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염불회 계보를 잇는 한국불교의 마지막 어산장 지봉당 석산(智峯堂 石山)대종사가 15일 세연(世緣)을 접었다.

석산 대종사는 일제 식민 통치 기간 중 조국독립의 강렬한 염원이 3·1독립 만세운동으로 타오르던 1919년 기미년에 강원도 명주군(지금의 강릉)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불법에 뜻을 품었던 대종사는 16세에 처음 강릉 법왕사로 출가하였고 17세에 안변 석왕사에서 본격적인 불교공부를 시작하였으나 큰 인연을 만나지 못하다가 1937년 19세 때 건봉사에서 보광 스님을 만나 제자로서의 격식을 갖추어 그해 가을 사미계를 수지했다. 보광 스님은 만일염불회의 법통을 잇고 있는 관준 →만화 →응화의 법을 이은 대련 스님의 제자다. 은사와 같은 일본 대정대학을 나온 학승으로 해방 이후 동국대 교수를 지냈다.

▲ 신도들을 제접하고 있는 지봉당 석산 대종사.
▲ 석산 대종사의 유품인 안경과 사경해 놓은 공책.

석산 대종사는 보광 스님에게 염불을 배운 가장 뛰어난 제자로 이름을 날렸다. 선종 계통에 ‘남-진제 북-송담’이 있다면 염불 계통에선 ‘남-석산 북-기종’으로 불릴 만큼 대종사의 어산 실력은 국보급으로 정평을 얻었다.

교학 쪽으로는 만해 스님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만해 스님은 당시에 건봉사 조실로 계시며 교와 선을 아우르는 법문을 수시로 열어 후학들을 일깨웠는데 대종사가 선과 교와 염불을 통섭한 데에는 은사 보광 스님과 조실 만해 스님의 영향이 컸다.

대종사는 또한 6·25전쟁이 끝나고 1954년부터 7년간 범어사에서 동산 스님을 시봉했다. 대종사의 염불실력에 대해선 동산 스님도 감탄할 정도였다. 당시 도량석 목탁을 쳤던 대종사는 목탁소리에 가장 먼저 일어나 각 당우를 일일이 돌아다니며 염불하고 손수 빗자루를 들고 도량청소를 하시는 동산 스님의 실천행을 통해 더욱 자신의 법기를 닦아나갔다.

이러한 큰스님들의 영향에 힘입어 대종사는 입적하기 전까지 단 하루도 염불과 기도수행을 거른 적이 없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천수경과 나무아미타불 정근을 하고 낮에는 <금강경>을 사경하며 노구에도 불구하고 방일함을 경계하며 늘 수행심을 유지했다.

▲ 경내를 포행 중인 석산 대종사.

대종사는 1960년 삼각산 복천암이라는 암자가 있던 도량에 지금의 정법사를 세우고 평생의 주석처(住錫處)로 삼았다. 서울 도심 한복판에 자리한 도량이지만 대종사는 단 한번도 출가자로서의 본분을 저버리지 않았다. 특히 신도들의 시주가 허투루 쓰이는 것에 대해 크게 경계했다.

대종사는 “출가자가 무릇 시주자의 은혜를 갚는 길은 도를 이루어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 첫 번째이나 먼저 계를 철저히 지켜야 한다”면서 계행존숭(戒行尊崇)에 모범을 보였다. 지계란 거창한 발심이 아니다. 자신의 방을 직접 청소하고 혼자 있더라도 절대 자세를 흩트리는 법이 없었다.

출가 수행자로서 대종사의 이러한 엄격한 자기관리는 세납 90이 넘어도 변함 없이 이어져 매일같이 염불정근, 포행, 축원, 사경 등을 거르는 일이 없었다. 지금도 지봉당 문과 벽면엔 대종사가 펜으로 쓴 사경들로 빼곡하다.

▲ 석산 대종사가 지난 해 예수재에서 축원을 올리고 있다.

특히 대종사는 쓸데없이 밖으로 나도는 일을 싫어했다. 1977~91년 선학원 이사를 지낸 것이 전부다. 1980년대 중반 인도 부처님 4대 성지를 다녀온 이후엔 외국에 나가 본 일이 없거니와 스스로 주석처인 정법사를 무문관으로 삼았으니 사시사철 밤낮으로 365일이 안거였다.

노구에도 불구하고 혹독한 정진이 계속되자 결국 대종사의 법체는 2015년 겨울에서 따스한 봄을 맞기 전 양력 3월 15일 홀연히 임종게를 남기고 원적에 들게 되니 세납 97세요 법랍 78세다.

대종사는 상좌로 대한불교(재)선학원 이사장이자 정법사 주지 법진 스님과 법정 스님 두 명과 손상좌로 상적 묘적 공적 수정 능화 여산 스님이 있다. 

-김종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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