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씨 인사이드(The Sea Inside)>의 주인공 라몬 삼페드로(하비에르 바르뎀)는 정말 죽고 싶어 했습니다. 그의 상황을 보고 나니 그 마음이 이해가 갔습니다.

라몬은 28년째 침대에 누워있습니다. 목을 기점으로 해서 아랫부분은 전혀 움직일 수가 없어 배변도 형수의 도움을 받아야 했고, 먹을 때도 누가 먹여줘야 하고, 일상생활의 대부분을 타인에게 의존해야 했습니다. 이런 상태로 그는 28년을 살아왔던 것입니다.

이렇게 사는 것은,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지킬 수 없는 삶이라고 라몬은 생각했습니다. 그는 이 삶을 끝내고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머리 말고는 움직일 수 없는 몸으로는 죽고 싶어도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었습니다. 죽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데, 만약 그 누군가가 그가 죽도록 도움을 준다면 비록 죽은 사람의 의지에 따라 죽였다 하더라도 살인죄를 면하기는 어렵습니다. 방법은 한 가지 뿐이었습니다. 나라로부터 ‘안락사’를 허락받는 것입니다.

<씨 인사이드>라는 스페인 영화의 기본구조는 매우 단순합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라몬이라는 주인공이 과연 나라로부터 안락사를 허락받을 수 있을까’ 입니다. 현재 스위스, 네덜란드 등 몇 나라를 제외하고 대부분 나라는 안락사를 허용하지 않고 있는데 스페인에서도 안락사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안락사를 허락받는 것은 법률을 수정해야 하는, 대단히 어려운 일인 것입니다. 영화는 라몬이 안락사 옹호 단체의 도움을 받아 국가를 상대로 투쟁을 벌이는 것이 기본 골격입니다.

그렇지만 영화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스페인을 대표하는 감독인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 감독은 ‘안락사’라는 민감한 문제를 다루면서 ‘죽음이 과연 인간의 권리인가’라는 다소 철학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있으며, 이 문제를 인본주의적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는데 상당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라몬과 마찬가지로 몸이 불편한 어떤 신부와의 토론은 이 문제를 명료하게 보여주었습니다. 라몬의 뉴스를 접한 신부가 라몬을 설득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휠체어가 계단을 올라갈 수 없어 라몬은 2층 자기 방에 누워 있고, 신부는 아래층 휠체어에 누워서 열띤 토론을 했습니다.

신부 : 우린 영원 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삶은 우리의 소유가 아닙니다. 사유재산이라는 개념은 우리를 어리석은 극단에 빠지게 합니다.

라몬 : 미치겠네. 사유재산을 제일 먼저 세속화한 게 교회라는 것도 모르오? 교회가 죽음의 공포를 조성하는데 왜 그렇게 열을 내는데, 사후 세계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면 고객이 다 떨어진다는 걸 알기 때문이야.

신부 : 선동 얘기를 꺼냈으니 말인데, 친애하는 라몬, ‘존엄 있는 죽음’을 말하는 게 진짜 선동적이라고 생각되지 않소?

라몬 : 당신이 속한 단체는 사형을 인정하고 지난 수세기 동안 사람들을 이단으로 몰아 화형 시켰소. 날 어떻게 처리할 거요? 산채로 화형 시키시오. 자유를 변호했으니 화형 시키시오.

신부 : 라몬, 내 친구여! 삶을 배제한 자유는 자유가 아니오.

라몬 : 자유를 배제한 삶도 삶이 아니오.


신부의 말인즉, 태어날 때 우리 의지로 태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죽을 때도 우리 마음대로 죽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삶과 죽음을 주관하는 것은 인간의 권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라몬은, 인간에게는 자유로울 권리가 있으며, 자신이 죽음을 택하는 것은 자유로울 권리를 되찾는 것이라는 말로 서로 팽팽하게 맞섰습니다. 신부는 신의 입장에서 말하고, 라몬은 인본주의적 관점에서 말했습니다.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했습니다. 라몬 삼페드로 카메안이라는 실존 인물을 소재로 했습니다. 라몬 삼페드로 카메안은 《죽음은 내게 주어진 마지막 자유였다》라는 책을 통해 ‘삶의 주인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에게는 스스로 떠날 날을 택할 권리가 있다’는 주장을 했는데, 영화는 그의 주장을 그대로 전달했기 때문에 ‘안락사’를 옹호하는 기본 틀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영화는 라몬 삼페드로 카메안의 의지를 반영해서 죽음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마지막 자유라는 생각에서 만들어졌기에 다른 일체의 설득도 거절하는 편입니다. 영화를 보면 죽음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모두 위선자로 느껴지고, 안락사에 동조하는 사람들은 진실한 사람들로 여겨지는 편협함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신부의 주장이 그렇게 궤변으로 비쳐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라몬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스페인은 국민 대다수가 가톨릭인 나라로, 앞에서 신부가 했던 주장이 지배적인 나라입니다. 안락사는 인간 스스로의 살인을 의미하는 것이고, 살인은 가톨릭의 기본 계율인 ‘살인하지 말라’에 위배되므로 절대로 안락사가 허용될 수 없었습니다. 라몬의 소송은 계란으로 바위치기였습니다.

