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C대학 박 교수의 초대로 한 작가모임에 참석을 한 적이 있다. 박 교수는 인사말을 꺼내는 가운데 김춘수 시인의 시, <꽃>을 각색해 입에 올렸다. 그가 패러디한 내용은 이렇다.


김춘수의 <꽃> 둘째 연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내가 그를 인정해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친구가 되었다.‘로 바꾸어 불렀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그에게로 가서 나도/그의 꽃이 되고 싶다>는 원래 시 구절은 ’내가 그를 인정해주어 그가 나에게로 와서 친구가 되었듯, 누군가 나를 인정해주오. 나도 그에게로 가서 그의 친구가 되고 싶다.‘로 각색을 했다.

그럴 듯했다. 꽃을 대상으로 삼은 시다. 하지만 시가 노래하는 내용은 꽃의 이름을 빌려 ‘관계 혹은 관계성’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거라 본다. 관계를 보다 근원적 관점에서 보려는 의도의 서정적 표현일 것이다. 시인은 사물과의 관계를 순수 감각의 관계로 환기를 시키는 가운데 진정한 소통이 이뤄질 수 있다는 함의도 전하려 했을 것이다.

이 시에서 소통을 뜻하는 말로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나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라는 말에서 알 수 있다.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은 그의 <존재>를 온전히 알아달라는 말이고 반대로 그가 이쪽에서도 필요하다는 요청의 목소리다. 사물에 이름을 붙이는 순간, 그 이름은 자기의식에서 그 이름에 상응하는 어떤 가치로서도 자리매김을 하게 될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나’라는 것은 ‘너’라는 상대가 있어야 ‘나’로서의 존재 혹은 의식이 있게 된다. ‘나’가 없으면 ‘너’ 혹은 ‘그것’이란 것도 있을 수가 없다. ‘나’와 ‘너’는 같은 입장이지만 상대적 세계이므로 나와 너라는 구분이 지어진 것이다. 이런 구분들이 연이어지게 되면서 만물은 각자 드러난 그 모양과 성질에 따라 여러 다른 이름들이 붙여지게 된 것이리라.

근원적 입장에서 보자면, 만물은 하나의 뿌리에서 길러져 나왔는데, ‘나’가 ‘너’에게 이름들을 붙여줌으로서, 개체들은 개체들로서 서로 인정을 받게 된 것이다. 아울러 개체 고유의 특징이나 위치성도 부여받게 된 것이다. 만물의 근원이 하나임은 생명의식이 같다는 소리이고, 모두에게는 각기 똑같은 불성이 내재돼 있다는 소리와 같은 맥락이다. 그리 보면 사물이나 인간은 다 서로에게 ‘친구’로서 서로를 ‘인정’할만한 매우 신성한 존재들임이 자명해진다. 인정이란 이처럼 내가 ‘있음’이란 의식에서 비롯되는, 본원적인 영적 욕구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해서 박 교수의 패러디는 패러디가 아니었고, 차라리 김춘수의 시에 이런 식의 ‘직설적’ 해석을 내놔도 별반 모자랄 게 없다는 하나의 감상평이다.

심리학 일반에서는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어머니로부터 꾸준히 따듯한 보살핌을 받아야 제대로 성장할 수 있다고 말한다. 성장과정에서 어머니는 아이에게 조건 없는 순수한 애정의 마음을 지니고 돌보게 된다. 임신 중 태아는 어머니와 하나였다. 태아로서는 ‘나’라고 하는 의식이 없었다. 하나 태어난 후 유아는 타자로부터 보살핌을 받는 가운데, 점차 자타의 존재를 지각하기 시작한다. 어머니는 유아에게 이름을 불러준다. 어머니 역시 유아에게 자신을 “엄마/맘마”라고 소개 한다. 서로에게 이름 불리어 짐이 자주 오가게 된다. 점차 발달해가는 오감을 통해 유아는 개체로서의 의식이 자리 잡게 될 것이다. 모자 관계에서도 보듯 모자는 원래 하나의 몸이었으나 이제 두 개의 몸으로 나누어졌다. 이름을 불러줌은 상대의 세계에서 내가 ‘있음’을 환기시켜주는 하나의 창조 행위다. 요컨대 인간에게 본유한 인정 욕구란 이렇듯 아름답고, 신성한 순수 의지/의식의 반영이라 본다.

하지만 주위에서 우리는 이런 인정 욕구의 왜곡 현상을 허다하게 목도하고 있다. 거짓을 일삼고 허욕을 부리며 부와 권세에 집착 하는 일이나 명예욕에, 공명심에 들떠 사는 삶이 수두룩하다. 소위 인정 중독의 현상이다. 제가 ‘있음‘을 잊고,‘소유’를 통해 제가 있음을 가장 내지 과장을 하며 지냄은 일종의 에고 중독현상이다. 한번 ‘크게 죽어봐야’ 치유에의 희망을 걸어 볼 만 하리라.

-시인 · 정신건강의학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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