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무의 초상화.

1. 소무와 이릉

기원전 141년 16세에 즉위한 한 무제(漢武帝)는 죽을 때까지 54년간 황제의 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이 절대 권력자의 반세기에 걸친 통치기간은 전쟁으로 점철되었다. 특히 흉노와의 지속적인 전쟁은 세계사의 물줄기를 바꾼 일대 사건으로 이해된다.

진시황의 천하통일 이후 문명 제국 중국은 오히려 상당 기간 흉노의 속국 신세가 되고 만다. 일찍이 한 고조(漢 高祖) 유방(劉邦)이 친히 흉노정벌에 나섰다가 백등산(白登山)에서 포위되고 마는데, 고조는 뇌물을 쓰고서야 가까스로 풀려난다. 그리고 이후 70여 년간 중국은 흉노에 조공을 바치고 흉노의 왕 선우(單于)에게 공주를 시집보내야만 했다. 이 시기가 중국의 지배층에는 수치로 인식되는지는 몰라도 백성들에게는 가장 평화롭던 시기였다. 중국의 백성만이 아니다. 이 시기는 중화문명과 초원문화가 공존하며 태평성세를 구가하던 시기였다. 이른바 문제(文帝)와 경제(景帝)의 치세는 이런 공존의 마인드에서 가능했던 것이다. 그런대 이런 공존이 무제는 싫었다. 초원 유목민이 어찌 감히 중화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것이었다.

무제의 흉노정벌은 무수히 많은 영웅호걸과 전설을 만들어내었다. 위청(衛靑), 이광(李廣), 곽거병(霍去病) 같은 장군, 실크로드의 개척자 장건(張騫) 등등이 출현하여 무수한 이야기를 만들어 내었다. 누구는 살아서는 영화를, 죽어서는 영광을 누리고, 또 누구는 고난 속에서 살다가 회환 속에서 죽어갔다. 소무(蘇武)와 이릉(李陵)도 이 서역정벌의 시기에 등장하는 전설 중에 하나이다.

이릉은 이광의 손자이다. 젊어서부터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해 무관으로 승승장구하였다. 기원전 99년 이사장군(貳師將軍) 이광리(李廣利)가 흉노정벌에 나설 때 보병 5천을 이끌고 출전하여 수차에 걸쳐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러나 적지에서 수만 대군에 포위된 채 수일 동안 싸웠으나, 구원병은 오지 않고, 화살은 떨어져 결국 항복하고 만다. 이릉의 항복 소식을 들은 무제는 크게 노하며 그의 어머니와 처자식을 죽였다. 사마천(司馬遷)이 궁형(宮刑)을 당한 것도 이 때 이릉을 변호하다가 무제의 분노를 샀기 때문이다. 사마천이 볼 때 이릉의 항복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훗날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무제는 용서치 않았다. 어쩌면 무제의 입장에서는 이릉이 장렬하게 전사하는 것이 훨씬 전략적으로 가치가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여튼 어머니와 처자식이 주살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이릉은 결국 선우의 회유를 받아들여 그의 공주와 결혼하고 우교왕(右校王)으로 봉해진다. 그리고 한나라로 돌아가지 않고 중앙아시아의 초원에서 생을 마감한다.

이릉이 항복하기 1년 전에 소무가 무제의 명을 받고 흉노에 사신으로 갔다가 억류되었다. 끝내 투항을 거부한 소무는 결국 북해(北海, 지금의 바이칼호)에 유폐되는데, 이때 흉노의 선우는 숫양이 새끼를 낳으면 소무를 풀어주겠다고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북해에 유폐하기 전에 흉노는 소무를 토굴에 가두고 음식을 주지 않았다. 소무는 마침 내린 눈에 양털담요의 올을 씹어 먹으며 살아남았다. 그리고 북해에 유폐되어서는 들쥐가 모아 놓은 풀씨를 훔쳐 먹고, 들쥐마저 잡아먹으며 버텼다. 그렇게 버틴 19년 동안 소무는 한나라의 사신임을 나타내는 깃발〔節旄〕을 잠시도 손에서 놓은 적이 없었다고 한다. 하여 깃발은 너덜너덜해지고 깃대에 헝겊 몇 조각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무제가 죽고 소제(昭帝)가 등극하였다. 중국의 대흉노정책은 화친정책으로 전환하였고, 한나라는 소무를 돌려보낼 것을 요구하였다. 소무의 부하로부터 소무가 아직 살아 있다는 말을 들은 한나라 사신은 소무가 죽었다고 말하는 흉노에게 꾀를 내어 말하였다. “황제가 상림(上林)에서 사냥하던 중 기러기 한 마리를 얻었는데, 그 발에 매달린 비단에 소무가 어떤 못가에 있다는 내용이 있었다.”라는 내용이었다. 결국 소무는 풀려나고, 금의환향한 소무에게 관내후(關內侯)가 봉해진다. 소무는 80세까지 부귀영화를 누렸고, 죽어서는 황제의 누각인 기린각(麒麟閣)에 그의 초상이 걸리는 영광까지 누린다.

