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죄는 ‘사유의 불능성’, 그 중에서도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의 무능성’이다!”

전체주의에 대한 통렬한 비판으로 유명한 여성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가 인종청소로 불리는 유대인 학살 사건, 일명 ‘홀로코스트’에 연루된 아이히만(Karl Adolf Eichmann 1902~1962)을 상대로 날린 발언이다. 아이히만은 독일 나치스의 친위대 장교로 복무하면서 2차 세계대전 중 유럽 각지에 있는 유대인의 체포와 강제이주를 주도했던 인물이다.

아이히만은 패전 직후 아르헨티나로 도망쳐 숨어 지내다가 붙잡혀 뉘른베르크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 재판에서 대부분의 피고인들은 자신의 범죄를 인정하고 선처를 호소했지만 아이히만은 자신이 무죄라고 주장했다. 그는 재판정에서 “나는 국가의 명령에 따라 유대인을 열심히 이주시켰을 뿐”이라고 항변했다.

이 재판을 지켜 본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발언에 충격을 받고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란 책을 저술한다. 이 책에서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죄가 ‘사유의 불능성’,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의 무능성’에 있다고 지적했다.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깨닫지 못한’ 아이히만이 인종을 청소하고 독일을 정화하며 유대인들을 이주시키는 것, 그 일의 의미를 수용소로 끌려가는 유대인의 입장에서 단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다는 비판이다. 홀로코스트라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이유도 ‘사유의 불능성’,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의 무능성’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란 상식이다. 이 상식을 저버릴 때 우리는 ‘악’의 개념조차 망각하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부패의 고리가 만들어지고 이로 인해 남들이 받아야 할 고통 따윈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이히만은 전체주의가 낳은 불행인자라 할 수 있다. 전체주의가 무엇인가? 아렌트에 의하면 특정 이념과 주장에 사로잡혀 반드시 수반되는 테러에 의존하는 지배형태다.

현재 조계종 권승들이 이러한 전체주의에 매몰돼 있지 않나 성찰해야 한다는 게 필자의 견해다. 타인보다 집단논리에 빠져 제2, 제3의 아이히만을 양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 실례로 <법인관리 및 지원에 관한 법>(이하 법인관리법)과 현하 동국대 사건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먼저 법인관리법과 관련한 수덕사 측 태도다.  법인관리법으로도 선학원을 옭아맬 수 없게 되자 조계종단은 중앙종회에서 <선학원 정상화를 위한 특별법>을 제정해 공포했다. 이처럼 옥상옥의 법을 만들면서 나아가는 배경엔 수덕사가 있다. 수덕사는 선학원 소유의 정혜사와 간월암을 찬탈해 가려는 음모를 숨기지 않은 채 선학원을 옥죄는 데 앞장서고 있다. 지난 2일 특별법에 의해 발족된 선학원정상화추진위 회의에서도 수덕사 문중의 주경 스님과 정범 스님은 대중 스님들의 상식에 입각한 해결책 마련과 대화 주장에 반발하며 강성 발언을 쏟아냈다. 정범 스님은 “분종 두 번째 단계인 수계식을 거행한다”고 선학원을 비난했고 주경 스님은 “멸빈자와 대화하는 게 정서적으로 맞는가?”라며 대화 입장에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추진위원장 법등 스님은 선학원 이사장 법진 스님과의 비공식 만남을 통해서 “조계종과 선학원은 한 뿌리임을 서로 확인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수덕사 측 두 스님은 이러한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선학원이 분종 단계를 밟고 있다고 억지 주장을 계속 펴고 있고 이러한 상황에서 멸빈자와 무슨 대화냐고 힐문한다.

솔직히 멸빈을 누가 시켰는가? 또 선학원 이사장과 주요 이사들이 멸빈의 심판을 당할 만큼 범계자에 해당하는가? 멸빈은 수덕사 문중이 취하고 있는 전체주의에서 나온 테러다. 테러에 의존하고 있는 권력인만큼 남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않는다. 말 그대로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의 무능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선학원 이사장 법진 스님에게 멸빈 심판을 내린 당시 초심호계원장은 “내가 뭘 알아. 위에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다”고 고백했다. 수덕사 측의 테러로 자행된 심판임을 입증하는 초심호계원장의 발언이다.

실제 법인관리법 문제로 종단이나 선학원이 엄청난 상처를 입거나 또는 정말로 결별했다고 할지언정 수덕사는 그 때 가서도 아이히만처럼 자신들에겐 죄가 없다고 주장할 것이 분명하다. 아니 일말의 책임이나 자책감조차도 무시할 게 뻔하다.

총장 선출 문제로 야기된 동국대 이사회의 파행도 마찬가지다. 사립학교법을 무시하며 종단의 정치적 힘을 앞세워 김희옥 총장 후보의 사퇴를 이끌어낸 것도 모자라 정련 스님에 대해서 불명예스럽게 이사장직을 물러나도록 만든 게 모두 종단의 권승들이다. 테러란 법과 원칙과 상식을 저버린 채 이루어지는 상처투성이의 결과물이다. 그래서 두 이사장이 나오게 됐고 판사에게 내 손을 들어달라며 송사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논문표절이 분명히 밝혀졌음에도 총장 후보 보광 스님은 사퇴할 생각이 전혀 없는 듯하다. 종단 권승들이 지켜주기만 하면 학교가 어떤 망신을 사든, 어떤 상처를 입든 총장을 꼭 해야겠다는 집념이다.

이에 대한 피해자는 동국대 구성원이다. 동문들이며 그 가족들이다. 그들이 입어야 할 정신적 상처와 대외적 망신살은 조계종 권승들이 고려하는 대상이 아니다. 왜?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의 무능성’이 그들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배어있는 ‘사유의 불능성’이 향후 어떠한 결과를 초래할지 모른다. 설령 ‘홀로코스트’와 같은 대형참사가 눈앞에 닥친다한들 ‘내 탓’이 아니다. 유대인으로 태어난 게 죄일 뿐이다. 왜 선학원에 몸담아서, 왜 동대인이 되어서, 왜 불교에 귀의해서 이런 일을 당하느냐고 오히려 힐책할 사람들이 지금 조계종 권승들이다.  자신들이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에 대한 자각은 없다.

‘사유의 불능성’ 그 중에서도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 무능성’에 놓여있는 종단 권승들로 인해 교계는 지금 연일 테러의 위험에 노출돼 있는 것이다.

-본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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