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를 믿으면서 이해하지 못하는 말 중 하나는, ‘사람 몸 받았을 때 열심히 수행해서 깨달음 얻으라’는 말입니다. 천상계도 아니고 아수라계도 아니고, 오직 인간계만이 깨달음을 얻는 데 가장 유리하다고 불교에서는 말합니다. 의식 수준으로 봐도 아무래도 천인이 인간보다는 나을 것 같은데 어째서 이런 주장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입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고통’이라는 요소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중생계의 속성을 ‘고통’ 이라고 했는데,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중생계에 차고 넘치는 ‘고통’ 이라는 자양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극락에는 ‘고통’이 없기 때문에 사바세계가 깨달음을 얻는 데 유리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의문은 ‘고통’이 왜 깨달음에 유리한가 하는 것입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행복하면 깨달음을 얻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지만 고통스러운 사람들은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깨달음에 매달리게 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다른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영화 <양들의 침묵>은 이 의문에 답이 됐습니다.

<양들의 침묵>(미국, 1991)은 1992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가장 중요한 부문인 작품상과 감독상, 각색상을 비롯해 남우주연상과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습니다. 가장 성공한 스릴러 영화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양들의 침묵>은 오프닝이 좋은 영화였습니다. 오프닝에서 영화가 하고자 하는 말을 다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 장면에서는 FBI 수습요원인 클라리스 스탈링(조디 포스터)이 훈련하는 장면을 보여주는데, 그녀는 숲에서 종이에 적힌 몇 개의 단어를 보았습니다. ‘상처’, ‘고통’, ‘통증’, ‘이것을 사랑하라’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들의 조합이 영화가 하고자 하는 말이라는 걸 느끼게 하는 장면이었습니다. 이는 또한 앞에서 제기했던 문제인, ‘고통이 왜 깨달음의 자양분이 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해결하는 열쇠이기도 합니다.

클라리스는 남성 중심의 세계인 FBI에서 성적인 차별을 받았습니다. 빨간색 유니폼을 입은 건장한 남자들이 가득한 엘리베이터 장면은 클라리스의 상황을 단적으로 설명했습니다. 건장한 남자들 사이에서 그녀의 모습은 약해 보인다는 인상을 주었습니다. 상대적으로 외소하게 보이는 모습은 이 집단에서 그녀의 처지가 매우 이질적이면서도 열등하다는 것을 설명하는 장면이었습니다.

상관인 크로포드 국장은 다루기 어려운 범죄자를 회유하기 위하여 그녀를 보냈습니다. 그녀가 여성이고, 거기다 젊고 예쁘기 때문에 미인계 차원에서 그녀를 흉악한 범죄자에게 질문지와 함께 보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녀의 역할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심부름’이라고 못 박았습니다. 여자는 결코 중요한 일을 할 만한 존재가 못 된다는 의미가 깔린 대사였습니다.

정신이상 범죄자 수감소의 정신과 의사이자 소장인 프레더릭 칠턴 박사는 더욱 심각한 성차별자였습니다. “여자 구경한 지 하도 오래 돼서 입맛에 맞을 지도 모르겠네요.” 하면서 그녀가 범죄자에게 할 수 있는 역할은 여성성 이하도 이상도 아니라는, 성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비록 그녀가 범죄학과 심리학을 전공하고, 차석으로 졸업하는 등 뛰어난 요원이지만 이곳에서는 여자라는 이유 때문에 그런 것들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습니다.

영화의 제목이 ‘양들의 침묵’인데 여기서 ‘양’은 약자, 희생자를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제목이 의미하는 것은, ‘약자인 희생자들의 비명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FBI에서는 약자인 클라리스의 비명소리가 마초주의에 물든 남성 집단에 전달되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 사회가 약자의 비명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우리 사회는 강자 중심의 사회라는 의미기도 합니다.

그러나 약자는 약자의 비명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FBI에서 약자인 클라리스가 유독 버팔로 빌 연쇄살인사건에 두각을 드러내는 것은 그녀에게는 희생자의 비명소리가 들리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잃고 친척집에 맡겨진 고아였을 때도 그녀는 약자였습니다. 그래서 도살당하는 양의 비명소리가 그녀를 괴롭혔습니다. 그 양들을 구하기 위해 우리 문을 열었지만 양들은 도망가려 하지 않았고, 그녀는 한 마리라도 구하기 위해 그 중 한 마리를 안고 도망간 기억이 있습니다.

