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함(芳銜)이란 방명(芳名)과 같은 뜻이 주로 절집 안에서만 쓰는 독특한 표현이다. 여기서 ‘방(芳)’이란 명예가 꽃같이 아름다운 이름을 가리키며, 타인의 사물을 높인(冠) 경칭(敬稱)으로 쓸 때 붙인다. ‘함(啣, 銜)’이란 관리의 위계를 일컫는다. 방함록(芳啣錄)이란 안거할 때에 안거객들의 직명(職名, 榜目)과 법호(法號), 법명(法名), 나이(年齡), 주소(住所, 本寺名) 등의 방함을 적어둔 서책이자, 절집 안에서 안거 때에 널리 쓰는 방부(房付)의 기록이다. 직명에는 안거 등 절집 안의 대중들이 큰일을 치를 때에 역할을 나눈 소임을 적어 붙인 용상방(龍象榜)을 적는다.

방부는 다른 절의 승려가 남의 절에 가서 좀 있기를 부탁하는 것이다. 수행자일 경우는 여름과 겨울의 결제 철에 선원의 안거에 들 때 ‘방부를 드린다’고 한다. 안거는 ‘와르사’(varsa, 雨) 혹은 ‘와아르시까’(varsika)고 불린다. 말 그대로 3개월간의 우기(雨期)를 일컫는다. 수행자들은 풀이나 나무, 작은 곤충 등을 모르고 밟아 죽일까 저어하여 이 기간에 외출을 삼가하고 동굴이나 사원에 들어가 수행에 전념했다. 이 기간을 ‘우기 안거’ 즉 ‘우안거’라고 했다. 남방 불교권에서는 이것을 ‘우기에 행하는 반성과 학습’이라는 의미에서 안거라고 했다. 북방의 경우는 날씨가 더운 음력 4월 16일로부터 7월 15일까지 약 3개월 남짓 기간에 드는 남방의 하안거뿐만 아니라 날씨가 추운 음력 10월 16일로부터 1월 15일까지 동안거에 든다. 이 기간에는 외출하지 않고 한 곳에 머무르며 오로지 좌선을 중심으로 한 수행에 전념한다.

방함록은 일대사를 해결하기 위해 온몸을 던져 생사고해를 넘어서려는 훤훤 장부들의 꽃다운 이름을 적어두는 기록이므로 세간의 방명록과는 달리 부른다. 자기 부정을 통해 존재의 비실체성을 체득하는 결곡한 삶의 자세에 대한 경칭이기에 세간과 출세간의 명명이 다른 것이다. 방함록은 조선조의 기록에서도 아직 발견되지 않는 한국불교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기록문화의 한 형식이라 할 수 있다. 아마도 조선 말기와 대한 초기의 선풍을 이어준 경허 스님이 만년에 자신의 살림살이를 펼쳐 보이면서 이전의 전통을 복원한 것으로 추정된다. 방함록의 존재는 경허(1846~1912) 스님 이래 대한시대 이후의 일부 기록 속에서만 확인되고 있기 때문이다.

경허 스님은 조선말기와 대한초기 이래 우리나라 선맥의 우이를 잡았던 선지식이다. 때문에 그는 조선불교사의 결론이자 대한불교사의 서론을 장식한 선사로 평가된다. 경허 스님은 대한 팔도를 넘나들며 각종 회상에서 파천황(破天荒)의 법문을 통해 잠들어 있는 조선인과 대한인들을 깨우치려 했다. 동시에 법문(法門)과 점안(點眼) 및 수선결사(修禪結社) 등을 통해 바람 앞의 등불과도 같았던 이 나라 선풍과 조선 및 대한의 위기를 ‘눈 뜬 자의 살림살이’를 통해 돌파하고자 했다. 조선 및 대한 백성들은 모두가 잠들었지만 그는 스스로 깬 자가 되어 이류중행(異類中行)의 가풍으로 국망(國亡)의 위기를 헤쳐 나아가려한 인물이다. 경허 스님의 치열한 법화(法化)와 활달한 행리(行履)는 그에 대한 포폄(褒貶)의 평가를 가져왔고 이후 그는 대한 불교의 뉴스 메이커로서 잊힌 적이 없었다.

경허 스님은 ‘깊고 그윽한 종취’(深玄 宗趣)를 ‘밝고 화려한 문채’(明麗 文彩)를 빌어서 씨줄과 날줄로 선기를 자유자재로 드러낸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법문도 되고 시가도 되고 논문이 되기도 하여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세상에 전해지는 그의 글 일부를 모은 『경허집(鏡虛集)』(선학원, 1943)에 집성되지 못한 글들은 지금도 여러 군데에 흩어져 있다. 『경허집』에 실려 있는 방함 관련 기록은 ‘범어사계명암수선사방함청규(梵魚寺鷄鳴庵修禪社芳啣淸規)’, ‘해인사수선사방함인(海印寺修禪社芳啣引)’, ‘범어사총섭방함록서(梵魚寺總攝芳啣錄序)’, ‘동리산태안사만일회범종단나방함기(桐裏山泰安寺萬日會梵鐘檀那芳啣記)’ 등 모두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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