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이하 금강경)은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선종(禪宗)인 대한불교조계종의 소의경전(所依經典)이다. 이것은 중국 선종의 제6조인 혜능(慧能, 638~713) 선사가 《금강경》에 의해 깨달았다는 《육조단경(六祖壇經)》의 기록에 의한 것이며, 조계종(曹溪宗)이란 명칭 또한 혜능 선사가 주석하던 조계산(曹溪山) 보림사(寶林寺)의 산명(山名)을 지칭한 것이다.

중국 선종이 달마(達磨)를 초조로 받들지만 실제로 중국선(中國禪)의 대표는 혜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혜능이 《금강경》에 의해 깨달음을 얻고, 그 깨달음으로 가는 수행방편으로 설한 것이 《육조단경(六祖壇經)》이므로 《육조단경》의 내용은 《금강경》을 소의(所依)로 하였다고 할 수 있다.

한국불교에 있어서 《금강경》이 소의경전으로 된 것은 고려시대 보조 지눌(普照 知訥, 1158~1210) 선사가 조계산 수선사(修禪社)에서 정혜결사운동(定慧結社運動)을 실현한 때부터로 추측할 수 있다.

“항상 《금강경》을 지송(持誦)토록 하고, 법(法)을 세우고 뜻을 펴는 것에는 반드시 《육조단경》으로 하고 이통현 장자의 《화엄론》과 대혜의 어록(語錄)을 양 날개로 삼았다.”

이와 같이 《금강경》은 한국불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경전으로 수행에 지침서가 되고 있다. 현재 남종선의 종지종풍(宗旨宗風)을 표방하고 있는 대한불교조계종은 소의경전으로서 《육조단경》과 《금강경》을 가장 중시하고 있다. 선학원에 주석하며 한국불교의 정화에 앞장서 대한불교조계종을 반석 위에 올려놓은 청담 스님은 《금강경》에 깊은 관심을 보였고 항상 강의하였다. 청담 스님이 강의한 《금강경》을 바탕으로 선종과의 관계를 살펴봄으로써 《금강경》이 선종에서 왜 중요시 되는가를 정리하고 청담 스님의 선사상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상(相)이 없는 실천이 깨달음 이끌어

달마 선사는 《능가경》을 소의경전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달마선을 능가선이라고도 한다. 그러므로 직접 《금강경》과는 상관이 없다. 하지만 혜능 선사의 깨달음은 《육조단경》에 의하면 《금강경》의 가르침에 의한 것이다. 혜능 선사는 출가 전에 나무를 팔고 손님 집에까지 나무를 져다주고 돌아서는데 한 스님이 《금강경》을 독송하는 것을 듣고 즉시 마음이 밝게 깨었다. 혜능 선사가 그 스님에게 물었다. “어느 곳에서 이 경을 가져왔습니까?” 스님이 답했다. “내가 기주 황매현에서 홍인(弘忍) 화상을 예배하였는데 그곳의 문하생이 천 명이 넘습니다. 그곳에서 대사께서 권하기를 다만 《금강경》 한 권을 수지하면 즉시 성품을 보아 바로 성불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혜능 선사는 이 말을 듣고 숙업(宿業)의 인연이 있음을 깨닫고 모친을 하직하고 곧바로 황매산(黃梅山) 홍인 선사를 찾아갔다. 이후 혜능 선사는 오도송(悟道頌)을 지은 것으로 인하여 대중이 모르게 야반삼경(夜半三更)에 홍인 선사의 부름을 받고 방장실(方丈室)에서 《금강경》 강설을 듣다가 문득 깨닫게 되었다.

