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무위(無爲)의 정치

통일제국 진(秦)이 망하고 천하는 다시 전란에 휩싸였다. 중원의 사슴은 항우(項羽)를 쓰러뜨린 유방(劉邦)에게 돌아가며 한(漢) 제국이 섰다. 한나라의 정책은 오랜 전란으로 피폐해진 백성들을 위무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가능한 한 백성들의 삶에 관여하지 않고 자유롭게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하였다. 군역이나 세금을 최소화하였다. 문제(文帝) 때에는 세금을 30분의 1 세율로까지 줄였고, 말년에는 아예 없애기도 하였다. 황실은 검소하였고 나라는 풍요로웠다. 경제(景帝) 또한 부왕의 정책을 답습하여 물자는 더욱 풍부했다. 당시의 풍요를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한(漢)나라가 창건한지 70여 년 동안 나라는 무사하고 홍수나 가뭄의 재앙도 없었다. 백성들은 모두 넉넉하였고, 지방의 창고에는 곡식이, 정부의 창고에는 재화가 넘쳤다. 서울에는 돈이 거만금이나 누적되어 돈 꿰는 줄이 삭아 셀 수 없을 정도였다. 곡식창고는 이미 가득 차 밖에 포갠 위에 또 포개 쌓았다. 그래도 다 쌓을 수가 없어서, 나중에는 썩어 먹을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문제와 경제의 치세〔文景之治〕는 황노학(黃老學)에 기초하고 있었다. 황노학이란 황제(黃帝)와 노자(老子)의 사상으로, 자연의 순리에 맡기고 국가는 백성들의 삶에 가능한 한 관여하지 않는 것을 골자로 한다. 이른바 무위(無爲)의 정치이다. 요즘으로 말하면 자유방임주의가 이에 가깝다고 하겠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에게 이런 자유방임은 방종으로 비쳐졌다. 이들은 인간의 욕망은 절제되어야 하고 남녀의 결합도 정해진 예의와 법도를 따라야 한다고 보았다. 이들에게 황노학의 무위 정치는 영 마뜩찮은 것이었다. 이들은 끊임없이 황제에게 예의와 도덕으로 다스릴 것을 주청하였다.

한나라 초기 공신들은 연일 술판을 벌였다. 고조(高祖) 유방 또한 노는 게 좋았다. 이런 고조 앞에 유학자 육가(陸賈)는 시시때때로 나아가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을 인용하였다. 고조는 은근 짜증이 났다. “나는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다. 시와 서 따위가 무엇이란 말이냐?”라고 힐난하였다. 그러자 육가가 대답하였다.

“말 위에서 천하를 얻을 수는 있지만, 말 위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는 없습니다.”

맞는 말이다. 고조는 육가에게 국가의 흥망성쇠와 그 원인을 써서 올리라고 하였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책이 《신어(新語)》이다. 이 책에서 육가는 말한다.

“예의가 행해지지 않고 기강이 세워지지 않아 후세에 도의가 피폐해졌다. 이에 성인께서 오경(五經)을 정하여 육예(六藝)를 밝히시고, 천지운행의 원리를 따르고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여 본질에 근거하여 근본을 세워서 인륜(人倫)을 펴시었다.”

예의가 행해지지 않고 기강이 세워지지 않으니 남녀가 멋대로 만난다. 인륜은 무너지고 도의가 피폐해지는 것이다. 이 글에서 오경은 공자가 조술하거나 편찬한 다섯 권의 경서, 즉 《시경(詩經)》ㆍ《서경(書經)》ㆍ《예기(禮記)》ㆍ《역경(易經)》ㆍ《춘추(春秋)》를 가리킨다. 육예는 예(禮)ㆍ악(樂)ㆍ사(射)ㆍ어(御)ㆍ서(書)ㆍ수(數)로 사대부들이 갖추어야할 기초적인 교양이다. 인륜은 인간으로서 마땅히 지켜야만 하는 윤리로 부자유친(父子有親)ㆍ군신유의(君臣有義)ㆍ부부유별(夫婦有別)ㆍ장유유서(長幼有序)ㆍ붕우유신(朋友有信)의 오륜(五倫)을 말한다. 육가의 머릿속에는 오경에 밝고 육예에 능통하며 오륜을 지키는 도덕적 인격자들에 의해 사회가 조직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가득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유교적 이상사회를 고조는 접수만 하고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고조가 죽고 문제 때에는 천재 유학자 가의(賈誼)가 나섰다. 그 또한 인의(仁義)에 기초한 도덕정치를 주장하였지만 가의 또한 용납되지 않았다. 사마천은 문제가 가의에 대한 비방을 듣고 그를 좌천시켰다고 하였다. 과연 그럴까? 적어도 문제처럼 어질고 현명한 황제가 어리석게도 참소하는 말을 듣고 가의를 내쫓았을까?

