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납사니와 사시랑이
 우대되는 종단풍토
 악취만 진동할 뿐

‘조용한 혁명’이란 말이 있다. 미국의 저명한 학자인 로날드 잉글하트가 한 말인데 그는 삶의 질을 중시하는 가치관의 변화과정을 ‘조용한 혁명’이라고 불렀다. 로날드 잉글하트는 “최소한의 경제적 육체적 안전이 존재하는 경우에는 사랑, 존경에의 욕구가 점차로 뚜렷해지고, 그 다음에는 지적·심미적 만족이 중심적인 중요성을 갖게 된다.”고 했다.

세계인류의 행복지수가 높아지지 않는 이유는 사랑과 존경의 욕구가 뚜렷해지는 인간들의 존재를 충족해 줄 인물들이 너무 빈약할뿐더러 감동이 없는 삶의 연속성 때문이 아닐까. 세계는 수없이 많은 인물과 사건들을 쏟아내고 있지만 충격과 놀라움만 있을 뿐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키지 못하고 있다. 왜 그럴까?

단언적으로 말하건대 수행이 없는 삶은 그 어떤 형태와 내용을 동반한다 하더라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경제인, 정치인, 작가, 교수, 사상가, 종교인, 성직자 등등. 제각각 자기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회자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이중 누가 얼마나 사람의 심금을 울리고 감동을 던져주는지는 의문이다.

오늘날의 현대인들은 성직자의 신분이라 하여도 고운 눈길을 보내지 않는다. 모순과 가식을 함께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재 한국불교에 쏟아지는 국민의 눈길도 걱정이 가득하다. 이러한 따가운 눈길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불교 특유의 수행 분위기를 회복하는 길밖에 없다. 훌륭한 수행자가 많이 나올수록 그만큼 한국불교의 활력지수와 국민의 기대치는 높아진다. 수행자는 정·재·학계의 거목들과 분명히 대비되는 것이 있다. 그들은 물질을 탐하지도 않고 명예를 추구하지도 않으며 자신의 이름 또한 세상에 드러내길 꺼려한다.

수행자는 오직 세상사람들의 이로움을 위해 자신과 자신의 에너지를 연소시키는데 몰두하기 때문이다.

단득본막수말(但得本莫愁末)이니 여정유리함보월(如淨瑠璃含寶月)이고
기능해차여의주(旣能解此如意珠)하니 자리이타종불갈(自利利他終不竭)이로다.
근본만 얻을 뿐 끝은 근심치 말지니 마치 깨끗한 유리가 보배달을 머금음과 같고, 이미 이 여의주를 알았으니 나와 남을 이롭게 하여 다함이 없도다.

영가 스님의 <증도가>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무릇 진정한 수행인은 중생의 마음을 읽을 줄 안다. 그렇기 때문에 근본을 해결하는데 주력하지 곁가지나 끝은 굳이 근심하지 않는다. 여의주란 말 그대로 ‘뜻하는 대로 이루어지게 하는 구슬’이다. 수행인은 여의주를 항상 옳게 수용하여 쓸 줄 앎으로써 모든 중생을 이롭게 한다. 그것은 모두 수행의 힘에서 나온다.

그러나 한국불교의 현실은 수행의 힘을 잃은 지 오래다. 해인총림은 방장과 주지 선출에 있어서 금품거래가 폭로되고 봉선사는 특정인사의 권력장악에 절도와 편취가 용인되고 있다. 더 충격적인 일은 총무원장의 문중본사인 용주사 주지가 처자식을 거느린 처사로 확인됐다는 전언이다. 총무원장을 측근거리에서 보좌하는 사서실장은 사음과 은처 의혹을 받고 있다. 총무원장 또한 범계의 중심인물로 지목되고 있는 딱한 현실이다. 종단의 지도부가 온통 수행과는 거리가 멀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종단의 지도자들에게 수행자의 향기를 맡을 수 없다는 것은 모든 불자들의 불행이다. 가납사니와 사시랑이 승려들이 우대되는 종단은 악취만 진동할 뿐이다. 25일 불교광장 초선의원들이 영담 스님을 상대로 가진 기자회견은 이를 잘 보여주는 현장이 아닐까? 28일 하안거 해제일을 앞두고 떠오른 단상이다.

-본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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