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청도부(鏡淸道怤, 864~937)선사는 속성이 진(陳)씨이며, 온주(溫州)의 영가(永嘉)출신이다. 6세에 출가하여 개원사(開元寺)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온주는 오늘날의 절강성(浙江省)으로서, 영가는 영가현각(永嘉玄覺, 665~713)의 고향이기도 하다. 제방을 행각하다가 후에 설봉의존(雪峰義存, 822~908)에 참학하여 그의 법을 잇게 된다. 《조당집》에는 설봉의존과의 만남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경청이 설봉을 찾아가니 설봉이 고향을 물었다. 그래서 영가라고 대답하니 설봉이 다시 묻기를 “그렇다면 일숙각이 그대 고향사람이 아닌가?” 했다. 경청이 “그 일숙각이라는 이는 어디 사람입니까?”되물으니 설봉이 말했다. “이 놈은 몽둥이로 얻어맞기 딱 좋지만 우선 놓아주노라.”

일숙각(一宿覺)이란 영가현각을 가리키는 것으로, 현각이 육조혜능을 뵙고 인가를 받은 후에 하룻밤을 묵었기 때문에 일숙각이라고 한다. 경청의 기개를 높이 산 설봉은 참학을 허락하였는데, 설봉휘하에서 오랫동안 단련하였다. 《조당집》에는 또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한다.

경청이 설봉에게 물었다. “예로부터 조사·대덕들은 마음으로서 마음을 전하신 것이 아니었습니까?” 그러자 설봉이 대답했다. “그냥 문자나 어구를 세우지 않았을 뿐이다.” 경청이 “문자나 어구를 세우지 않았다면 스님께서는 어떻게 전하시겠습니까?” 물으니 설봉은 양구(良久)하였다.
예로부터 선종에서는 ‘이심전심 불립문자 직지인심 견성성불(以心傳心 不立文字 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고 한다. 즉 경전이나 어록 등 문자를 세우지 않고 바로 마음[본성]을 깨닫는 것을 선의 본령으로 한다. 불립문자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가를 두고 여러 주장이 있는데, 어떤 사람들은 ‘불립문자란 경전이나 어록을 편찬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문자에 집착하지 않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밖에서 껍질을 깨주십시오"
 "살아남을 수 있겠느냐?"
 "살아남지 못한다면 비웃음을 살 것입니다"
 "참으로 촌놈이구나!"

사실 불립문자를 추구하는 선종에서도 수많은 어록이나 등사가 편찬되어 왔다. 《벽암록》이니 《종용록》이니 하는 공안집을 비롯해서 《경덕전등록》·《오등회원》등 수많은 문자가 세워져 왔던 것이다. 사실 선어록이 이렇게 많이 간행된 것은 중국 송대 이후의 일로서 인쇄술의 발달에 의한 것이다. 송대에 이르러 목판인쇄술이 발달됨으로 인해 경전이 대량으로 인쇄·유통되기 시작하였는데, 처음에는 주로 대장경이 인쇄되다가 나중에는 개인의 어록과 문집 등도 간행되기 시작하였다. 우리나라의 팔만대장경이 간행된 것도 이러한 동아시아 인쇄술의 영향이다. 나아가 오늘날 한국과 일본에 남아있는 선이 주로 송대(宋代)의 선을 기반으로 한 것도 이러한 이유이다. 한국은 대혜종고(大慧宗杲, 1089~1163)를 중심으로 한 간화선이 주류이고, 일본은 영평도원(永平道元, 1200~1253)을 중심으로 한 조동종이 주류이다. 간화선은 보조지눌이 대장경을 통해서 전해진 대혜종고의 어록을 읽음으로서 우리나라에 처음 전해졌으며, 일본의 조동종도 도원이 송에 유학함으로서 비로소 시작된 것이다. 따라서 한국과 일본의 선이 송대선을 기반으로 한 이유는 송대에 발달된 인쇄술로 인한 전적의 유통에 말미암는다고 해야 한다.

▲ 삽화=장영우 화백

설봉에게서 인가를 받은 경청은 월주(越州, 오늘날의 浙江省 紹興)에 경청사(鏡淸寺)를 세우고 제자들을 지도하였다. 《벽암록》에는 경청과 관련된 공안이 2개 존재하는데 제16칙과 제46칙이 그것이다. 우선 《벽암록》제16칙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막 입실한 신참스님이 경청선사에게 말하기를 “저는 안에서 껍질을 쪼을 테니[啐], 스승님께서는 밖에서 껍질을 깨 주십시오[啄].” 그러자 경청이 “살아남을 수 있겠느냐?”말하니 신참스님이 “만약 제가 살아남지 못한다면 사람들의 비웃음을 살 것입니다.”했다. 경청이 말했다. “참으로 촌놈[草裏漢]이로구나.”

