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혜로운 자는 법을 만들고 어리석은 자는 법에 통제된다

변법(變法)이란 틀을 바꾸는 것이다. 중국역사에서 변법은 두 번 등장한다. 첫째는 지방분권적 봉건제(封建制)에서 중앙집권적 군현제(郡縣制)로 바뀌는 것이다. 춘추전국시대는 이 패러다임이 바뀌는 진통의 시간이었다. 진시황제에 의해 최초의 통일왕국이 세워지기 전까지 중국은 정전제(丁田制)를 기초로 하는 신분제 사회였다. 제후나 대부 등은 일정한 토지를 기반으로 권력을 세습하였다. 나라는 천자를 중심으로 체계를 갖추었으나 이 질서는 매우 느슨한 것이었다. 권력은 분산되었고, 자치가 허용되었다.

이런 구질서가 무너지고 강력한 절대군주가 등장하여 통일된 질서체계를 세우는 것이 일차 변법이다. 철기의 광범위한 보급은 생산력을 증가시켰고, 이는 곧 강력한 왕권을 가능케 하는 에너지였다. 나라는 군(郡)과 현(縣) 등과 같은 행정단위로 구획되고 각 행정단위에는 지방관을 파견하여 하나의 지배체제로 통일하였다. 그 지배체제의 정점에는 황제라는 이름의 절대 권력자가 있다.

대표적인 법가사상가 상앙. 그의 변법은 새로운 지배질서를 향한 출발이었다.

▲ 대표적인 법가사상가 상앙. 그의 변법은 새로운 지배질서를 향한 출발이었다.
상앙(商鞅, BC395〜BC338)은 위(衛)나라 공족(公族)출신이다. 본래의 이름은 위앙(衛鞅), 혹은 공손앙(公孫鞅)인데, 진(秦)나라에서 큰 공을 세워 봉지(封地)를 하사받고 상군(商君)에 봉해진 후로 상앙으로 불리게 된다.

상앙이 위(魏)나라의 재상인 공숙좌(公叔座)의 중서자(中庶子)로 있을 때의 일이다. 중서자란 대부가문의 집사쯤 되는 벼슬이다. 마침 공숙좌가 병이 들어 위 혜왕(魏惠王)이 직접 문병을 와서 물었다. “만일 공숙의 병이 회복되지 못한다면 장차 사직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에 공숙좌가 대답하였다. “제 집의 중서자로 있는 공손앙이 나이는 비록 젊지만 능력이 특출하니 대왕께서는 그에게 맡기십시오.” 공숙좌의 대답을 들은 위 혜왕은 묵묵부답,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왕이 일어날 때가 되자 공숙좌는 주변을 물리치고 혜왕에게 긴밀히 말하였다. “대왕께서 공손앙을 기용하지 않으신다면 반드시 그를 죽여 그가 국경을 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혜왕은 알았다고 말하고는 궁으로 돌아갔다. 왕이 돌아가자 공숙좌는 바로 상앙을 불렀다. “너는 즉시 떠나거라. 내가 왕께 너를 나의 후임으로 천거했는데, 왕께서 내 말을 듣는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너를 기용하지 않으려면 죽이라고 했다. 그러니 너는 빨리 떠나거라.” 그러나 상앙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저는 떠나지 않겠습니다. 대왕께서 선생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저를 쓰지 않았는데, 다시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저를 죽이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공숙좌가 죽고, 진(秦)나라 효공(孝公)이 널리 인재를 구한다는 소식이 상앙의 귀에도 들어왔다. 상앙은 진나라로 들어가 효공을 만나고자 하였다. 경감(景監)을 통하여 효공과 대면하여 여러 이야기를 나누는데, 효공은 때로 졸며 듣지 않았다. 상앙이 물러나자 효공은 경감을 불러 책망하였다. “경은 어찌하여 그런 황당한 사람을 소개한단 말이오.”

경감의 말을 들은 상앙은 다시 효공을 알현하길 청하였다. 두 번째 만남은 첫 번째 보다는 훨씬 좋아졌으나 효공은 여전히 불만이었다. 세 번째 알현에서 효공은 드디어 반가운 기색을 드러내며 경감을 칭찬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상앙을 등용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다시 네 번째 만남을 갖게 되었을 때, 효공은 상앙의 말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무릎이 앞으로 나오는 것도 알지 못할 정도였다. 효공은 며칠이고 상앙과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피곤해 하지도 싫증을 내지도 않았다. 경감이 물었다. “그대는 임금께 뭐라 말하였기에 처음에는 나를 책망하더니, 지금은 저토록 좋아하시는 거요?” 그러자 상앙이 대답하였다.

