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한된 지면에서 다 말할 수는 없고 줄거리만 말하면, 삼국시대 이래 조선시대 까지 승려와 사찰의 통제권은 왕의 권력에 속해있었다. 그리고 일제 강점기 때에는 조선총독의 권한 아래에 있었다. 물론 문서화된 법령을 통해서 말이다. 이러던 불교계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남한 땅에 ‘대한민국’이라는 현대 국가가 탄생하면서 정치와 종교가 분리된다. 불교의 문제는 불교계 내적 자율로 움직이는 것이 원칙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해결해야 할 일들이 많이 생기게 된다.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사찰 재산의 소유 및 관리 주체가 누구인가? 승려들의 범죄를 어디까지 관여할까? 한마디로 말하면 ‘사람’과 ‘돈’의 문제이다. 이런 문제 등에 대해 법령으로 문서화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갈등이 생겼는데, 그 갈등의 정점에 소위 ‘비구-대처’의 분규가 있었다.

지난 50년을 돌아보면, 이 문제는 ‘외부적’으로 일단락 났다. 그러자 이제는 ‘내부적’으로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다. 소위 ‘비구’가 ‘사람’과 ‘돈’을 잡았지만, 이제는 비구 중에서도 누가 잡느냐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선점을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문제삼지 않았다. 상대방의 범계 행위와 금전적 비리를 들추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문제는 불교의 종단 내부에서 시시비비를 가려본들 국가의 법적 구속력은 없다. 게다가 종단이 수사권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사실의 조사도 쉽지 않다. 자연 종단 내부의 문제가 결국은 국가의 법정으로 가기도 한다.

전통적으로 율장이 있다고 하나, 한자불교문화권에서는 율장대로 불교공동체가 살았던 것은 아니다. 국가의 법령에 의해서 승려들의 비리를 취조했다. 조선에서는 <경국대전>과 <대명률>로 했고,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사찰령>으로 관리했다. 현재는 종교는 자유이다. 청규를 만든다고들 하지만, 이 또한 내부의 결의이기 때문에, 형사상 민사상의 책임은 역시 법원에 가서 물어야 한다.

이에, 필자는 근본적인 제안을 하고자 한다. 불교적인 이념과 생활 습관을 같이 하기 위한 지속적인 교육을 하자고 말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불교는 ‘이념공동체’이다. 혈연도 아니고, 지연도 아니고, 자본도 아니다. 불교적 이념의 동질성과 순수성을 높이도록 노력하고, ‘돈’이나 ‘사람’에 대해서는, 각 공동체별로 자율성을 주는 것이 좋겠다.

이런 맥락에서 현재 조계종 총무원에서 진행하는 ‘법인’에 대한 지나친 간섭은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또 총무원에서 ‘교구’에 관계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념을 같이하다보면, 세월 속에서, 그리고 서로의 신뢰감이 쌓여가면서, 이런 인연들이 무르익었을 때에 ‘한 살림’하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재단법인 선학원’은 일제강점기 시절 우리 불교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법인이다. 당시의 친일적 교단과는 차원이 다르다. ‘대한불교조계종’을 만든 이념적 모태이기도 하다. 서로의 입장 확인은 충분하게 되었으니, 이제는 총무원으로서도 결단을 내려야 한다.

그러면 하나 되기 위한 노력은 그만두자는 말인가? 그렇지는 않다. 선학원이나 조계종이나 ‘선(禪)’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점이 같으니, ‘선(禪)’을 연결 고리로 삼아 훗날을 기약하자는 것이다. 선을 연구하는 필자는 바로 이런 점에서 두 단체가 이념을 같이 하는 넓은 의미의 공동체가 되기를 희망한다. ‘사람’과 ‘돈’을 같이하는 공동체가 되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아직 인연이 성숙되지 않았다.

필자는 현재 ‘한국선학회’ 회장을 맡아 일하고 있다. 금년 11월 6일(금요일) 연세대학교 도서관을 빌려서 <선문염송>을 주제로 세미나를 기획하고 있다. 이 책은 《전등록》과 더불어 조선시대 선종 승과 시험에 출제되었던 중요한 책이다. 이 두 책을 한글로 번역하신 봉선사의 월운 강백을 증명으로 모시고, 이 분야의 전문 교수들이 발표를 한다. 이 세미나를 통해 선학원과 조계종 총무원의 협조로 서로의 불교 ‘이념’의 동질성을 확인하는 자리가 되기를 기대한다. 같이 할 수 있는 것을 먼저 하다보면, 함께 손잡고 갈 날이 분명 있을 것이다.

-연세대 철학과 교수 · 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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