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불교조계종 전 총무원장 의현 스님에 대해 재심호계원이 1994년 체탈도첩(멸빈)의 징계를 철회하고 공권정지 3년을 결정하자 종단 안팎이 시끄럽습니다.

의현 스님의 멸빈이 풀린 것에 반대하는 단체와 인사들은 “개혁정신을 망각한 판결”이라며 일제히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또한 “1994년 개혁종단 이전으로 돌아간 것과 진배없다”고 비난하며 호계원장과 재심호계위원 전원 퇴진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94년 불교개혁정신 실천을 위한 비상대책회의’가 6일 출범했습니다. 참여불교재가연대, 바른불교재가모임 등 11개 단체가 연대한 모임입니다. 이들은 재심판결이 불법으로 이루어진 사법부의 폭거라는데 의견을 같이 하고 원천 무효화를 위해 투쟁에 나설 것이란 전언입니다.

조계종 일반직 종무원조합도 8일 성명을 내고 “재심호계원의 이번 판결은 1994년 4·10 승려대회와 개혁회의 정신을 고려하지 못한 결정”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들은 “재심판결문제를 종헌 종법과 종도들의 공의에 따라 공명정대하게 처리해 주시기를 요청한다”며 “우리는 종단개혁의 정신을 계승하고 종헌종법을 수호하기 위해 신심과 원력으로 정진하겠다”고 했습니다.

94년 개혁종단을 이끈 실천불교전국승가회도 같은 날 오후 백양사에서 긴급 임시총회를 갖고 △의현 전 총무원장 재심 결정 전면 무효화 △호계원장과 재심호계위원 참회 및 전원 사퇴 △94년 징계자 문제 해결을 위한 특별법 제정 등을 결의했습니다. 이와 함께 실천불교전국승가회 회장 퇴휴 스님은 “94년 개혁을 계승하려는 이들과는 누구와도 연대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재심호계원의 이번 판결이 94년 개혁세력들의 분노를 사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종도들의 여론 수렴과정도 없었습니다. 법도 무시했습니다. 누구보다 먼저 계법존숭의 모범을 보여야 할 호계위원들이 종헌과 종법을 위배했습니다. 종헌 제128조는 징계를 받은 자에 대한 사면 경감 복권 등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멸빈자는 제외한다고 분명하게 적시하고 있습니다. 호계원법 제52조는 일사부재리의 원칙을 내세워 “이미 심판을 거쳐 확정된 사건에 대하여는 다시 심판을 청구할 수 없다”고 돼있습니다. 의현 스님의 멸빈 건은 애초 심판의 대상이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재심호계원은 심리를 개시했고 당일 공권정지 3년으로 심판 결정을 내렸습니다. 심리와 심판을 한 날 한 시 한 자리에서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동시에 진행했습니다. 호계원장 자광 스님은 8일 원로회의에 참석해 의현 스님의 심판 배경에 대해 4곳의 법률 로펌으로부터 자문을 받은 사실을 들었습니다. 만일 자광 스님의 말마따나 사회법으로 따진다면 그간 호계원에서 이루어진 대부분의 징계사건들은 원점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하여튼 의현 스님은 재심호계원의 판결로 승적을 다시 회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요? 더욱이 의현 스님은 94년 개혁종단의 반대를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이를 살렸을 때 지금처럼 종도들의 강력한 저항에 부닥칠 것을 예상하지 못했을까요? 충분히 알았습니다. 그러나 대수로이 여기지 않았습니다. 왜? 현 권력에 맞설 자가 없다는 것을 그 또한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제 그렇게 상황은 전개되고 있습니다. 한 물 간 옛 권력 의현 스님에 대해 열화같은 비난이 쏟아져도 정작 이 상황을 만든 현 권력 자승 스님에겐 누구 하나 입도 벙긋 못합니다. 재심호계원이 자승 총무원장의 뜻과 별개로 의현 스님을 풀어주었다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의현 스님 재심판결에는 종단 최고 권력자의 의중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호계원은 개혁정신을 망각했다는 지적뿐 아니라 삼권분립 정신도 지키지 못하고 있는 신세입니다. 권력의 시녀로 행세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증거는 <법인관리 및 지원에 관한 법>으로 인해 호계원에서 멸빈의 징계를 받은 선학원 이사장 법진 스님을 포함한 4인의 임원진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당시 초심호계원장은 선학원 이사장 멸빈 건과 관련해 징계 사유를 묻자 “내가 뭘 알아. 난 시키는대로 했을 뿐이다”고 증언합니다. 멸빈 징계를 받은 선학원 임원진은 범계를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는 권승들과 달리 포교를 열심히 하고 있는 스님들입니다. 이들의 멸빈은 호계원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현 권력이 안긴 폭력에 다름 아닙니다.

조계종단이 사법행정을 얼마나 가벼이 여기는지는 이후의 상황에서도 충분히 읽혀집니다. 선학원정상화추진위원장 법등 스님은 호계원장을 재임한 인물입니다. 그는 선학원 임원진에 대해 특별재심을 통해 구제하겠다며 대화를 제의해 옵니다. 자승 총무원장도 최근 자신이 멸빈 시킨 선학원 임원진에게 같이 점심을 먹으며 <법인법>을 놓고 대화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과연 종단 사법부에서 행해지는 멸빈이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 의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솔직히 말하건대 이번 의현 스님에 대한 재심판결을 놓고 개혁정신을 상실한 것이라고 주장해서는 안 됩니다. 각종 비리와 범계도 모자라 사법부에마저 권력의 횡포를 자행하고 있는 현 자승 총무원장 체제가 출범한 것 자체가 이미 개혁종단의 실패로 봐야 하고 개혁정신의 실종으로 봐야 옳습니다. ‘자승 권력’을 만들어내는 데 자칭 94년 개혁세력도 큰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진심어린 성찰이 요구됩니다.

어쨌든 옛 권력인 의현 스님의 과거 비리를 다시 들춰내 그를 공격하는 것은 올바른 처신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사단을 만든 현 권력을 향해 맞서야 개혁정신의 의미를 되새기는 일이 아닐까 여깁니다. 백번 승려대회를 연다한들 범계와 비리는 용서되고 열심히 포교하는 스님들에겐 멸빈의 징계가 가해지는 종단을 바꾸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하는 말입니다.

개혁정신의 올바른 계승은 부도덕한 종권에 맞서 싸울 때 가능합니다. 실제 94년 개혁종단이 그렇게 태어났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될 것입니다.

-본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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