소무와 이릉은 서로 잘 아는 사이였다. 이릉은 선우의 명령으로 소무를 회유코자 찾아간 적도 있었다. 이때 이릉이 소무에게 한 말이 “인생은 아침이슬〔朝露〕과도 같다”는 말이다. 백년도 못사는 인생에서 19년을 고난 속에 보내야 할 만큼 한나라 깃발이 가치가 있는지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과연 소무와 이릉은 그렇게 갈라선다. 고국으로 돌아가는 소무를 배웅하며 이릉이 시를 지어 주었다.

손잡고 다리 위에 오르니 携手上河梁
저물녘에 나그네는 어디로 가는가 游子暮何之
시냇가를 배회하며 徘徊蹊路側
작별의 말도 전하지 못하네. 恨恨不得辭
새벽바람은 북쪽 숲에서 울고 晨風鳴北林
반딧불은 동남으로 날거늘 熠熠東南飛
뜬 구름에 해는 천리이니 浮雲日千里
어찌 알겠는가, 나의 슬픔을 安知我心悲

이 시에 대해 소무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오리 두 마리 북으로 날아와 雙鳧俱北飛
한 마리만 홀로 남으로 날아가네. 一鳧獨南翔
그대는 마땅히 이 객사에 머물고 子當留斯舘
나는 응당 고향으로 돌아가네 我當歸故鄕
먼 오랑캐 땅에서 한 번 헤어지니 一別如秦胡
이 만남을 어떻게 끝내겠는가. 會見何渠央
슬프다 애절한 마음에 愴恨切中懷
눈물이 옷깃 적셔도 모르누나. 不覺淚霑裳

19년이면 검은 머리가 흰머리로 변하기엔 너무도 충분한 시간이다. 이제 헤어지면 다시 만날 수 없는 이별이 어찌 슬프지 않으랴. 이릉의 시엔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갈 이유도 없는, 하지만 무척이나 가고 싶은 애절함이 숨어 있다. 차라리 잊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이런 슬픔은 시간이 지나면서 잊혀지기보다는 오히려 더욱 강렬해진다. 그러니 그 슬픔을 누가 알겠는가. 그래서일 것이다. 소무의 시에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기쁨보다 벗과 살아서 마주하는 마지막 만남이 더욱 애절하다. 중국문학과 예술에서 이 두 사람의 이별 장면은 자주 재현된다. 이백(李白)은 〈소무(蘇武)〉라는 시에서 이렇게 읊고 있다.

동쪽 고향까지 변방의 사막은 멀고 東還沙塞遠
북쪽 다리 위의 이별에 슬픔이 사무친다. 北愴河梁別
울며 이릉의 옷 부여잡고 泣把李陵衣
마주보며 피눈물 흘리누나. 相看淚成血

2. 당신은 교화되었는가

1801년 다산 정약용은 ‘황사영 백서사건(黃嗣永帛書事件)’으로 구금되어 문초를 당하고 강진으로 유배된다. 다산의 <아사고인행(我思古人行)>이란 시는 옛사람의 고사를 빌려 유배지에서의 마음가짐을 읊은 시로 모두 세 사람을 언급하고 있다. 소무가 그 두 번째 옛사람이다.

소무를 생각하노라. 我思古人思蘇武
북해의 유수 마침내 고난에서 벗어났네. 北海幽囚終免瘦
소무의 19년 수인 생활 蘇武一十九年囚
그의 일 년을 나의 하루와 바꾸니 괴이하다. 我以日易尤異數
이제는 힘써 화기를 보전하고 自今勉力保天和
옛사람 생각하며 고뇌하지 않으리라. 我思古人除煩苦

정약용이 스스로 지은 <자찬묘지명>에 의하면 1801년(순조1) 황사영에 연루되어 옥중에 있을 때, 꿈에 한 노부(老父)가 나타나 “소무는 19년을 참았는데, 지금 그대는 19일의 고통을 참지 못하는가?”라고 꾸짖었다고 한다. 옥에 있은 지 19일이었고, 1800년 낙향 이후 유배에서 풀려나기까지 19년의 세월이 갖는 유사성을 정약용은 예사로 넘기지 않고 있다.

어찌 정약용뿐이겠는가. 조선의 선비로 유배되거나 좌천된 사람 중에 소무를 읊지 않은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19년 유배생활의 고난과 귀환 후에 받은 보상은 가히 모든 유배자의 위안과 희망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과연 소무에게 주어진 보상이 19년 고난의 대가로 충분한 걸까? 검은 머리 중년의 사나이가 흰머리 늙은이가 되어 돌아왔는데, 가족들은 고려치 않고 오직 소무 자신의 삶만 생각한다면 말이다. 오히려 이릉처럼 흉노의 땅에서 새 삶을 사는 게 훨씬 좋은 건 아닐까? 시선을 잠시 돌려보자.