2. 황노학(黃老學)에서 유학(儒學)으로

전한(前漢) 초기는 도교적 무위정치를 주장하는 황노학파와 유교적 도덕정치를 강조하는 유학파 사이에 보이지 않는 길항(拮抗) 관계가 형성되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육가나 가의의 주장이 접수는 되어도 실행에 옮겨지지 않는 것은 황노학의 위세가 여전히 강하다는 의미인 것이다. 시대는 자유방임적 무위를 원했고, 유교적 도덕정치는 시간이 더 흘러야만 했다. 하지만 언젠가는 황노학의 역할이 다하고 유학에 그 자리를 넘겨주어야할 때가 올 것이다. 그리고 그때는 생각보다 일찍 찾아왔다.

황노학에 기초한 무위의 정치체제가 유지되려면 한 가지 조건이 전제되어야만 한다. 노자(老子)가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국가나 공동체의 규모가 매우 작아야 한다. 노자는 말한다.

나라는 작고 백성은 적게 한다. 유용한 도구가 있으나 사용하지 않고 백성들로 하여금 죽음을 중히 여겨 멀리 옮겨 다니지 않게 하면, 비록 배와 수레가 있으나 타고 갈 곳이 없고, 갑옷과 무기가 있어도 진 칠 곳이 없게 된다. 백성들은 다시 새끼를 묶어 문자로 사용하고, 지금 먹는 음식을 달게 여기고, 지금 입는 옷을 좋게 여기며, 지금 사는 곳을 편안히 여기고 각자의 풍속을 즐기며 산다. 이웃 나라가 서로 마주 보여 닭 울고 개 짓는 소리가 들려도 백성들은 늙어 죽을 때까지 왕래하지 않는다.

유명한 노자의 소국과민(小國寡民) 이야기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이상적인 정치체제는 실상 원시공동체와 다름이 없다. 기계도, 배나 수레도 사용할 일이 없고, 문자를 배울 필요도 없이 기껏 결승문자 정도면 족한 원시 자연 상태에서, 나라라고 해봤자 이웃나라의 닭 우는 소리 개 짓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규모가 작은 사회. 이런 사회에서라야 무위의 자유방임주의가 가능하다. 근대철학자 루소가 이상적인 민주주의체제로 소규모 농촌공동체를 말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바꿔 말하면 경제 규모가 훨씬 커지고 거대한 도시가 들어서기 시작하면 이런 이상사회는 불가능하다는 이야기가 된다.

전한 초기는 진시황의 강력한 법치주의에 대한 반발과 오랜 전쟁의 뒤끝에서 오는 피로도 때문에 무위의 정치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천하를 안정시킬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역사는 얼핏 선택에 의해 결정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큰 흐름에서 선택은 실상 불가피하거나 부득이한 것이다. 선택 아닌 선택, 자유선택 아닌 어쩔 수 없는 선택인 것이다. 육가나 가의의 주장이 틀려서가 아니라, 더 많은 내적 역량이 응축되어야만 실행에 옮겨질 수 있기 때문에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는 마침내 내적 역량이 폭발할 정도로 축적되었고, 무위정치에 따른 조악함은 보다 세련된 상류사회에 대한 열망으로 바뀔 즈음, 여망을 등에 지고 시대적 과업을 완수할 또 한 명의 영웅이 등장하는 것이다.

