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59년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법요식 및 각종 봉축행사가 마무리됐다. 그러나 부처님오신날이 해마다 의례적인 행사로만 그쳐서는 안 된다. 요식적이거나 행사위주로만 치우쳐서도 곤란하다. 우리가 부처님오신날을 찬탄하는 이유는 부처님의 정신을 사바세계에 널리 확산시켜 중생들의 행복을 도모하자는 데 있다.
이러한 의미를 외면한 체 단순히 연등달기 등 의례에만 치우지게 되면 부처님은 사월초파일 딱 하루만 우리에게 머물다 가는 형국이 되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는 매일매일이 부처님오신날이 되도록 그 오신 뜻을 기리고 가르침을 널리 펴는데 주력해야 할 것이다.

재단법인 선학원 이사장 법진 스님은 올해 부처님오신날 봉축법어에서 이 점을 강조했다. 법진 스님은 ‘부처님오신날은 이런 날입니다’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봉축법어에서 “모든 중생이 고통을 여의고 안락에 드니 예토가 정토로 바뀌는 날이다”고 했다. 또 “집이 모여서 골목을 이루고 골목이 모여서 마을을 이루듯 만나는 사람마다 부처님이 되고 마주치는 풍광마다 경전이 되는 날이다”면서 “퇴근하는 아버지의 가슴에도, 살림하는 어머니의 가슴에도 학교에서 공부하는 아들딸의 가슴에도 서광(瑞光)이 장엄되는 날이다”고 했다. 법진 스님은 특히 “부처님오신날은 모두 갑이 되는 날이다”라고 표현했다.

이는 부처님 앞에선 가난한 자들과 낮은 계급의 신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부처님 정신을 강조한 말로 받아들여진다. 부처님은 중생들의 행복과 자유를 교리적인 측면에선 무명의 타파에서 가르침을 제시하셨지만 사회적인 측면에서는 평등과 평화를 기본적인 요인으로 꼽으셨다. 사회적 측면에서 평등은 신분과 지위를 가르는 것을 가리킨다면 평화는 마음의 평정을 뜻한다.

인간 사회에서 차별이 존재하는 한 증오와 다툼은 끊이지 않는다. 평화를 지향하지 않고 분쟁심을 키우는 사회는 번영과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 늘 분란과 갈등에 휩싸여 깊은 상처만 양산할 뿐이다. 불교는 그래서 평화의 종교이며 평등의 종교다. 절대 평화이며 절대 평등이다. 이것이 구현되지 않으면 갈등과 분란이 끊임없이 야기된다.

현재 지구촌은 자연재해와 전쟁의 위협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부처님이 탄생하신 네팔은 엄청난 대지진으로 국민들이 깊은 시름과 고통 속에 놓여 있다. 중동지역은 연일 대형 포탄이 쏟아지는 전쟁의 참화를 겪고 있다. 이러한 때 불교의 평등 평화 정신이 발현돼야 부처님오신 날의 의미를 값지게 되새길 수 있는 것이다.

부처님은 그냥 오시는 것이 아니다. 중생들이 마냥 행복할 수 있는 선물을 가지고 오신다. 우리가 다만 그 선물을 받지 못하거나 활용하지 못할 뿐이다. 우리의 어리석음이 최고의 선물을 받아들고서도 쓸 줄 모르니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 하나 모두가 존귀한 존재임에도 스스로 자신을 비하하고 폄훼하므로 삶이 고단하다.

예토를 정토로 가꾸는 몫은 순전히 우리 불제자들에게 주어져 있다. 부처님은 이미 일체개고아당안지(一切皆苦我當安之)라는 말로 구원의 길을 열어놓으셨다. ‘일체개고아당안지’란 “세상의 모든 고통을 이미 내가 편안케 했다”는 말로 부처님의 탄생게 중 일부다. 즉 부처님은 중생들에게 최고의 안락한 경지로 가는 길을 제시해 놓았다. 이 길로 가느냐 가지 않느냐의 선택은 순전히 우리의 몫이다. 우리가 평화의 세계를 열고 평등의 사회를 마련하는 데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의 기준은 부처님이 제시해 놓은 그 길을 걷느냐 걷지 않느냐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의 행복을 도모하기 위해선 매일매일이 부처님오신날이 돼야 한다. 매일매일이 갑이 되는 사회여야 하며, 매일매일이 화엄의 광명을 연출하는 날이 돼야 한다.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의 메시지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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