혜능 선사는 이와 같이 《금강경》에 의하여 깨달음을 얻었으니 소의경전은 이로부터 《금강경》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소의경전의 전변은 하택 신회(荷澤 神會, 684∼758) 선사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택 선사가 대운사에서 무차대회(無遮大會)를 열고 혜능 선사가 달마선종의 적법계통임을 선언하고 《남종정시비론》을 발표하여 북종의 신수계(神秀系)를 정통이 아니라 배격하고 남종 혜능계(慧能系)를 정통이라 하면서 달마 선사 이후 소의경전이었던 《능가경》을 무시하고 《금강경》으로 소의경전마저 바꿔 버렸다. 이렇게 하여 《금강경》이 선종의 소의경전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금강경》의 반야(般若)사상이 실천적(實踐的) 의미에서 태동된 것이 선 수행법이다. 부정 논리의 극치를 이루는 공(空), 혹은 긍정의 논리인 중도(中道)를 반야의 세계로 표현하는 것이 옳다면 언어와 문자로 더 이상 나갈 수 없는 끊어진 자리에서 뚫고 나가야 할 관문이 나타나게 된다. 그것을 언어도단(言語道斷)하고 심행처멸(心行處滅)한 선(禪)으로 참구하여 관문을 뚫어야 반야의 참 맛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금강경》의 즉비(卽非) 논리로써 선(禪)으로의 실천적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청담 스님에게 있어 선 체험은 곧 마음에 대한 깨침이며, 《금강경》이야말로 그러한 깨침의 세계를 분명히 밝혀놓은 경전이기에 스님은 《금강경》에 대한 강좌를 통하여 불자들이 모두 마음을 깨치고, 상(相)이 없는 실천을 하라고 강조한 것이다.

“《반야경》의 실상반야, 곧 아공(我空), 법공(法空), 구공(俱空)을 깨달았으면, 그런 다음에는 ‘보시를 하라. 그리고 육바라밀을 행하라.’하는 것은 실상반야(實相般若)만 지키고 있으면 그것이 소승(小乘)의 나한(羅漢) 밖에 안 되기 때문입니다. … 아무 것도 없는 경지에 들어가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다 된 것인 줄로 알고 공(空)에 떨어질 것을 염려하여 육조(六祖) 대사께서 나무라신 것입니다.”

청담 스님은 반야(般若)사상에 대해 공(空)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공(空)을 깨닫고 나서 ‘보시(布施)를 하고 육바라밀(六波羅密)을 행하라’며 적극적 실천을 강조한다. 소승의 행이 아닌 대승의 행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청담 스님의 ‘정화’ 와 ‘호국불교’의 실천원리가 바로 마음에 대한 깨침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금강경’ 설한 공덕 끝없어

혜능 선사는 선(禪)이란 “무념(無念)을 종(宗)으로 삼고, 무상(無相)을 체(體)로 삼고, 무주(無住)를 본(本)으로 삼는다”고 하여 마음 수행을 강조하였다. 또한 《금강경》을 중시하고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應無所住而生其心〕”는 구절을 듣고 깨달았다. 이는 참마음의 즉각적인 발현이 《금강경》 사상의 핵심이라는 증거이다. 청담 스님이 한 평생 보여준 실천의 모습은 바로 이 같은 혜능 선사의 선사상을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청담 선사의 체험과 깨달음의 세계가 그대로 표현되어 있는 경전인 《금강경》. 스님은 ‘대승정종분(大乘正宗分)’에서 대승(大乘)의 핵심 사상을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그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시킬 것이니라. 무릇 일체 중생의 종류인 ‘알로 생긴 것’, ‘태로 생긴 것’, ‘습기로 생긴 것’, ‘화하여 생긴 것’, ‘ 형상이 있는 것’, ‘형상이 없는 것’, ‘생각이 있는 것’, ‘형상이 없는 것’, ‘생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것’들을 내가 남김없이 다 부처되는 열반에 들게 하여 제도하리라. 하여 이와 같이 한량없이 많은 중생을 제도하였지만 실로 한 중생도 제도한 바 없느니라. 왜냐하면 수보리야, 만일 보살이 ‘나라는 생각’, ‘남이라는 생각’, ‘중생이라는 생각’, ‘오래 산다는 생각’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스님은 “대승의 골수를 말하는 장이라며 열반의 대해탈을 증득했으므로 지구가 깨지거나, 우리 민족이 다 죽거나, 정치를 거꾸로 하거나 그것은 내가 알 바 아니다. 이 육신 잡아다 마음대로 하라. 나는 그것 때문에 신경 쓸 것 하나도 없다. 말을 안 듣는 중생들한테 타이르고 가르쳐 줘봐야 말 안 들으면 욕하고 야단하고 똑같이 해야 되니,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중생들 시비에 나까지 말려들어서 번뇌 망상이 다시 일어나고 자기 본위로만 생각하고 중생들 구제할 생각을 안 하는 것이 소승불교(小乘佛敎)의 태도이고 나한들의 용심(用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그러면서 “나 혼자 독경을 일 년 내내 또는 평생을 하는 것보다 《금강경》을 한 번 읽고 단 반시간만이라도 남을 위해 해설하는 공덕이 참으로 비유가 안 될 정도로 크다”고 설한다.