3. 파출백가 독존유술(罷黜百家獨尊儒術), 백가를 내쫓고 오직 유학을 높여라

경제의 11번째 아들 유철(劉徹)이 황위에 올랐다. 그가 한 무제((漢 武帝, BC 156 〜 BC 87)이다. 당시 나이 16세. 머잖아 천하를 바꾸어 놓겠지만 아직은 어렸다. ‘한 무제’ 하면 서역 정벌을 비롯한 정복 전쟁과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닌 독재자의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그 전에 무제는 매우 똑똑했고 대단히 세련된 청년이었다. 어린 태자 시절 한 남자가 계모를 죽인 살모죄(殺母罪)로 잡혀왔다. 그의 계모는 악독한 여자로 아버지를 죽였고, 이 남자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계모를 죽인 것이다. 부왕 경제 옆에서 재판 과정을 지켜보던 어린 황태자 유철이 경제에게 말했다. “지아비에게 충실하지 못한 부인은 더 이상 지아비의 아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들의 어머니도 아닙니다. 이 경우에는 살모죄가 적용되지 않습니다.”라고 말이다.

▲ 한 무제(漢 武帝)
황태자는 유학에 심취했다. 유학은 예악(禮樂)을 중시한다. 예는 매너이며 규범이고, 음악은 품격이다. 문학과 예술이 형식미를 갖추고 사회적 규범으로 나타나는 것이 예악이다. 이런 품격은 돈이 있다고 해서 얻어질 수 있는 게 아니다. 《중용》에 나온 대로 “널리 배우고 자세히 묻고 깊이 사색하고 밝게 판단하는” 선비상은 오랜 학습과 훈련, 몸에 밴 교양과 지식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중국문화의 품격은 적어도 이런 교양을 갖춘 사대부들의 몫이었다. 유학자들이 볼 때 황노학의 자연주의가 지배하는 전한시대는 유치하고 조악한 야만시대와 다를 게 없었다. 그들은 세련되고 고상한 사회를 추구했고, 이런 이상은 무제가 등장하며 드디어 실현될 수 있었다.

무제가 등용한 대신들의 면면을 보면 경전에 박식하고 문학에 뛰어난 사람들이다. 사마천의 《사기》 〈효무본기〉에는 “천자는 유가학설을 숭상하여 현량(賢良) 출신의 선비들을 불러들였는데, 조관(趙綰), 왕장(王臧) 등이 문장에 박학했기 때문에 공경대신에 임명하였다.”라고 하였다. 중국 역사상 문장가를 대신으로 기용한 최초의 황제가 무제였다. 그리고 이런 무제의 조치는 소리 없는 혁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황노학의 자연주의적 질서에서 유학의 도덕주의적 질서로, 통치패러다임의 대전환을 알리는 것이었다.

무제는 즉위 초에 현량방정(賢良方正)을 전국적으로 실시한다. 이는 천거를 통해 재야에 숨은 선비를 등용하는 것이다. 무제가 즉위와 동시에 현량과를 실시하였다는 말은 곧 기존 대신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신진사대부들의 의견을 따르겠다는 의지의 표현인 것이다. 당연히 기존 세력의 심한 반발에 부딪혔다. 특히 무제의 할머니 두태후(竇太后)는 황노학 신봉자여서 어린 손자의 정책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결국 무제 즉위 초에 현량으로 천거된 선비들은 대부분 감옥에 갇히고 조관과 왕장은 처벌되었다. 무제는 야망을 숨기고 때를 더 기다려야만 했다.

두태후가 죽고 이제 무제의 의지를 꺾을 자는 아무도 없게 되었다. 무제는 드러내 놓고 자신이 꿈꿔온 세계를 만들어가기 시작하였다. 무제는 다시 천하의 인재를 찾았고, 이때 만난 학자가 동중서(董仲舒, BC 176 ~ BC 104)이다. 천하를 안정시킬 계책을 묻는 무제에게 동중서가 대답하였다.

“지금 사람들은 괴이한 것이나 드러내려 하고 외도를 좇고 있습니다.……이제 유가의 육예로 모든 것을 다스리고 이외의 학설은 금지하십시오.”

이른바 파출백가 독존유술(罷黜百家 獨尊儒術), 유학 이외의 모든 학문을 내쫓고 오직 유학만을 숭상토록 하라는 것이다. 이런 동중서의 건의를 무제는 수용하며 유교를 국교화한다.

