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회원가입
참된베풂, 선학원
   
> 뉴스 > 지난연재보기 | 철학 卍행
     
(7) 만 리 먼 장성, 잉어가 전해 준 편지
백성 애한 위로 솟은 장성에는 중국인의 자부심과 긍지 가득
2015년 04월 03일 (금) 09:10:11 김문갑 meastree@naver.com
   
▲ 만리장성의 동쪽 끝인 산해관(왼쪽)과 서쪽 끝인 가욕관

1. 황제, 그리고 만세의 꿈

중국에 최초의 통일제국이 세워졌다. 진시황은 봉건제(封建制)를 철폐하고 군현제(郡縣制)를 실시하였고, 화폐와 도량형, 그리고 문자를 통일시켰다.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에 걸쳐서 단일체제로의 개편이 이루어졌다. 진시황은 불철주야로 일했다. 《한서(漢書)》에 의하면 진시황은 하루에 일석(一石)의 서류를 검토하고 결재했다고 한다. 옛날에는 글자를 죽간(竹簡)에 썼다. 1석은 약 60킬로그램의 무게로 일석의 죽간에는 대략 3만여 글자가 쓰인다고 한다. 《논어(論語)》가 1만자 조금 넘으니, 진시황은 하루에 《논어》를 세 번 정도 읽은 셈이다. 매일 이 정도의 서류를 결재했다고 하면, 비록 상당한 과장이 섞였다고 해도 진시황이 지독한 일벌레였다는 사실은 분명해진다. 그는 통일제국을 꿈꾸었고, 그 꿈의 실현을 위해 온몸을 바쳤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꿈꾸던 세계를 눈앞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마지막으로 자신을 부르는 호칭을 어떻게 바꿀 건지를 물었다. 이에 이사(李斯)를 비롯한 제신들이 논의 끝에 아뢰었다.

“옛날에 삼황(三皇)과 오제(五帝)라는 매우 훌륭한 왕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태황(太皇)이 가장 존귀하다고 하니 이제 태황이라 칭하십시오.”

이 말을 들은 진시황은 이렇게 분부했다.

“나의 업적은 그들 모두를 합한 것보다도 뛰어나다. 이제 삼황오제에서 황(皇)과 제(帝)를 따와 황제(皇帝)라고 칭하라. 짐은 최초의 황제가 되었으니 시황제(始皇帝)라 하고, 후세를 2세 황제, 3세 황제라고 하여 만세(萬世)에 이르도록 하라.” 1)

만세를 누리고자 했던 진시황은 황제를 칭한 지 11년 만에 죽는다. 그리고 진나라는 2세 황제 즉위 후 4년 만에 망한다. 진시황의 꿈은 불과 15년의 일장춘몽이 되고 말았다. 진나라의 멸망과 관련하여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통일천하를 정착시키기 위해서였는지, 아니면 자신의 업적을 과시하기 위해서였는지, 진시황은 수시로 순행(巡行)에 나섰다. 그는 죽음마저 순행 중에 맞이한다. 북쪽 지방을 순무할 때 마침 방사(放士) 노생(盧生)이 장생불사약을 구하겠다며 동해바다에 갔다가 돌아와서는 참위서(讖緯書)를 상주하였다. 거기에는 “진나라를 망하게 할 자는 호(胡)이다〔亡秦者胡也〕”라고 쓰여 있었다. 호는 북쪽에 사는 유목민들을 가리킨다. 특히 당시에는 흉노(匈奴)가 가장 위협적인 세력으로 중앙아시아의 대초원을 누비고 있었다. 이에 진시황은 장군 몽염(蒙恬)으로 하여금 30만 대군을 이끌고 북쪽 호인(胡人)을 치게 한다. 그리고 만리장성(萬里長城) 축조에 나선다.

2. 장성을 쌓아라

진시황 때 세워진 만리장성은 토성(土城)이었다. 흙을 다지는 판축(版築)기법이라 하여 만든 것이다. 그나마 이전에 이미 구축된 성벽을 연결시킨 것이라는 게 정설이다. 이후 지속적인 증·개축을 거쳐 오늘날에 이르렀다. 한무제(漢武帝) 때 서쪽의 둔황에서 동쪽의 발해만까지 연장되었고, 이후 명대(明代)에 와서 동쪽 끝 산해관(山海關)에서 서쪽 가욕관(嘉峪關)까지 총길이 6,000여 km의 장성이 만들어졌다. 특히 명대에 개축한 만리장성은 석성(石城)으로,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내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런데 진나라를 망하게 한 호는 북쪽 오랑캐 호가 아니라, 2세 황제 호해(胡亥)였다. 《사기》에 의하면 시황제의 유언은 본래 맏아들 부소(扶蘇)에게 황위를 물려준다는 것이었는데, 환관 조고(趙高)의 간계에 승상 이사(李斯)가 응하며 유서를 날조해서 호해를 옹립했다고 한다. 이들은 서쪽 변방에서 장성 구축에 여념이 없던 부소에게 거짓조서를 보내 자살케 하고, 몽염 장군 등 공신들을 제거하였다.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한다’는 지록위마(指鹿爲馬)의 고사에서 보듯 호해는 어리석은 군주였다. 그는 진시황릉, 아방궁, 그리고 장성 등의 토목사업에 더 많은 백성들을 투입했다. 결국 민심은 돌아서고 마침내 최초의 통일제국은 다시 찢겨졌다.