청담 스님은 대승불교는 “나쁜 중생, 이것이 나를 부처로 만드는 좋은 부처로구나. 도가 되는구나.” 하고 부처와 중생과 마음을 하나로 보는 것이라고 설한다. 또한 “내 얘기 안 들으면 못 가게 하겠다. 죽여도 좋다. 죽이려면 죽여라. 적극적으로 중생과 나는 일심동체(一心同體)라는 대자비심(大慈悲心)으로 대원력(大願力) 수행을 목적으로 하여 마침내 성불하려는 것이 대승불교”라 강조한다.

중생은 누구나 청정한 자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본성을 알지 못하고 무시겁래의 업으로 자기도 모르게 물든 망상습기(妄想習氣)와 객진번뇌(客塵煩惱)로 인한 상(相)을 형성하고 그 상(相)에 속박되어 집착하기 때문에 거듭 갖가지 망상(妄心)의 업(業)을 짓고 그 업에 의해서 윤회(輪廻)의 고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즉 우리는 상(相)을 버리지 못하여 미망(迷妄)에서 헤매고 있는 것이다.

부처와 중생 실재로 차별 없어

《금강경》은 공(空)사상을 표방하는 반야계(般若系) 경전이면서 공이란 말은 없다. 하지만 가장 먼저 전제하는 것이 상인데 곧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을 말한다. ‘대승정종분’에서 중요한 문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하라는 것이다. 이는 첫째 어떤 중생이거나 반드시 멸도하도록 하겠다는 발원을 하고, 둘째 무량(無量), 무수(無數), 무변(無邊)의 많은 중생들이 모두 다 멸도하도록 하였으나 그 마음에 상(相)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내가 무엇을 한다거나 했다는 상에 머물거나 집착한다면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설한다.

여기서 《금강경》의 대전제는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일체중생이 모두 멸도하여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들었다면 무슨 상(相)이 있겠는가. 모두가 성불했는데 어떤 상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아직 고뇌에 허덕이는 중생이 있고, 중생이 있는 한 상에 얽매여 전도된 길을 가고 있으므로 철저히 어떤 모양의 색상(色相)일지라도 일시에 싹 버려야 한다.”고 청담 스님은 강조한다. 즉 모두를 방하착(放下着)하여 무거운 업장을 완전히 멸도해야 열반을 증득할 수 있다는 것이 《금강경》의 간절한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보살에게 사상(四相)이 있으면 보살이라 할 수 없다.

중생이 사상에 대한 그릇된 집착과 이러한 집착이 없다면 모든 행위는 어디에도 구애됨이 없이 무애자재(無碍自在)해 질 것이라고 스님은 강조한다. 원래 성(聖)과 속(俗)은 같은 것이어서 누가 누구를 제도하거나 제도할 바가 없는 것이다. 이는 중생 스스로 제도하는 것이지 부처가 중생을 제도한다면 이것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라는 실상(實相)이 있다는 것이다. 청담 스님은 “여래가 중생들을 교화하되 평등의 이치로 부처와 중생이 실재로 차별이 없음을 깨닫고 만유가 서로 경계 없이 상통할 수 없는 것이 진정한 깨달음”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형상은 자성을 여읜 허망한 존재

청담 스님은 반야(般若)사상을 드러내는 부분인 제오 ‘여리실견분(如理實見分)’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육신의 몸매로 여래를 볼 수 있느냐.”
“아니 옵니다. 세존이시여. 육신의 몸매로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오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육신은 곧 육신이 아니기 때문이옵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무릇 있는바 모든 것은 허망한 것이니, 만일 모든 현상이 진실상이 아닌 줄을 보면 곧 여래를 보리라.”

스님은 “‘여리실견분’에서 《금강경》의 핵심이 또 나온다”고 설한다. “그 골수는 소위 인생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을 기준으로 하는 말이냐”라며 “그것을 모르면서 아무리 불교를 믿고 49년 동안 부처님을 모시고 법문을 들어 보아도 아무 필요 없고 헛된 일”이라고 강조한다. 이는 “불성이 있지만 불성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내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하고, 내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이 부처님을 따라 다니고 철학자를 따라 다녀도 껍데기가 따라 다는 것에 불과하다”고 설하고 있다.

