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대 이후 한국 불교계의 상황은 암울했다. 일제의 사찰령 반포와 일본불교의 침투는 한국불교의 전통을 해체시키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눈 푸른 납자들은 수행공간은 고사하고 그들의 안위조차도 보장받지 못하고 있었던 신세였다. 위법망구(爲法亡軀)가 아닌 굶주림과 병으로 죽어갔던 것이다.

1921년 김남전(金南泉)과 강도봉(康道峯) 스님이 중심이 된 선학원(禪學院)의 창설은 한국 불교의 정통성 계승을 궁극적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아울러 청정비구승의 안정된 수행풍토 조성은 그 목적을 달성하는 가장 일차적이고도 우선적인 사안이었다. 선학원은 1922년 선우공제회(禪友共濟會) 창립을 통해 이를 구체화시켜 나갔다.

망월사(望月寺) 정혜사(定慧寺) 직지사(直指寺) 백양사(白羊寺) 범어사(梵魚寺) 불영사(佛影寺) 건봉사(乾鳳寺) 마하연(摩訶衍) 장안사(長安寺) 월정사(月精寺) 개심사(開心寺) 통도사(通度寺) 신계사(神溪寺) 남장사(南長寺) 석왕사(釋王寺) 선암사(仙岩寺) 천은사(泉隱寺) 용화사(龍華寺) 해인사(海印寺)

위의 19개 사찰은 일제시대 한국 불교의 명맥을 지키고자 선원 운영을 통한 청정수행가풍을 유지하고 있었다. 선우공제회는 범어사를 중심으로 한 이들 19개 사찰의 인적 참여와 물적 지원으로 운영되었다. 백학명(白鶴鳴)·오성월(吳惺月)스님 등 창설과 관련한 인물들은 각 사찰과 신도들의 의연금과 희사금 그리고 선원토지의 수익금을 기반으로 선원의 진흥과 증설에 진력하였다. 비록 선학원은 재정적인 문제로 한동안 침체기에 직면했지만, 선풍진작과 수행을 통한 상부상조의 정신을 적극적으로 실천해 갔다.

1931년 선학원은 김적음(金寂音) 선사가 인수하면서 침체기를 극복하고 중흥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이 시기는 창설기와 달리 그 명칭도 ‘중앙선원(中央禪院)’으로 변경하고 그 조직 구성을 재편성하여 운영하였다. 이 명칭의 변경은 당시 전국 선원의 대표성을 갖는 위상을 상징한 것이기도 하였다. 당시 중앙선원은 출가자뿐만 아니라 재가자까지 수용할 수 있었던 수행공간이었고, 대중들에게 설법·강화(講話) 등의 행사와 남녀선우회(男女禪友會)와 부인선우회(婦人禪友會)를 조직하여 선풍진작과 대중화에 진력하였다. 아울러 『선원(禪苑』지를 창간하여 선학원을 중심으로 한 불교계의 동향을 적극적으로 소개하였으며, 큰 스님들의 지상법문을 통해 포교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선학원이 청정비구승의 수행풍토 조성과 선원 지원에 대한 노력은 중흥기에 더욱 적극적으로 진행되었다. 특히 선원에 대한 관심이 지극히 소극적이었던 당시 불교계의 상황에서 선학원의 지방 선원과의 유기적 관계와 지원은 한국 불교의 명맥을 유지하는 유일한 부분이기도 하였다.

『선원』지에 소개된 각 사찰의 선원(禪院)은 수행중인 대중의 수가 점차 증가 추세에 이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선학원이 창설될 당시 인적 물적 자원을 아끼지 않았던 사찰들의 선원은 1935년에 이르면 약 368명의 수좌가 수행에 전념하고 있었다. 비록 이들 선원과 선학원의 관계를 구체적으로는 살피기에는 한계를 지니고 있지만, 창설 이래 안정된 수행풍토 속에서 한국불교의 정통성을 수호하고자 했던 선학원의 창설 목적과 그 정신을 지속적으로 실천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후 선학원은 1934년 재단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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