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된 생각으로 일어나는 번뇌, 염루(念漏)와 생사

염루란 칠루(七漏)의 하나로, 중생들이 염혜(念慧)가 없어서 갖가지 번뇌를 내는 사념(邪念)을 말한다. 우리 중생들은 보고 듣고 맛보는 등의 대상들에 대해서 바른 지혜가 없으면 삿된 생각이 일어난다. 중생들이 그동안 익혀온 습성으로 바르게 보지 못하고, 바르게 듣지 못하고, 바르게 맛보지 못하는 등 바른 지혜가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잘못 보고 들음으로써 오온의 몸과 마음이 괴로움을 일으키는 삿된 생각들을 염루라고 한다. 그런데 이런 염루는 일종의 미혹한 생각이기 때문에 항상 몸〔身〕으로, 말〔口〕로, 생각〔意〕으로 끊임없이 업을 일으킨다. 잘못된 견해로 일으킨 삼업(三業)이므로 몸으로는 살생, 도둑질, 삿된 음행의 세 가지 업이 일어나고, 입으로는 망어(妄語), 기어(綺語), 양설(兩舌), 악구(惡口)의 네 가지 업이 일어나며, 뜻으로 탐내고, 화내고, 어리석음의 세 가지 업이 일어나 열 가지 악업〔十惡業〕을 일으키므로 악도의 행위를 하게 되는 것이다. 이 악업은 다시 그에 상응하는 과(果)가 발생하고, 그 과는 반드시 우리에게 직접·간접의 보(報)를 가져온다.

우리가 수없는 겁 동안 이 몸과 마음(오온)을 위하여 가지가지 나쁜 업을 지었고, 이로 인하여 생사바다에 헤매면서 삼악도의 고(苦)를 받으며 성문도(聲聞道), 연각도(緣覺道), 보살도(菩薩道)의 삼승(三乘)의 바른 길로부터 멀어지게 된 것이 모두 염루에서 비롯된 것이다.

경에서는 이 염루에 의한 생사고해의 삶을 다음과 같이 비유로 설명하고 있다.

어떤 임금이 네 마리의 독사를 하나의 상자 속에 넣어 두고 어떤 사람에게 기르게 하였다. 그런데 먹이를 주고 기를 때 항상 이 독사를 쓰다듬도록 하되, 만일 독사가 성을 내면 법으로 처형하겠다고 하였다. 이 일을 맡은 사람은 임금의 명령을 듣고는 공포를 느껴 상자를 버리고 도망치고 말았다. 이에 임금은 전다라 다섯 사람으로 하여금 칼을 빼들고 쫓아가 도망친 사람을 잡아오도록 하였다. 그 사람은 다섯 전다가라 쫒아오는 것을 보고 더욱 빨리 달아났다. 이때 전다라는 나쁜 방편으로 들었던 칼을 숨기고 은밀히 다른 사람을 시켜 거짓으로 친한 척하면서 달래 데려오도록 하였다. 그 사람은 눈치 채고 어떤 마을로 들어가 숨었다. 하지만 그 마을은 사람이 보이지 않고 숨을 만한 곳이 없는 페허였다. 이때 공중에서 이런 소리가 들렸다.

“가엾구나, 그대여! 마을은 비어서 사는 사람이 없고, 오늘밤에 여섯 도둑이 올 것인데 이들과 마주치면 어떻게 생명을 보전하겠는가?”

그 사람은 무서운 생각이 점점 더하여 마을에서 나와 도망치다가 이번에는 큰 강을 만났다. 물살은 급하고 배도 뗏목도 없었다. 너무 황망하여 나무와 수풀을 꺾어다가 임시로 뗏목을 만들어 타고 손발을 허우적거리면서 강을 건너 저쪽 언덕에 이르니 걱정과 두려운 마음이 없어지고 태연해졌다.


우리 중생도 이와 같아서 《열반경》을 받아 지녀 익히면 지(地)·수(水)·화(火)·풍(風)의 사대(四大)를 네 마리 독사가 든 상자와 같이 관한다는 것이다. 네 마리 독사는 보기도 독하고, 건드리는 것도 독하고, 기운도 독하고, 물리는 것도 독하듯이 중생들의 사대도 이와 같아서 보는 것도 나쁘게 보고, 접촉함도 나쁘고, 기운도 나쁘고, 물리는 것도 나쁘다. 이러한 나쁜 인연으로 여러 가지 선한 일을 떠나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