“처음에는 제왕(帝王)의 도(道)를 말하였더니 왕께서는 졸기만 할 뿐 들으려 하지 않았소, 두 번째는 왕도(王道)에 대해 말하니 왕께서는 조금 나아지셨으나 여전히 만족해하지 않으셨소, 세 번째는 패도(覇道)를 말했는데 매우 좋아하셨지요, 마지막으로 부국강병(富國强兵)의 길을 말하자 왕께서 저토록 좋아하시는 거요.”1)

효공의 승인 아래 상앙은 강력한 부국강병책을 시행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그의 변법은 조정의 결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감룡(甘龍)이란 대신은, “성인은 백성들의 풍속을 고치지 않고 교화하며, 지혜로운 자는 법을 고치지 않고 다스립니다. 이리하여야 관리는 수고롭지 않고 백성은 편안해 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상앙은 이렇게 반론한다.

“보통 사람들은 관례에 안주하고, 학자들은 배운 것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지혜로운 자는 법을 만들고 어리석은 자는 법의 통제를 받는 게 이치입니다.” 2)

마침내 진 효공은 상앙을 좌서장(左書長)에 임명하여 옛 제도를 바꾸고 새 법을 제정하여 시행토록 하였다. 중국역사에서 일차 변법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2. 나라를 조직하고 백성을 통제하라

상앙은 열 집을 십(什)으로, 다섯 집을 오(伍)로 묶어 부세(賦稅)와 병역(兵役)의 의무는 물론, 범죄에 대한 책임도 연좌(連坐)하였다. 범죄자를 고발한 자는 상을 주고 숨긴 자는 허리를 베었다. 백성 중에 성인이 되었는데도 분가하지 않으면 세금을 두 배로 물렸다. 농업을 장려하여 곡식을 많이 수확하거나 비단을 많이 짜면 상을 내리고, 반대로 게으르고 가난한 자는 체포하여 관비로 삼았다. 귀족이든 평민이든 공(功)의 대소(大小)를 헤아려 상을 주고, 죄(罪)의 경중(輕重)을 따져 처벌하였다. 비록 왕족이나 귀족일지라도 예외는 없었다.

상앙은 신법을 공포하고 시행하기에 앞서 3장(丈)이나 되는 나무를 남문에 세워놓았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말하였다. “이것을 북문에 옮겨놓는 자에게는 10금을 주겠다.” 하지만 사람들은 웅성거리며 옮기려하지 않았다. 그러자 상앙은 다시 말하였다. “이것을 북문으로 옮기는 자에게는 50금을 주겠다.” 한 사람이 나무를 옮기자 상앙은 그 자리에서 50금을 주었다.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는 이목지신(移木之信)의 고사를 만들며, 상앙은 새로운 법을 선포하였다.

상앙의 신법은 진나라가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룰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철저한 통제 하에 백성과 토지를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었다. 상앙의 신법에서 주목되는 부분이 세 가지 있다. 첫째는 백성들에 대한 효율적인 통제 시스템이다. 신법에 의하여 백성은 마치 군대와도 같이 조직되었다. 이런 피라미드 조직은 상명하달이 원활하고 군역과 부세에 매우 효율적이었다. 특히 연좌제는 매우 효율적인 감시시스템으로서 백성들은 알아서 법을 지켰다.

둘째는 성과주의이다. 상과 벌은 철저히 그가 이룬 성과에 의해 계량되었다. 이런 성과주의는 한편으론 개인의 능력을 극대화함으로써 국가적 효율성을 높이면서, 다른 한편으론 매우 비효율적인 전통적 신분질서를 와해시키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이제 귀족들은 중앙의 조정으로 들어와 왕의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도태되었다.

