《도마복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그리스도교의 ‘공관복음서’에 포함 되지 않은 《도마복음》이 ‘깨침’을 궁극적 지향으로 삼은 불교와 흡사하기 때문이다. 비교종교학자 오강남 캐나다 리자이나대 교수가 계간 〈불교평론〉가을호에서 “‘도마복음’과 불교는 다 같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라며 《도마복음》의 대표적인 구절을 인용해 그 유사성과 지향점을 풀이했다. 오강남 교수의 기고문 ‘도마복음:불교와 그리스도교를 잇는 가교’를 세부적으로 읽어보자

종교의 지향점 ‘심층’을 지적하다

오강남 교수는 글을 시작하면서 종교의 전통을 ‘표층(表層)’과 ‘심층(深層)’ 두 가지 층이 있다고 보았다. 서양으로 보면 엑소테릭(exoteric)과 에소테릭(esoteric)이다. 불교적으로 보면 현교적(顯敎的) 차원과 밀교적(密敎的) 차원으로 오 교수는 비유했다.

오 교수는 표층 종교의 특색을 “경전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고, 종교를 자기중심적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는 것”으로 파악했다. 반면 심층 종교는 “경전의 문자적인 뜻 너머에 있는 더 깊은 뜻을 깨쳐 나가려고 노력하고, 종교를 자기중심적인 나를 비우고 내 속에 있는 참 나를 찾는 길로 받드는 길”이라고 보았다. 오 교수는 모든 종교에 표층과 심층이 혼재한다고 보았다. 다만 각 종교에 표층과 심층 부분이 “어느 쪽이 더 두꺼우냐는 비율상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보았다.

불교에서 깨침을 주장하고, 성불을 궁극적 관심사로 여기는 부분은 심층이지만, 기복(祈福)에만 얽매여 깨침의 도리를 잊는 부분은 표층에 속한다고 보았고, 표층 종교를 통한 삶의 영위하는 현실은 이상할 게 없다고 보았다. 오 교수는 표층적 관심이 심층적 관심으로 가는 시작점으로 보았고, 불교는 표층 종교로서의 궁극적 목표가 분명하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한국 그리스도교는 대부분 표층에만 머무르고 있다고 오 교수는 지적했다. 오 교수는 “한국 그리스도교는 스스로 깨달음이라는 ‘심층’의 차원이 있는지 조차 모르고 있다”고 꼬집었다. 심층을 이야기 하는 것이 ‘이단’으로 몰리거나 그리스도교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 한국의 현실이라는 것이다.
오 교수는 한국에서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차이를 불교인들이 표층에 머무르지만 깨달음이라는 심층을 목표로 삼거나 심층적인 불교를 받들고 이를 따르는 사람들을 비난하지 않고 존경하는 반면 그리스도교는 “자신들의 심층적 차원을 말하는 자를 배척하고 정죄한다”는 점에서 찾았다. 오 교수는 그 증거로 정통 그리스도교에서 유영모, 함석헌 선생을 업신여기거나 무시하고 배척하는 것을 꼽았다.

오 교수가 들어가는 글을 통해 ‘표층’과 ‘심층’ 종교의 차이를 언급한 것은 그리스도교가 가지고 있던 심층 종교의 비밀을 포기한 점을 비판하고, 표층에서 심층으로 더 나아가지 못하는 불교의 현실을 지적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심층적 종교성 담은 《도마복음》

오 강남 교수는 《도마복음》에서 그리스도교의 심층적 특징의 존재와 이의 불교의 깨침과 상통하는 유사성을 보았다.
오 교수는 그리스도교 초대교회에는 단순한 믿음에 만족하는 표층적 그리스도교와 단순 믿음 단계를 지나 사물의 실상을 꿰뚫는 깨달음의 단계를 추구하는 심층적 그리스도교가 병존했다고 분석했다. 세례 요한이 ‘물’로 세례를 준 것을 심층 그리스도인들은 ‘첫 단계’에 불과한 것으로 여겼고, 요한 스스로도 자기 뒤에 올 예수를 “성령과 불”(마태복음 3:11, 누가복음 3:16)로 세례를 주리라 예언한 것은 영적 눈을 떠야한다고 생각했다고 파악했다. 오 교수는 성령과 불로 받은 제2의 세례를 ‘아폴루트로시스(apolutrosis)’, 즉 ‘해탈’로 보았다고 분석했다.