이쯤에서 물어보자. 장성은 과연 얼마만큼의 전략적 가치가 있을까? 조금만 생각해 보면 군사적 유용성은 거의 0에 가깝다는 걸 알 수 있다. 장성이란 게 어디든 한 곳이 뚫리는 순간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그러니 거기에 엄청난 인원과 장비와 돈을 투입하는 건 매우 어리석은 짓이다. 이를 당시의 위정자들이 몰랐을 리 없다.

한무제(漢武帝)에 의한 연장 증축은 그런대로 이해할 수 있다 해도, 명대 200여 년 동안 엄청난 물자와 인력을 투입하며 대대적으로 벌어진 증개축은 정말로 이해난감이다. 명나라 3대 황제 영락제가 산해관을 지으면서 시작된 장성 증개축은 거의 명나라와 운명을 같이 한다. 비록 몽고족이 세운 원(元)의 억압에서 벗어나 다시 한족의 중국을 세웠기에 북방 이민족에 대한 경계심이 높은 것을 이해 못 할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명대 내내 엄청난 물자와 인력을 장성에 쏟아 부었다는 건 그야말로 비효율의 극치이다. 몽고가 세계를 제패할 즈음에는 이미 빠른 기동력이 군사적 우위를 점하는 중요한 요소임을 천하가 알게 된다. 성안에 처박혀 적들이 공격해 오길 기다리는 전통적인 공성전(攻城戰)은 이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지 오래였다. 결국 그토록 돈과 시간과 인력을 투입했지만 명이 또 다른 북방 오랑캐인 청(淸)에게 망하는 동안 장성은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청나라 군대는 화살 한 번 쏘지 않은 채 산해관을 통과하여 자금성을 접수한다. 그리고 방치되었다.

3. 천하는 수레의 치수를 같이 하고 문자를 같이 한다

《중용(中庸)》에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천자가 아니면 예(禮)를 논하지 못하고, 제도를 제정하지 못하며, 문자를 정하지 못한다. 이제 천하는 수레의 바퀴 치수를 같이하고, 글은 문자를 같이하고, 행위는 윤리규범을 같이 한다.” 2)

앞에서 말한 것처럼 진시황은 도량형을 통일하였다. 수레 두 바퀴의 폭도 통일하였고, 그에 맞추어 길을 닦았다. 이를 차동궤(車同軌)라고 한다. 이제 천하는 어디든 막힘없이 수레를 몰고 갈 수 있게 되었다. 그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오늘날 유라시아 횡단열차가 개통되어, 부산에서 기차를 타고 유럽을 갈 수 있게 된다면 우리의 삶이 어떻게 바뀔까? 이런 상상만으로도 수레바퀴의 폭을 통일시키고, 그에 맞춰 길을 뚫은 진시황의 혜안이 얼마나 시대를 앞섰는지 헤아릴 수 있다.

문자의 통일, 이른바 서동문(書同文)도 마찬가지이다. 만약 전 세계가 비록 말은 다를지라도 하나의 문자를 사용한다면 어떻게 될까? 컴퓨터 기술이 발달하여 음성을 문자로 즉각 변환시켜주는 프로그램이 보급되었는데, 만약 전 세계가 동일한 문자를 사용한다면, 세계를 돌아다니는데 아무런 장애가 없을 것이다. 더구나 법규나 제도마저 같아서 혼란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즉 행동륜(行同倫)이 더불어 시행된다면 정말로 세상엔 어떤 일이 벌어질까?

예를 들어 전 세계의 모든 차가 왼쪽에 운전석이 있고, 똑같이 우측통행을 한다면 일본에 가든, 영국에 가든, 조금도 불편함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법이 다르고 관습이 달라 벌어지는 안 좋은 상황은 거의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멋있다. 상상만으로도 흥분된다.

2,500여 년 전 이런 세계를 꿈꾸었던 사람이 있었다. 공자(孔子)의 손자이며 《중용》의 저자로 전해지는 자사(子思)도 그런 사람이었는지 모른다.

진시황은 꿈만 꾸지 않았다. 그는 때가 이르자 과감하게 실행에 옮겼다. 그의 통일 정책은 정치적 의미를 넘어 경제를 활성화하고 문화교류를 촉진시키는 밑거름이 되었다. 이제 중국문명은 본격적으로 세계문명의 주인공으로 도약할 발판 위에 서게 된 것이다. 하지만 시황제의 꿈이 악몽이었음을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4. 만리장성, 만 리 먼 장성

만리장성과 연관된 전설과 이야기는 부지기수로 많다. 그 중에서 유명한 전설이 맹강녀(孟姜女) 이야기이다.