“당신은 교화되었는가?”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가석방 심사위원이 심사대상 죄수에게 묻는 말이다. 교화(敎化)로 번역된 영어 ‘rehabilitate’는 ‘자격을 얻다’는 말이니까 사회에 되돌아갈 수 있을 만큼 정신상태가 개조되었냐는 물음이겠다. 주인공 레드는 교화되었음을 역설하지만 번번이 가석방은 거부된다. 40년 세월이 흐르고, 머리에 하얗게 서리가 내린 초로의 레드는 교화여부를 묻는 심사위원에게 이렇게 말한다.

“교화라. 나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소. 내게 그건 그저 정치인들이 만들어 낸 말에 불과하오. 당신 같은 젊은이들이 넥타이 매고 일할 자리 만들어 주기 위해서 말이오.”

영화에선 역설적이게도 교화에 무관심한 죄수에게 가석방 승인 도장이 찍힌다. 반면 영화 <퀼스>에는 끝내 교화를 거부하고 죽음에 이르는 주인공이 그려진다. <퀼스>는 프랑스 대혁명의 와중과 나폴레옹 황제 즉위를 전후하여 변태적인 소설을 써서 악명을 떨친 사드후작 이야기이다. 사드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만하고 걸핏하면 버럭 소리 지르고 화를 내며, 모든 일에 극단적인 데다 상상력이 제멋대로이고, 품행이 바르지 못하기로는 어깨를 나란히 할 자가 없으며, 열광적이기까지 한 무신론자, 이것이 나라는 인간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를 죽이든지 아니면 그냥 이런 사람으로 받아들이기 바란다. 왜냐하면 나는 달라지지 않을 테니까.”

세상은 이런 사람을 그냥 두지 않는다. 왜냐하면 무신론자나 허용되지 않는 상상은 매우 위험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오만한 무신론자의 광적인 상상이라면…. 체제 안정을 위해서라도 이런 사람은 사회로부터 격리시키고 교화과정을 통해 순치시켜야할 필요가 있다. 규범을 이해하고 규율을 지키며 바른 사고를 할 수 있도록 교정하여야만 한다. 교화되길 거부한다면 죽음은 불가피한 것이다. 영화에서 사드는 발가벗겨지고, 혀까지 뽑히고 마지막에는 고해성사를 거부하고 십자가를 삼키며 저항한다. 그리곤 비참하게 죽는다.

3. 장성과 장벽 사이

한 무제가 등장하기까지 중국과 흉노는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었다. 중국의 지배계급은 수치로 여길지는 몰라도, 일반 백성들에게 이 시기는 오래간만에 찾아 온 태평성세였다. 하지만 평화는 매우 짧았다. 불과 반세기만에 천하는 다시 요동쳤고 백성들은 군역에 내몰려야 했다. 흉노는 공존의 상대가 아니라 타도의 대상이 되었다. 백성들은 전장에서 죽어갔고, 장성은 다시 축조되었다. 장성은 다시 문명과 야만을 구분하는 경계가 되었다. 장성 이쪽은 중화의 문명세계 중국이지만 장성 저쪽은 야만족 흉노의 황량한 사막이다. 흉노라는 이름이 주는 이미지. 중국문학에서 장성 너머 흉노의 땅은 문명화된 인간이 살 수 없는 야만의 황무지로 그려진다. 그러니 소무의 정절은 당연한 일이고 이릉의 변절은 애석한 일이다. 그러나 누가 알겠는가? 흉노 땅에서 이릉은 더 행복했는지….

한편으로 무제는 유교를 국교화하고 새로운 규범을 제정하였다. 삼강(三綱)은 공자(孔子)의 유학에는 없는 새로운 질서이고 가치체제였다. 통일된 지배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일련의 조치들이 차질 없이 만들어지고, 그런 틀에서 소무가 나온다. 아니 만들어졌다고 보는 게 옳다. 정말로 한나라 절기가 소무의 삶에서 19년을 놓아서는 안 될 만큼 가치가 있는 것일까? 어쩌면 소무 또한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교화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길들여졌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을까?

소무와 이릉의 이야기는 조선 선비들의 정신세계마저 지배하였다. 그들의 머리에도 거대한 장성이 축조되어 스스로 중화문명의 속국백성임을 자랑스러워하게 하였다. 어째서 장성 밖으로 넘어가 초원을 내달리는 자유를 상상하지 않았는지…. 만리장성은 중국인은 물론 많은 주변 사람들의 정신에까지 무너지지 않는 장벽이 되었다.

김문갑 | 철학박사, 충남대 한자문화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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