청담 스님은 “불교를 피상적으로 보고 ‘현실을 무시하고 어떻게 살 수 있느냐’고 하지만 이 몸뚱이보다 한 발 더 앞에 있는 이것이 현실”이라며 “이것이 곧 마음이다. 몸은 마음을 따라 다니는 그림자”라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마음이 만사의 주체이니 남에게 욕을 하거나 때리거나 마음이 먼저 시작하면 몸이 따라하는 것뿐이니, 육체는 항상 뒤에 처져 있고 마음은 어느 곳 어느 때나 현실”이라고 설한다.

마지막으로 “너는 무엇이냐? 여래가 무엇이냐? 하는 인생의 근본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이와 같은 도리를 밝힌 것이 ‘여리실견분’인데 이치대로 진리 그대로를 실답게 보고 있다”고 설하고 있다.

지혜와 안목 있으면 고(苦)의 원인 사라져

일체만유의 현상적 측면인 형상은 모두 그 자성을 여읜 허망한 존재다. 부처님은 이러한 무자성(無自性)으로서의 찰라(刹那)적 생명체인 유정(有情)의 눈으로 여래를 볼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온갖 상(相)이 실질적인 자성을 가진 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범소유상(凡所有相)’이란 무릇 형상(形相)이 있는 모든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일체제법, 일체의 모든 존재와 모든 경계를 모두 포함하고 있는 말이다. ‘개시허망(皆是虛妄)’은 일체(一切)가 다 허망(虛妄)하다는 것이다. 허망하다는 말은 공(空)하다는 말이고 고정된 실체가 없어 텅 비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불교에서 현상계의 진리를 표현한 것으로 불교에서 표현되어지는 현상계의 진리를 표현하는 것으로 무아, 무상, 고, 공, 인연, 중도, 무집착, 무소득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삼라만상 형상 있는 일체 모든 것은 항상 하지 않으며, 고정된 자아가 없고 괴롭다. 그러니 크고 작은 것도 없고, 많고 적은 것도 없으며, 잘나고 못나고도 없고, 나고 죽고도 없고, 생사와 열반도 없는 그 어떤 극단도 있을 수 없는 중도의 세계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약견제상비상즉견여래(若見諸相非相卽見如來)’라는 말은 일체 모든 형상이 실제는 형상이 아니며 공하여 텅 빈 것임을 바로 깨닫게 되면 곧 여래를 본다, 즉 깨닫게 된다는 물이다.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다 허망하며 텅 비어 있기에 깨달음의 눈으로 본다면 지극히 고요하고 적적하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아무런 변화도 없으며, 그 어떤 무언가가 나타나지도 않고, 나타나지 않았으니 소멸될 것도 없고, 괴로워 할 아무것도 없다.

본래자리로 가면 일체 모든 것이 딱 끊어진 적멸의 자리이다. 아무리 우리가 몇 백 생을 윤회하고 나고 죽고를 반복하더라도 본래의 입장에서는 아무 일도 없는 것이다. 본질에서는 적멸(寂滅)이고 지고(至高)한 평화만이 있을 뿐이다.

다만 우리가 이렇게 삶을 살아가며, 나고 죽고, 괴로워하고 즐거워하는 이유는 우리들의 어리석음 때문이다. 어리석음 때문에 우리는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생각이 집착을 불러온다. 그리고 집착은 괴로움의 원인이 되고 이것이 우리들 괴로움의 실체이다. 바른 깨달음만 있으면, 바른 지혜와 안목이 열리면 더 이상 괴로움은 괴로움이 아니다.

“범소유상(凡所有相)이 개시허망(皆是虛妄)이고,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이면 즉견여래(卽見如來)한다”는 이 말 앞에 그 어떤 것이 우리를 괴롭힐 수 있겠는가? 일체 모든 것이 허망하다는 것을 바로보면 여래를 볼 것이다. 다시 말해 바로 대자유의 깨달음인 여래를 볼 것이라고 했는데, 더 이상 여기에서 군더더기가 붙을 수가 없다. 이 게송에서 대자유인의 걸림 없고 여여한 삶을 볼 수 있는 선(禪)사상을 엿볼 수 있다.

방남수 | 불교문예학 박사, 평택 청담고등학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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