제(齊)나라 여인 맹강녀는 신혼의 달콤함이 가시기도 전에 남편이 장성 축조에 징발된다. 남편의 소식도 모른 채 근심 걱정으로 지새다가 남편의 겨울옷을 지어 장성으로 찾아 갔다. 그러나 남편은 이미 죽고 시신조차 찾을 수 없었다. 맹강녀는 성벽에 쓰러져 며칠을 통곡하였다. 그러자 성벽이 와르르 무너지고 죽은 남편의 유골이 나왔다. 맹강녀는 남편의 유골을 수습하고는 물에 투신하여 남편을 따랐다고 한다.

이 맹강녀의 전설은 시간이 지나면서 윤색되고 또 각색되어 하나의 서사극을 만들었다. 어찌 중국뿐이랴. 조선의 선비들도 남편 사후 그리 길지 않은 시간에 죽은 여인이 있으면 으레 이 맹강녀의 이야기로 슬픔을 전하곤 하였다.

푸른 강가의 풀 靑靑河畔草
먼 길 가신 님 생각 그치지 않네 綿綿思遠道
길이 얼마나 먼지 생각조차 못하겠는데 遠道不可思
지난 밤 꿈에서 님을 보았네 宿昔夢見之

꿈속에선 내 곁에 계셨는데 夢見在我傍
문득 잠 깨니 타향에 계시네 忽覺在他鄕
타향도 각자 다른 고을이라 他鄕各異縣
이곳저곳 전전하며 만나지 못하네 展轉不相見

시든 뽕나무도 달라진 바람을 느끼고 枯桑知天風
바닷물도 추워진 날을 알거늘 海水知天寒
문안으로 들어가 자기 사람만 좋아하니 入門各自媚
누가 함께 말 벗 되어 주리오 誰肯相爲言

나그네 멀리서 찾아와 客從遠方來
내게 잉어 두 마리 주기에 遺我雙鯉魚
아이 불러 삶았더니 呼兒烹鯉魚
뱃속에 편지 한통 있었네 中有尺素書

꿇어 앉아 편지 읽는데 長跪讀素書
편지는 어떤 내용인가 書中竟何如
먼저 밥 잘 먹는다 하고는 上言加餐飯
오래 너무 그립다고 끝맺네 下言長相憶

《악부시집(樂府詩集)》에 실린 〈음마장성굴행(飮馬長城窟行)〉이라는 노래 가사이다. 서쪽 변방 먼 길을 떠난 병사는 장성에 도착하여 말에게 물을 먹이고, 남편을 향한 부인의 근심과 그리움이 애절하다. 이 가사에서 잉어 뱃속에서 나왔다는 편지 이야기는 워낙 유명해서 조선 선비들의 문집에도 대개 열댓 번은 나올 성 싶다. 이 노래가 불리어지던 한대(漢代)에는 아직 종이가 아직 없었다. 작은 나무판자에 간단한 내용을 써서 전하던 일종의 엽서를 척독(尺牘)이라 하고, 척소서(尺素書)는 한 자나 되는 긴 편지인데, 장성축조에 끌려 간 인부가 한 자나 되는 비단에 편지를 쓸 일은 없을 터. 나무 조각에 깨알같이 적힌 내용이 만 리보다 긴 마음을 전하는 것이리라.

장성 축조에 적극적으로 나선 황제는 진시황제, 한무제, 영락제를 꼽을 수 있다. 이들은 열정적이고, 저돌적이며, 카리스마가 넘쳤고, 무엇보다 대단히 강한 권력욕의 소유자들이었다. 이들은 주저 없이 장성축조에 나섰고, 그때마다 백성들은 눈물을 뿌려야만 했다.

하지만 장성에는 중국인의 자부심과 긍지 또한 가득하다. 독선적인 권력에 문화적 우월감이 버무려져 백성들의 애한 위로 솟아있다. 그 모순성이 장성을 장성이게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한 번에 풀어내기에는 벅찬 이야기이다.

주(註) -----
1) 《사기》, <진시황본기>
2) 《중용》

김문갑 | 철학박사, 충남대 한자문화연구소 연구교수

김문갑의 다른기사 보기  
ⓒ 불교저널(http://www.buddhismjournal.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전체기사의견(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400byte)
   * 욕설 등 인신공격성 글과 광고성 글은 사전 통보 없이 삭제합니다.
전체기사의견(0)
신문사소개 | 기사제보 | 광고문의 | 불편신고 |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메일무단수집거부 | 청소년보호정책
03061 서울특별시 종로구 윤보선길 35-4 (안국동) 재단법인 선학원 내 | 전화 02)720-6630 | 전송 02)734-9622
등록번호 서울특별시 아00856 | 등록일자 2009년 5월 8일 | 발행일자 매주 목요일 | 발행인 최종진 | 편집인 박근직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창윤
Copyright 2009 불교저널. All rights reserved. mail to budjn2009@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