또한 네 마리 독사가 항상 사람의 틈을 보아 어느 때 보고 건드리고 독기를 뿜고 물까 기회를 엿보듯이 사대의 독사도 항상 기회를 엿보아 물려고 한다. 만약 독사에 물려 죽어도 삼악도에 떨어지지 않지만, 사대의 독사에 물리면 삼악도에 떨어진다. 네 마리 독사를 아무리 정성을 다해서 길러도 항상 사람을 물려고 하듯이, 사대에게 아무리 이바지하여도 사람을 이끌어 나쁜 업을 짓게 한다. 또 비록 한 곳에 있더라도 마음이 각각 다르듯이 사대 독사가 한 곳에 있더라도 그 성품이 제각기 다르다. 지(地)는 굳고, 수(水)는 습하고, 화(火)는 덥고, 풍(風)은 움직이는 성질이 있다. 또 제물을 조심하는 사람이 네 마리 독사의 나쁜 냄새를 맡고는 이를 멀리 여의는 것과 같이 부처님과 보살들은 사대의 나쁜 냄새를 맡고 멀리 여읜다. 독사를 기르도록 맡은 사람이 네 마리 독사가 무서운 것이라고 여겨 도망하듯이, 바른 염혜를 지닌 보살은 사대의 독사가 매우 두려운 것을 알아서 달아나서 팔정도를 닦는다.

다음으로 다섯 전다라는 곧 오음(온)과 같다. 보살은 오온 보기를 전다라 보듯이 해야 한다. 전다라는 사람으로 하여금 은혜와 사랑은 떠나게 하고 원수를 만나게 하니, 오온도 사람들로 하여금 나쁜 법을 탐나게 하고 선한 법을 여의게 한다. 전다라가 여러 가지 무기로 무장하듯이 오온도 여러 가지 번뇌로 무장하고 어리석은 사람을 해쳐서 생사에 떨어지게 한다. 전다라는 자비심이 없어서 원수나 친한 이나 모두 해치니, 오음도 이와 같이 자비심이 없어서 선과 악을 함께 해친다. 전다라는 항상 사람을 해치려는 마음을 품고 있으니 오음도 마찬가지로 항상 모든 번뇌로 사람을 해치려 한다. 사람이 발이나 칼이나 막대기나 시종이 없으면 전다라에 살해될 줄 알아야 하듯이, 사람들이 발도 없고 칼, 막대기, 시종이 없으면 오온의 해를 입는다. 발은 계행을 가리키고, 칼은 지혜이며, 시종은 선지식이다. 이 세 가지가 없으면 오온의 해를 입게 된다.

보살은 이와 같이 관찰하되 오온이 전다라보다 더함을 알아야 한다. 중생이 다섯 전다라에게 살해되더라도 지옥에 떨어지지 않지만, 오온의 살해를 입으면 지옥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다섯 전다라가 쫒아오면 달아나듯이 지혜 있는 사람은 좋은 방편으로 오음을 벗어날 수 있으니 팔정도와 육바라밀과 사무량심이 그것이다. 좋은 방편으로 해탈하면 몸과 마음이 오온의 해침을 받지 않게 된다.

다섯 전다라가 친한 척 하는 것은 탐애가 일어남을 뜻한다. 우리가 탐애를 알지 못하면 중생으로 하여금 생사고해의 육도를 헤매게 한다. 탐애의 병을 버리기 어려움은 마치 친한 척하는 원수를 멀리 버리기 어려움과 같다. 친한 척하는 원수는 항상 기회를 엿보아 사랑하는 것을 이별하게 하고 미워하는 것을 만나게 하며, 온갖 선한 법을 멀리 여의게 하고 선하지 못한 법을 가까이 한다는 것이다.

페허가 된 마을은 우리의 육입처(六入處)와 같다. 보살은 육입처가 비어서 아무것도 없음을 알아서 빈 마을과 같이 여긴다. 저 사람이 전다라를 피해 마을로 들어갔지만, 사람도 보지 못하고 독이나 뒤주나 숨을 곳을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였듯이, 보살도 육입이 비어서 아무것도 없음을 알아서 생사고해에서 벗어나게 된다. 중생들은 육입으로 육경을 살펴서 생사고해에 떨어지니, 보살들은 육입으로 육경을 여섯 도적〔六賊〕이라고 알아서 마침내 이들을 꺾어서 굴복시킨다.

도망치는 길에 만난 강은 번뇌의 강물과 같다. 저 사람이 네 마리 독사와 다섯 전다라와 친한 척하는 사람과 여섯 도적이 무서워 버리고 도망쳐 강가에 이르러서 뗏목을 만들어 건너듯이, 보살도 사대의 독사와 오음의 전다라와 친한 척하는 탐애와 육입의 빈 마을과 육진의 도둑이 무서워 번뇌의 강에 이르러 계·정·혜·해탈·해탈지견과 육바라밀과 37조도법의 뗏목을 만들어 번뇌의 강을 건너 항상하고 즐거운 열반의 언덕에 이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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