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두 눈이 있어 사물을 보고 판단합니다. 이것을 육안(肉眼)이라 하지요. 이로써 생각하고 아는 것은 주관적입니다. 그러나 신통의 천안(天眼)은 보다 넓게 두루 보고 보다 객관적이 될 수 있습니다. 나아가 지혜의 눈, 이른바 혜안(慧眼)은 껍데기 아닌 속 알맹이의 본래 모습을 꿰뚫어 알지니 보다 수승하다 하겠습니다. 나아가 법안(法眼)이나 불안(佛眼)은 더 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평범한 중생들은 자기 견해가 잠재의식 속에 이미 고정화 되어 있어서 달면 삼키고 쓰면 내뱉는 식의 틀에 익숙하게 길들여져 있습니다. 이를 깨부수고 열린 범주로 나아감이 그리 쉽지가 않지요. 저도 지금까지 오랫동안 최선을 다했지만 돌이켜보면 모두 내식 이외는 없었습니다. 남과 더불어서 보다 성숙된 해결책을 도모하는 것 아닌 ‘독불장군’ 방식의 나의 구미를 고집하여 무진 애를 쓰고 경주해 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전통적인 불교의 경우를 살펴보면 제방(諸方)의 인가를 소중히 하고 다른 납자(衲子)나 노화상의 비웃음을 두려워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한 마디 하고 염(拈)이나 송(頌)을 할 때 객관으로 통용될 수 있는 지견(智見)을 높이 산 흔적이 엿보이는 것입니다. 우리의 불사(佛事)나 스님의 행보(行步) 일체가 자기 나름대로의 소견(所見)을 넘어서 전체 절집에서 찬탄하고 기뻐할 수 있는 대한불교의 풍토를 간곡히 앙망하는 바입니다.

불법은 이욕(離欲)을 말하고 있는데, 마치 세상 살만큼 다 살고 병석에 누워 있는 늙은이가 보듯, 모든 허망한 유위법에 욕심 다 버리고 부질없는 허영과 명리(名利)도 그만 둔 빈 마음으로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우리 불교의 본마음을 생각해 봅니다.

절에서 평생 공부하며 살아가는 스님네들은 공인(公人)이라 할 수 있는데 자기가 생각하는 자기도 있지만 남이 생각하는 면도 함께 합니다. 갖가지 인연 또한 세상에 바쳐서 떳떳할 수 있는 부끄럼 없는 자아라면 그 무엇에 두렵겠습니까? ‘바른 견해’에 힘입어 전도된 몽상(夢想)을 벗어나 미소 지을 수 있는 참 불자 되기를 기원하는 바입니다.

나무는 보고 숲은 보지 못하는 것도 있고, 손가락만 보고 하늘의 달을 외면하는 경우도 있겠으니 그 현상 너머의 본질에 눈 뜨고 나면 본래 별 것도 아닌 것을 괜히 말이나 꼴에 떨어져서 본래 면목을 외면하고 바보처럼 중생 놀음에 놀아난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먹물 옷을 입은 스님이라 해도 가진 것이 많고 외제차를 타고 다닌다고 부러워할 것이 없음이니 이는 인과에 의하여 시은(施恩)이 두터워지는 것일 뿐 실상은 겉모습과는 다른 것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부터 절에서는 검소하게 겉으로는 누더기 헤진 옷을 입고 거친 밥을 먹고 있어도 마음 광명이 찬연한 눈 밝은 스님들을 우대하여 왔던 바입니다. 옛 시인 중 ‘껍데기는 가라’를 말하신 분도 있는데 왜 우리 불자들이 허상에 연연하여 참된 성품을 저버리고 세간적인 탐욕에 속아 사는지 부처님 법에 귀의한 입장에서 우리는 깊이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은 보다 큰 것, 나은 것을 갈망하지만 부처님 법은 불이문(不二門)에 들어 평등이요, 무자성의 연기(緣起)일 따름. 그 공성을 철저히 인식하여 놓아버릴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하겠지요. 하나의 방편에 불과할진대 내 차가 그대 차보다 못하다 하여 마음 상하지 않고 빙그레 웃을 수 있는 우리 불자들 얼마나 멋있을까요. 중요한 건 운전하는 사람이 누군가 그것이지요. 법당은 그럴 듯한데 부처가 영험이 없다면 그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지혜의 눈으로 보면 세상이 분명 살 만할 터인데 어리석어 그렇게 힘든 것 아닐까요. 그렇게 오래도록 마음 쓰며 전전긍긍하던 것이 알고 보니 자기 탓이지 결코 바깥 그 무엇이 문제가 아니었더라. 미혹하면 중생이지만 깨달으면 부처라는 그 가르침이 정말 절실히 와 닿는 오늘입니다.

옛 선사들께서 주장자를 눈 달린 용에 비유하시고 법상을 치시며 사자후를 하셨는데 과연 사자새끼가 어찌 여우를 무서워하겠습니까. 절 공부하면서 갖가지 생각에 놀아나 허우적거리다가 늪을 벗어나 한 번 웃고 보니 비로소 허공 꽃 눈병 나은 사람처럼 세상을 힘껏 활보할 수 있겠지요. 선(禪)은 깨달음이니 자기 살림이라 참 재산이 옳겠습니다. 여름이 지나면 가을이 오는 것도 자연일지니 그 어찌 마다하겠습니까. 미소 짓는 우리 불자님네 참 아름답습니다.

정광현 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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