그런데 라몬에게 구원의 여인이 찾아왔습니다. 그녀는 로사 라는 여자로 통조림 공장에서 일하면서 두 아들을 키우는 미혼모인데 그녀는 고단한 삶을 살면서 우연히 알게 된 라몬에게서 삶의 희망을 찾았습니다. 그래서 힘겨운 날이면 더 자주 라몬을 찾게 됐고, 라몬과 얘기를 나누면서 삶의 생기를 얻어가곤 하다가 마침내 라몬을 사랑하게 됐습니다.

로사는 자신을 위해서라도 살아주면 안 되겠냐고 애원을 하기도 했지만 그녀는 라몬의 고통을 충분히 공감하기에 라몬의 안락사를 도와주기로 했습니다. ‘안락사’만이 라몬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고, 라몬을 사랑한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라몬을 죽도록 도와준 것은 그를 진정으로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에서 충분히 공감이 갔습니다. 만약 키우는 강아지가 엄청난 고통을 주는 병에 걸렸다면 안락사를 허용할 것 같습니다. 강아지를 너무 많이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살생을 지시했다는 오명을 쓸 수 있고 또, 일말의 죄책감 같은 것도 안게 되겠지만 강아지를 위해서라면 안락사를 통해 고통에서 구해줄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로사의 도움으로 마침내 라몬은 그렇게 원하던 죽음을 맞게 됐습니다. 죽으면서 나타난 화면은 바다였습니다. 바다는 라몬에게는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구속과 자유. 라몬은 바다에서 다이빙을 하다가 목뼈가 부러지면서 전신불수가 돼 침대에 묶여 있어야 했지만 이전의 바다는 그에게는 자유를 의미했습니다. 사고가 나기 전에는 배 수리공으로서 배를 타고 세계를 마음껏 누볐던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으로써 마침내 자유를 되찾고 바다를 떠돌고 있는 것입니다.

라몬 삼페드로 카메안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씨 인사이드>를 비롯해서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밀리언달러 베이비>와 인도영화 <청원>, 그리고 130명의 환자를 안락사 시킨 의사 잭 케보디언의 실제 얘기를 다뤘던 <유 돈 노우 잭(You Don't Know Jack)>을 비롯한 많은 영화들이 스크린을 통해 ‘안락사’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안락사는 허용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불교에서는 이 문제를 어떻게 볼까요?

부처님 시대에도 라몬의 처지와 비슷한 경우가 있었습니다. 병든 한 비구가 있었는데 그는 죽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보살피던 다른 비구에게 자신을 죽여 달라고 했고, 간병을 하던 비구는 죽고 싶어 하는 사람의 요구를 들어주었습니다. 강아지의 안락사를 요구하는 주인과 같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친구의 고통을 한 시라도 빨리 없애주고자 하는 자비심에서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렇지만 부처님께서는 살인을 도운 비구에게 책임을 물었다고 합니다. 모든 생명은 존엄하기 때문에 함부로 살생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한 생명의 생사는 인연의 업에 따르기 때문에 제3자가 인위적으로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불교의 생사관은 연기론적 구조와 인연법칙으로써 해석되는 것이기 때문에 ‘안락사’는 인연법을 거스르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불교는 한 생(生)만을 다루고 있지 않습니다. 물론 불교의 기본 입장은 생사가 원래 없다는 것이지만 이를 완전히 깨닫기 전까지는 윤회의 수레바퀴 아래서 굴러야 하기 때문에 이번 생으로 모든 게 끝나는 것이 아닌 것이지요. 이번 생에 제대로 마무리를 짓지 못하면 그 업이 다음 생으로 이어지므로 주어진 업을 흔쾌히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 불교의 기본 입장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므로 불교적 관점으로 본다면 라몬은 침대 위에서의 삶에서라도 의미를 찾아내고 그 생이 다할 때까지 견뎌내야 했습니다.

김은주 |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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