세 번째는 새로운 체제에 맞는 새로운 관념을 심어주는 것이다. 전통적인 농경사회에서 노동은 자연현상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밭 갈고 씨 뿌리고, 그리고 기다리는 게 전부라고 하여도 과언은 아니다. 그러기에 요 임금이 다스리던 시절 사람들은, “해가 뜨면 밭에 나가 일하고 해가 지면 들어와 쉬네. 밭 갈아 먹고, 우물 파 마시는데, 임금의 힘이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라는 격양가(擊壤歌)를 부르며 세월아 네월아 하였다. 천성이 게을러서가 아니라 게으름이 무엇인지를 잘 몰랐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단단한 철제 농기구는 척박한 땅도 개간하여 농사지을 수 있게 하였다. 생산량의 증대는 부강한 나라로 가는 기초이다. 부국강병을 위해 백성들은 더 많은 노동을 하여야만 했다. 사람들은 해뜨기 전에 일어나야 했고, 해진 후에도 길쌈을 매야 했다. 빈 땅이 그대로 놀고 있으면 처벌되었다. 국가는 많은 물자를 생산해 낸 사람들에겐 상을 주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관비로 삼았다. 이제 게으름은 죄가 되었다. 한가로운 삶이 나태라는 범죄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이런 일련의 장치들은 단일 지배체제를 위한 불가피한 것들이다. 상벌주의는 능력자를 모으고, 세습귀족들을 쫓아내는 제도였다. 예전 지방분권적 봉건제 시대에는 지역별로 알아서 살았다. 귀족들은 그들 가문의 오랜 터전을 기반으로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을 갖고 있었다. 왕이 나서서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절대왕권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세습 귀족들을 해체시켜야만 한다. 이게 상앙이 해야 할 첫 번째 과제였다. 이어 십오제(什伍制)는 백성을 조직하고 통제하는 가장 효율적인 제도였다. 단 한 명의 백성도 빠져나갈 수 없는 총총한 피라미드구조가 완성되면서 왕의 명령은 그대로 시골구석까지 내려갈 수 있게 되었다. 강력한 통제시스템이야말로 부국강병을 위한 초석이었던 것이다.

이 모든 조직을 유지하고 운영하려면 막대한 비용이 들어간다. 세금은 이 비용을 충당하기 위한 도구이다. 그러므로 세금이 많이 걷힌다는 것은 곧 나라와 왕의 세력이 그만큼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맹자의 “백 리의 땅만 있어도 천하의 왕자(王者)가 될 수 있다”는 말은 이제 역사 저 편으로 사라지게 된 것이다. 일개 군현만도 못한 백리의 땅으로는 결코 천하를 상대로 호령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세금을 많이 걷으려면 그만큼 생산이 많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여러 제도와 방안이 모색되는 것 또한 당연하다. 상앙과 같은 위나라 사람이며 초기 법가사상가인 오기(吳起)도 초(楚)나라에서 서하(西河)의 태수가 되어 빈터를 놀리지 않고 뽕나무를 심어 양잠을 장려했다. 백성들을 부유해졌고 나라는 부강해졌다. 동시에 근면이 표창되고 나태는 죄가 되었다. 이제 세상은 훨씬 더 풍요로워졌지만 사람들은 더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3. 새로운 지배질서

은(殷)나라가 망하고 주(周)나라가 섰다. 이 말은 천자(天子)의 나라가 은나라에서 주나라로 바뀌었다는 걸 의미한다. 주(周) 천하를 세우는 일등 공신 중 한 명이 바로 강태공(姜太公) 여상(呂尙)이다. 여상은 문왕(文王)과 무왕(武王) 2대를 걸치며 큰 공을 세우고 마침내 제(齊)나라의 제후(諸侯)로 봉해졌다.

제나라에는 광율(狂矞)과 화사(華士)라는 은사(隱士) 형제가 동해에 살고 있었다. 형제는 노래했다. “천자의 신하가 되지도 않고, 제후의 벗이 되지도 않는다. 농사지어 먹고 우물 파 마시니 남에게서 구할 게 없다. 위로부터 받은 작위도 없고 군주가 주는 봉록도 없으니, 벼슬 살 일도 없고 내 힘으로 농사지으며 살아가노라.”라고 하였다. 그러자 여상이 영구(營丘)에 이르러 사람을 보내 이들을 잡아 죽였다. 여상이 부임하며 시행한 첫 처벌이다. 이 소식을 들은 주공(周公)은 여상에게 그 두 사람은 모두 현인인데 왜 죽였냐고 물었다. 여상이 말했다.