4. 대일통(大一統), 크게 하나로 통일하다

동중서는 《춘추(春秋)》 박사였다. 그는 《춘추》의 첫머리에 나오는 ‘춘왕정월(春王正月)’에 담긴 공자의 미언대의(微言大義)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신이 삼가 《춘추》를 살펴 왕도가 어떻게 시작하는지를 찾아보니 ‘바름〔正〕’에 있었습니다. ‘춘왕정월(春王正月)’이라 하니, ‘바름’은 ‘왕(王)’의 다음에 있고, ‘왕’은 ‘봄〔春〕’의 다음에 있습니다. 봄은 하늘이 행하는 것이요, 한 해의 시작을 제정하는 것은 제왕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 뜻은 제왕이 위로는 하늘이 행하는 것을 받들고 아래로는 자신이 행하는 바를 바르게 함으로써 왕도의 시작을 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 동중서(董仲舒)
동중서에 따르면 왕은 하늘의 뜻을 받들어 아래로 행하는 유일한 존재이다. 이제 세상은 왕을 중심으로 통일되는 것이다. 인간 중에서 유일하게 존엄한 자, 왕에 대한 복종은 곧 하늘의 뜻을 따르는 것이 되었다. 왕 이외의 모든 인간은 왕의 신하됨을 피할 수 없다. 이게 크게 하나로 통일한다는 이른바 대일통이다.

이런 대일통 체제는 신하 위에 임금을 놓고, 자식 위에 어버이를 놓고, 여자 위에 남자를 놓음으로써 완성된다. 이른바 삼강(三綱)이다. 군위신강(君爲臣綱), 부위자강(父爲子綱), 부위부강(夫爲婦綱)은 군신과 부자와 부부관계를 수평관계에서 수직적 상하관계로 바꿔놓는 것이다. 공자의 오륜(五倫)이 상호 평등 관계에 기초한 것임에 비해, 삼강은 수직적 차별구조를 정당화한다. 동중서는 이를 위해 억음존양(抑陰尊陽), 즉 음을 억누르고 양을 높일 것을 주장한다. 하늘은 양이고 땅은 음이다. 남자는 양이고 여자는 음이다. 하늘이 땅 위에 있는 것처럼 남자는 여자 위에 군림하는 것이다. 이렇게 동중서가 제창하고 한 무제가 확립한 대통일체제는 성별ㆍ직업별ㆍ신분에 따른 차별을 정당화하며 세워졌던 것이다.

젊은 시절 무제는 이상에 불탔다. 통일체제를 세우고 오랑캐를 굴복시키며 중국의 자존심을 높였다. 서역정벌은 실크로드의 초석을 다지는 일이었다. 오늘날의 중국을 있게 한 장본인이 무제라고 하여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늙은 무제를 보면 씁쓸하다.

말년의 무제는 신선술에 빠졌다. 무제는 불로장생을 위해서라면 재물을 아끼지 않았다. 궁궐을 신선들이 사는 곳처럼 꾸미고 천하의 방사(方士)들을 불러 들였다. 늙기 싫고 죽기 싫어 몸부림치는 늙은이, 오직 자신의 권위와 장생불사를 위해 물자를 낭비하는 노황제의 모습은 진시황과 다를 게 없다. 그도 권력을 추구했고, 권력을 독점했다. 무제는 권력이 나누어지는 것을 우려하여 황태자의 생모도 죽인다.

늙은 황제가 젊은 여인 조첩여를 후궁으로 삼고 아들을 생산하니 그가 바로 소제(昭帝)이다. 무제는 소제를 황태자로 앉히고 생모인 조씨에게 역모의 죄를 씌어 자결을 명하였다. 어린 황제에게 젊은 어머니는 자칫 외척의 발호로 이어질 것을 염려하여 사전에 화근을 제거한 것이었다. 권력은 이런 것이었다. 문학을 사랑하고 예의를 존중하는 젊은 황제의 모습은 사라진지 오래되었다. 유교 또한 인문 정신은 사라지고 권력질서를 정당화하는 지배이념으로 변질되고 만 것도 사실이다.

김문갑 | 철학박사, 충남대 한자문화연구소 연구교수 meastre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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