줄탁동시(啐啄同時)란 ‘병아리가 태어날 때 안에서 부리로 껍질을 쪼는 것을 줄이라 하고, 밖에서 어미가 껍질을 깨는 것을 탁’이라 한다. 선에서는 스승과 제자가 기연이 맞는 것을 비유한다. 줄탁동시는 원래 중국의 민간에서 사용되던 말이었는데, 《벽암록》에 등장함으로 인해 널리 사용되게 되었다. 어쨌든 신참승려는 경청선사에게 잘 지도해 줄 것을 부탁한 셈이다. 그런데 어미가 밖에서 껍질을 쫄 때 잘못하면 새끼의 목숨도 위험한 법이다. 그래서 경청은 ’살아남을 수 있겠느냐?‘고 했던 것이다.
한편 《벽암록》제 46칙은 ‘경청우적성(鏡淸雨滴聲)’으로서 《조당집》에도 실려 있다. 그것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문 밖에 무슨 소리냐?"
 "비오는 소리입니다"
 "사물만을 좇고 있구나"
 스스로 무심의 경지 깨달아

어느 비 오는 날 경청이 옆에 있던 제자에게 물었다. “문 밖에 무슨 소리냐?” 그러자 제자가 답하길 “비 오는 소리입니다.”했다. 경청이 “중생이 전도하여 자기를 잃고 사물을 좇는구나![衆生顚倒 迷己逐物].”말하니 제자가 듣고서 “스님은 어떠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경청이 “자칫하면 나도 자신을 잃을 뻔 했다.”하니 제자가 “자신을 잃을 뻔 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되물었다. 이에 경청이 말했다. “해탈하는 것은 도리어 쉽지만,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은 어렵다.”[出身猶可易, 脫體道還難]

이 문답의 전반부는 어렵지 않다. 그런데 마지막에 경청의 말 ‘해탈하는 것은 도리어 쉽지만,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은 어렵다’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필자 나름의 해석을 시도해 본다. 우선 비 오는 날 경청이 ‘무심(無心)하게’ 자신을 시봉하고 있던 제자에게 물었다. ‘밖에 무슨 소리냐?’. 그러자 역시나 무심하게 제자가 답한다. ‘비오는 소립니다’. 이때 경청은 일순 깜짝 놀라면서 깨달았다. ‘아아! 중생이 전도하여 자기를 잃고 사물을 좇는구나!! [衆生顚倒 迷己逐物]’. 이 구절은 원래 《능엄경》권7의 ‘모든 중생들이 한없는 예로부터 자기를 잃고서 사물로 삼고, 본심을 잃고 사물에 전도된다[一切衆生 從無始來 迷己爲物 失於本心 爲物所轉]’에서 유래한 것이다. 종래의 해석에서는 ‘중생이 전도하여 자기를 잃고 사물을 좇는구나’를 제자를 질책한 것으로 해석했지만, 필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때의 중생이란 경청 자신을 말한다. 제자의 ‘비오는 소립니다’는 말을 듣고 경청은 문득 깨달았던 것이다. ‘아아! 《능엄경》에서 그렇게 강조하고 있건마는 이렇게 중생은 자기를 잃고 전도되는 구나!’. 그렇기 때문에 뒤의 구절 ‘자칫하면 나도 자신을 잃을 뻔 했다’는 대답이 나온 것이다. 비 오는 소리를 듣고 있던 경청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소리에 끌려가고 있었다. 그래서 제자에게 ‘무슨 소리냐?’하고 물었는데 제자는 무심하게 ‘비오는 소립니다’하고 답한다. 그 말에 불현듯 경청은 깨달았던 것이다. ‘아아! 자칫하면 내가 자신을 잃을 뻔했다’는 것을.


그런데 ‘자신을 잃을 뻔 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고 묻는 제자에게 경청은 ‘해탈하는 것은 도리어 쉽지만,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은 어렵다’고 답한다. 탈체(脫體)라는 것은 ‘당체(當體)’ ‘총체(總體)’와 같은 말로 ‘있는 그대로’ ‘남김없이’의 뜻이다. 즉 깨달음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는 말이다. 제자의 ‘비 오는 소립니다’는 말에 불현듯 깨달았지만, 그것을 객관화해서 표현하는 것은 깨달음 그 자체보다 더 어렵다는 의미이다.
한편 《조당집》에는 다음과 같은 문답도 전해진다.

어느 날 제자가 묻기를 “어떤 것이 문수의 검[文殊劍]입니까?” 이에 선사가 찌르는 시늉을 하니 제자가 다시 물었다. “그 검에서 살아남는 자가 있으면 어찌합니까?” 경청이 “살아남기 힘든 길이었는데, 정녕 그렇다면 크게 두려워해야 한다.”하곤 다시 말했다. “그렇게 놀랄 것은 없느니라.”

문수검이란 문수장검(文殊仗劍)이라고도 하는데, 《보적경(寶積經)》권 105에 의하면 석가모니가 계율에 대해 강조하자 제자들이 그 말에 집착하여 죄의식에 사로잡혀 번뇌하고 있었다. 이를 보다 못한 문수보살이 칼을 들고 석가모니를 죽이려고 했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한다.

-동국대학교학술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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