오 교수는 표층 그리스도인은 ‘믿음’을 강조한 반면, 심층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말에 감추어진 ‘비밀’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한 점에 주목했다. 비밀을 깨닫는 것을 ‘그노시스(gnosis)’라 했는 데 이는 한문으로 영지(靈知)라 번역하고 우리말로는 깨침 또는 깨달음에 가깝다는 것이다. 특히 그노시스는 불교의 반야(般若, 쁘라즈나), 혜(慧)·명(明)·지혜(智慧)를 말하며 통찰·꿰뚫어 봄·직관 등에 해당한다고 분석했다.

그렇다면 심층 그리스도교가 현재는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오 교수는 tth수의 심층 그리스도인들이 분열을 조장한다고 본 초기교회에 의해 사라졌다고 보았다. 스스로의 깨달음을 강조한 주장이 교회의 계급제도와 조직의 권위와 일치를 저해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결국 초기 교회는 다수의 표층 그리스도인의 주도하에 4세기 콘스탄티누스 황제 당시 ‘하나의 하느님, 하나의 신조, 하나의 성서’로 통일한 ‘니케아 공의회’ 의 결과로 심층 그리스도인들이 이단으로 몰렸다는 것이다. 결국 심층 그리스도인들이 주요시 했던 깨달음 중심의 문서들이 파기 처분되었고, 심층 그리스도교는 지하로 사라졌다고 보았다.

《도마복음》의 등장은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를 혁명적으로 바꿔주며, 심층적 그리스도교의 존재를 알린 중요한 책으로 지목되고 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깨침’으로, 예수를 ‘깨침을 가르치는 분’으로 묘사하는 《도마복음》을 분석해 보자

《도마복음》과 불교는 다 같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오 교수는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접점을 찾을 수 있는 대표적인 구절로 《도마복음》 제22절, 예수가 젖을 먹는 아이를 보고 제자들을 가르친 장면을 들었다.

“여러분이 (젖을 먹는 아이들처럼) 둘을 하나로 하고, 안을 바깥처럼 바깥을 안처럼 하고, 높은 것을 낮은 것처럼 하고, 암수를 하나로 하여 수컷은 수컷 같지 않고 암컷은 암컷 같지 않게 하고, 새로운 눈을 가지고, 새로운 손을 가지고, 새로운 발을 가지고, 새로운 모양을 가지게 되면, 그러면 여러분은 그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한 구절이다.

오 교수는 “젖먹이 어린아이는 주객(主客)과 내외(內外), 상하(上下), 고저(高低), 자웅(雌雄) 등 일견 반대되고 대립되는 것을 반대나 대립으로 보지 않고 조화의 관계로 보는, 이분법적 의식이 없는 상태”로 풀이한다. 이는 양자택일의 시각이 아닌 ‘양극의 조화’, 또는 ‘초이분법적 의식’을 갖는다는 것으로, 분별의 세계를 초월해 불이(不二)의 경지에 이르라고 말하는 불교의 가르침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오 교수는 세계 종교 모두 양극의 조화 개념을 중요시 했다고 말한다. 음양을 말하는 ‘태극’, 유대교의 ‘다윗의 별’, 그리스도교의 ‘십자가’와 ‘물고기 모양’, 그리고 불교의 만(卍) 자 등이 양극의 조화를 이상으로 삼았다는 증거로 제시했다.

오 교수는 《도마복음》제23절 “나는 여러분을 택하려는 데, 천 명 중에서 한 명, 만 명 중에서 두 명입니다. 그들이 모두 홀로 설 것입니다.”라는 구절에서 ‘깨달음에 이르는 길의 어려움을 강조하고 있다고 보았다. 선불교의 ‘난행도(難行道)’나 정토종의 ‘이행도(易行道)’와 흡사하다고 그는 보았다. 오 교수는 20세기 가톨릭 최고의 심학자 칼 라너가 “21세기 교회는 신비주의적으로 변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것”이라고 말한 점과 독일의 신학자 도로테 죌레가 그의 책 《The Silent Gry》에서 ‘신비주의의 민주화’를 주장한 것과 (심층적 종교로 가기 위한) 참선이나 명상이 유럽이나 미국의 젊은이들 사이에 주목받는 것은 ‘깨달음’의 심층 종교의 새로운 부상으로 이해했다.