“그자들이 천자의 신하가 되지 않겠다면 저도 그들을 신하로 삼을 수 없습니다. 제후의 벗이 되지도 않겠다고 하니 저 또한 그들을 활용할 수 없습니다. 자기들 손으로 농사를 짓고 우물을 파서 먹고 마시겠다고 하니 상벌도 그들에게는 소용없습니다. 그리고 위로 작위가 없으니 비록 지혜가 있다한들 제게는 도움이 되지 않으며, 또 군주의 녹봉도 바라지 않으니 비록 현명하다한들 제게는 공이 되지 않습니다. 벼슬하지 않으면 다스릴 수 없고, 일을 맡지 않으면 충성할 수 없습니다. 선왕이 신하와 백성을 부릴 수 있는 것은 작위와 봉록, 아니면 상과 벌인데 지금 이 네 가지를 갖고도 그들을 부릴 수 없다면 저는 장차 누구의 군주가 되겠습니까?3)

지배체제 속으로 편입되길 거부한다면 죽이는 게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예전에는 왕이 맘에 들지 않으면 사람들은 떠났다.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그랬고, 공자(孔子) 또한 그랬다. 하지만 이제 통일제국의 중앙집권체제 하에서 왕이 싫다고 떠나는 일은 불가능해졌다.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는 어려운 일이 되었다. 후세로 내려올수록 그 정도는 더욱 심하여서 본인 한 사람의 죽음으로 그치지 않았다. 멸족지화를 염려하지 않고는 감히 떠난다는 말은 하지 못한다. 평생을 왕에게 충성을 다하고 늘그막에 시골에 은거하는 일 또한 성은이 내려와야 하는 게 그냥 수사(修辭)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명(明)나라의 세 번째 황제 영락제(永樂帝)는 조카 건문제(建文帝)를 몰아내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자신의 황제 즉위조서를 건문제의 스승이자 당대의 존경받는 학자인 방효유(方孝孺, 1357〜1402)에게 쓰도록 하였다. 방효유는 잠시 생각하다 붓을 들었다. “연적찬위(燕賊簒位)!” 연(燕)나라 도적이 황제의 자리를 찬탈하다! 연나라 도적이란 곧 연왕이던 영락제 주체(朱棣)를 가리킨다. 방효유가 쓴 조서를 본 영락제는 분기탱천, 소리쳤다. “네가 정녕 구족을 멸하여야 말을 듣겠느냐?” 방효유는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고 말했다. “구족이 아니라 십족이 멸한다 해도 역적과 손을 잡을 수는 없다.” 영락제는 정말로 십족을 멸했다. 방효유의 친가는 물론 사돈에 외가 친척까지 모조리 잡아 죽이고, 제자와 친구 선후배 등 방효유와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으면 십족이라 하여 죽였다. 870여 명이 이 일에 연좌되어 죽었다.

중앙집권적 지배체제는 이렇게 피를 흘리며 세워졌다. 따지고 보면 춘추전국시대, 백화제방(百花齊放) 백가쟁명(百家爭鳴)의 시대에 그 시대의 요구에 정확히 응한 사상가들은 오직 법가(法家)가 유일하다. 유가(儒家)와 도가(道家), 묵가(墨家)와 명가(名家), 그리고 손자병법의 병가(兵家), 농가(農家) 등등의 제자백가(諸子百家)들 중에서 오직 법가만이 시대의 변화를 똑바로 보았고 정확히 응수하였다.

그들의 혜안은 그들로 하여금 살아서 ‘일인지하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의 자리에 올라 부귀영화를 누리게 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위에 있던 단 한 사람에 의해 개처럼 죽었다. 진나라에서 상앙은 거열형을 당해 온몸이 찢겨 죽었고, 초나라에서 오기는 화살과 창 세례를 받아 고슴도치가 되어 죽었다. 진시황제를 도와 천하통일의 일등공신이 된 이사(李斯)는 저자에서 아들과 함께 목이 잘렸고, 한비자(韓非子)는 옥중에서 자살하였다. 그리고 백성들은 부세와 부역의 의무에서 허리가 휘었다. 새로운 지배질서는 그렇게 모두를 노예로 만들며 찬란히 세워졌다.

주) -----

1) 《사기(史記)》 〈상군열전(商君列傳)〉
2) 위의 책
3) 《한비자(韓非子)》 〈외저설ㆍ우(外儲說右)〉

김문갑 | 철학박사, 충남대 한자문화연구소 연구교수

저작권자 © 불교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