거물급 범죄자인 한니발 렉터(안소니 홉킨스)는 그녀가 양들의 비명소리를 듣는 약자라는 사실을 알아챘습니다. 악마가 있다면 아마도 한니발 렉터와 같은 모습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로 상대가 고통을 느낄 만한 몇 마디의 말을 던져 상대방을 스스로 자살하게 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가진 인물이므로 그는 단순한 범죄자가 아니라 악마에 가까운 인물입니다.

그는 클라리스에게 우호적이었습니다. ‘관세음보살’의 의미가 세상의 소리를 들어 고통 받는 중생을 구제한다는 것인데, 클라리스가 양들의 비명을 듣는다는 것은, 좀 더 숭고한 인간이라는 의미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숭고한 인간에게 악마에 가까운 한니발 렉터 박사가 호의를 갖는다는 것은 모순입니다. 결국 그 의미는, 숭고한 인간을 타락시키고 싶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는 클라리스가 원하는 것을 한 개씩 던져주면서 결국 호감을 사고 나중에는 클라리스를 다른 사람들처럼 양들의 비명소리를 듣지 못하는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영화의 마지막에 버팔로 빌 사건을 해결하면서 FBI 정직원이 되고, 스포트라이트까지 받으면서 행복해 하고 있는 클라리스에게 한니발의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수감소를 탈출한 한니발은 현재 아프리카에서 그를 괴롭혔던 프레더릭 칠턴 박사를 죽이기 위해 뒤쫓고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 그는 클라리스에게 “아직도 양들의 울음소리가 들리는가?” 라는 강력한 메시지가 담긴 질문을 했습니다. 이 물음에 클라리스는 “아니오.”라고 명료하게 대답하고는 전화를 끊었습니다.

이 말은, 어린 시절 양들을 구하지 못했다는 트라우마를 극복했다는 의미이기도 하겠지만 이제는 양들의 울음소리를 듣지 못하게 됐다는 걸 의미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약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약자에 대한 공감능력과 자비심도 사라졌다는 걸 의미합니다. 권력을 가지게 됐고, 그 권력을 휘두르게 될 것이고, 양들의 울음소리 같은 건 신경도 쓰지 않게 될 것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봅니다.

FBI에서 가장 약자였던 그녀가 뛰어난 동료들을 제치고 버팔로 빌이라는 범죄자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약자였기 때문이었고, 그래서 약자의 비명소리를 듣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돌보지 않고 범죄현장을 뛰어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최악의 범죄자들만 갇혀 있는 감옥에 혼자 들어갈 용기를 내고, 버팔로 빌과 맞닥뜨렸을 때도 용감하게 맞설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양들의 울음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그녀는 칠턴 박사처럼 권력을 갖게 됐고, 오직 그 권력은 자신을 위해서만 쓰게 됐으며, 이제 양들의 울음소리는 듣지 못하게 됐습니다.

한니발 렉터는 범죄자라기보다는 이 세계를 지배하는 다른 한 축으로 여겨집니다. 영화에서는 식인습관을 가진 매우 차갑고 능력 있는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그는 모순된 모습을 갖고 있는 악마의 전형에 가깝고, 이 세계는 어떤 면에서 악마의 지배를 받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악마는 ‘권력’을 인간에게 쥐어주면서 인간으로부터 순수하고 자비스러웠던 영혼을 빼앗아가는 것입니다. 클라리스가 그의 도움을 받아 성공가도를 달리게 되고 그러면서 양들의 울음소리를 듣지 못하게 된 것처럼.

그래서 불교에서는 고통을 깨달음의 중요한 방편으로 삼았습니다. 고통은 또한 타인에게 공감하는 능력을 키우고 자비심을 키워줍니다. 부처님께서는 물론 수자타가 준 유미죽을 먹고 중도를 주장하셨지만 이전의 부처님은 직접 ‘그 누구도 결코 경험하지 못한 고통을 체험했다’고 하셨습니다. 고통 또한 깨달음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읽을 수가 있는 부분입니다. 약자의 전유물인 고통이야말로 인간에게는 깨달음의 한 방편이자, 타락으로부터 인간을 지켜주는 방편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김은주 |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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