“나는 내가 설 곳을 세상으로 정하고, 육신으로 사람들에게 나타났습니다. 나는 그들이 취해 있음을 보았지만, 그 누구도 목말라 하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 그러나 지금은 그들이 취해 있지만, 술에서 깨면 그들은 그들의 의식을 바꿀 것입니다”란 《도마복음》 제28절도 불교와 접점이 큰 구절로 제시했다.
오 교수는 예수가 이 세상에 육신의 몸으로 온 것은 세상 죄를 지고 가려는 게 아니라, 술에 취한 상태에 있으면서 현상 세계만 실재인 줄 알고 있는 인간들에게 현상 세계 너머에 있는 실재(實在), 진여(眞如), 혹은 자신의 참모습을 보도록 깨우쳐 주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오 교수는 특히 술에서 깨면 ‘의식을 바꿀 것’이라고 말한 대목을 예수 가르침의 핵심에 해당하는 부분이라며 종교사적 중요 발언이라고 설명한다. 그리스어 ‘메타노이아(metanoia·성서에서는 ‘회개’로 번역돼 있음)’를 번역한 ‘의식의 변화’는 단순한 반성을 뜻하기보다 이분법적 의식을 초이분법적 의식으로 변화시키라는 뜻으로, 불교의 ‘깨침’이나 ‘성불’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오 교수는 이 절의 끝이 메타노이아, 즉 성불의 가능성을 보장한다고 보았다. 누구나 결국은 반야지에 이를 수 있다는 말로,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의 뜻이 상통한다는 것이다.

오 교수는 제42절의 “나그네가 되라”고 부분을 모든 수행의 시작이 집을 떠나는 것과 같다는 걸 지적하는 가르침으로, 불교의 ‘십우도’에서의 종교적 수행의 시작이 집을 떠나는 것과 같다고 말한 점과 상통한다고 지적했다.

또 제67절 “모든 것을 다 아는 사람도 자기를 모르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한 구절은 일반적인 앎을 기초로 한 인습적 지식을 ‘알음알이’라 하여 위험시하는 말씀으로 각각 풀이한 뒤, 이 역시 불교의 가르침과 다르지 않은 중요한 구절이라고 설명했다.

오 교수는 제77절 “나는 모든 것 위에 있는 빛입니다. 내가 모든 것입니다. 모든 것이 나로부터 나왔고, 모든 것이 나에게로 돌아옵니다. 통나무를 쪼개십시오. 거기에 내가 있습니다. 돌을 드십시오. 거기서 나를 볼 것입니다.”라고 한 부분을 분석했다.

‘나는 빛’이라고 말한 부분의 ‘나’는 예수 개인이 아닌 우주적 나, 즉 불교에서 말하는 ‘참 나’라는 것이다. 결국 ‘참 나’는 참된 자아로서의 불성을 이르는 말이라는 것이다. 또 ‘빛’의 종교적 상징적 의미는 우리 속에 있는 신적 요소, 신성, 참 나를 말하는 것으로 보았다.
77절의 마지막 부분 ‘통나무를 쪼개십시오. 거기에 내가 있습니다. 돌을 드십시오. 거기서 나를 볼 것입니다.’는 ‘범재신론적 신관’ 즉 불교에서 말하는 부처님은 어디에나 존재하다는 점을 말하며, ‘도의 편재성(遍在性)’을 강조한다고 보았다. 불교의 이사무애 사사무애(理事無碍事事無碍)의 경지라는 것이다.

오 교수는 기고문을 끝내며, “《도마복음》이나 불교의 깊은 가르침이 다 같이 우리에게 ‘심층’ 차원의 종교를 지향하도록 우리를 일깨워 주고 있다”고 강조했다. 오강남 교수는 캐나다 리자이나대학교의 비교종교학과 교수로, 서울대 종교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오 교수는 그동안 《길벗들의 대화》 《예수는 없다》《세계종교 둘러보기》《또 다른 예수》 등의 저서를 통해 종교 대원주의 사회에서의 협력을 강조해 왔다.

서현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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