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업을 지은 가장 악한 자들은 보통 네 종류가 있다고 한다. 첫째는 사중죄(四重罪)를 지은 자이고, 둘째는 방등경을 비방한 자이며, 셋째는 오역죄를 지은 자이고, 넷째는 일천제이다. 여기서 사중죄(혹은 四重禁)는 ‘네 가지 무거운 죄’로 사바라이죄(四波羅夷罪)라고도 한다. 이를 범하면 승려 자격을 상실하여 승단에서 추방된다. 사중죄는 곧 음행을 저지르는 사음계를 범했을 때, 남의 물건을 훔치는 투도계를 범했을 때, 남의 생명을 해치는 살생계를 범했을 때, 거짓말로 남을 속이는 망어계를 범했을 때이다.

경에서는 불성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 네 가지 악업을 지은 자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물음을 제기한다.

첫째, 네 악업자들이 만약 불성이 있다면 어째서 지옥에 떨어지겠는가.
둘째, 네 악업자들이 만약 불성이 있다면 어째서 상·락·아·정의 성품이 없다고 하는가.
셋째, 네 악업자들이 불성이 끊어졌다면 어째서 다시 상·락·아·정하다고 하겠는가.
넷째, 네 악업자들이 불성이 끊어지지 않았다면 어째서 일천제라 하겠는가.
다섯째, 네 악업자들은 어째서 결정되지 않았다고 하겠는가. 만약 결정되었다면 어떻게 아뇩보리를 성취하겠는가.

이 물음에 대해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답하고 있다.

먼저, 다섯째 물음에 대해 답한다. 네 부류 곧 일천제나 오역죄 비방자 사중죄를 범한 자들은 선근을 내는 것이 결정된 것이 아니요, 만약 결정되었다면 일천제는 결국 아뇩보리를 이룰 수 없다고 한다.

넷째 물음에 대해 답한다. 네 악업자들이 불성이 끊어지지 않는다면 어째서 이들을 단선근자라고 하겠느냐는 것이다. 네 부류의 악인들이 악행을 저지르면 선근이 끊어지니 자연 불성이 끊어진다고 본 것이다. 불성을 말할 때 연인불성, 요인불성, 정인불성을 드는데, 연인불성의 경우 선근으로서의 불성을 가리킨다. 이 경우가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고 불성이 끊어진 것은 아니라고 한다. 왜냐하면 불성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측면에서 끊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안·팎, 유루·무루, 상·무상에서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선근의 경우는 하나는 안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밖의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불성은 안의 것도 아니고 밖의 것도 아니요, 유루·무루, 상·무상의 두 가지에 치우지지 않는 중도여서 불성은 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인천은 선(善)에 속하고 삼도는 악(惡)에 속하며, 범부의 법은 진여 밖에 있고 성인의 법은 진리 안에 있으며, 세간은 유루이고 출세간은 무루이며, 유위는 무상(無常)하고 무위는 상(常)하다. 그런데 불성은 이와 같은 두 가지 치우침이 없으니 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셋째에서 첫째까지 물음에 대해 답한다. 만일 불성이 끊어진다면 다시 얻을 수 있을 것이고, 만일 다시 얻을 수 없다면 불성은 끊어지지 않았다고 이름한다. 예를 들면, 죄인이 비록 죄를 지었으나 끝내 성품을 끊을 수 없음은 죄가 결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정된 것이 아니므로 삼보리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본래 이미 성품이 끊어진 것을 취하여 일천제라 이름한다. 성품이 다 하여 이미 얻어지지 않았는데 무엇을 끊는다고 하고, 이미 결정되어 있지 않은데 어찌 (악도에) 떨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겠는가.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성품은 이와 같이 고정되고 결정되어 있지 않으니 악인들의 성품이나 일체법의 성품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경에서는 그 성품이 결정되어 있지 않음을 대략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사중죄를 범한 이도 성품이 결정되지 않는다. 만일 성품이 고정되어 결정된다면 사중죄를 범하고 마침내 아뇩보리를 얻지 못할 것이다. 방등경전을 비방한 자, 오역죄를 지은 자도 성품이 결정되지 않으니 만일 결정된다면 자중죄 등을 지은 이는 마침내 아뇩보리를 얻지 못할 것이다. 제법의 빛, 형상, 향기, 맛, 감촉의 모습, 무명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오음, 십이처, 십팔계의 모습과 25유의 모습과 사생(四生) 등 일체법들이 모두 결정되지 않는다.”

이를 비유로 말하면 마치 환술장이가 여러 사람 가운데 있으면서 차병·보병·상병·마병의 네 가지 군대를 환술로 만들거나, 모든 영락과 몸을 치장하는 기구를 만들거나, 도시·촌락·산림·숲·우물·못·강 등을 만들었을 때 어린아이들은 지혜가 없어서 이를 보고 참이라고 하지만, 지혜 있는 사람들은 모두 허황된 것이고 환술로 사람의 눈을 홀리는 것이라 안다. 일체 범부로부터 성문·벽지불에 이르기까지 성품의 실상에 대하여 일정한 모양이 있다고 보는 것이 이와 같으니 보살과 부처, 모든 법에 대하여 일정한 모양이 있다고 보지 않는다. 나아가 일정한 모양이 있거나 생멸이 있다고 보지 않으니, 여래나 열반도 일정한 모습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문 제자들은 여래가 열반에 들었다고 말하지만 여래는 결코 열반에 들지 않는 줄을 알아야 한다. 여래의 불성이 항상한 것도 아니고 무상한 것도 아니고 끊어지지도 않는다고 했듯이, 열반도 여래도 결정되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기운 |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교수 lkiwoo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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