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열반에 들어가는 보살행으로 《열반경》에서는 오행을 설하고 있다. 오행이란 병행(病行)·성행(聖行)·범행(梵行)·천행(天行)·영아행(嬰兒行)을 말한다. 병행이란 보살이 중생과 평등하다는 마음에서 번뇌의 병이 있는 중생과 더불어 이들의 번뇌의 괴로움을 함께 하는 행이다. 여래는 병이 없지만 중생이 병이 있으므로 방편으로 병에 걸려 아파하는 보살행이다. 성행이란 계·정·혜에 의해서 닦는 보살의 성스러운 수행을 말한다. 범행이란 십이부경 청정 계행 등을 닦아 중생의 괴로움을 없애주고, 즐거움을 주는 행이다. 천행이란 보살이 천연의 이치에 의해서 일을 이루듯이 중생을 제도하는 훌륭한 행을 말한다. 영아행이란 어린아이가 괴로움과 즐거움, 사리분별을 하지 못하듯이 보살은 평등하게 대하여 작은 선행으로 제도하는 것을 말한다.

이중에서 이번 호에는 영아행에 대해 알아본다. 영아는 어린아이들이니 인(人)·천(天)·이승(二乘)들의 지혜와 행은 보살에 비해서 얕고 작으므로 어린아이의 지혜와 행동에 비유한 것이다. 여래도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방편으로 영아의 선행(善行)을 베풀게 됨을 말한다.

《열반경》에서는 원만한 행으로서의 영아행과 치우친 행으로서의 영아행을 밝히고 있다.

먼저, 원만한 행으로서의 영아행을 보기로 한다. 어린 영아들의 본심에서는 첫째 치우친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不能起〕, 둘째 좋고 나쁨에 집착하여 머무는 바가 없고〔不能住〕, 셋째 마음이 오락가락하지 않고〔不能來〕, 넷째 말로 다하지 않음〔不能語〕이라고 한다.

영아행이 대열반행이 될 수 있는 것은 첫째 여래는 제법의 모습에 대해서 치우침이 없이 항상된 마음으로 대하니 상(常)을 뜻한다. 그러므로 보살들은 보이고, 들리고, 냄새나고, 맛보고, 감촉하고, 느끼는 것에 대해서 차별상을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집착하여 머물지 않으므로 세상사에 물들지 않고 생사 열반에 머무는 바가 없으니 정(淨)을 뜻한다. 세상에 살다보면 타성에 젖어서 점점 탐욕에 물들어 집착하게 되니 보살은 영아와 같이 청정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마음이 오고감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래의 몸과 행동이 동요하지 않음이니 여래는 이미 열반에 들어 있어서 오고감이 없는 것처럼 마음의 주인공인 아(我)가 있다. 보살도 이익과 권력에 마음을 빼앗겨 마음이 오락가락하면 악업을 짓게 되니 진심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넷째 말로 다하지 않음이니 여래가 모든 중생을 위하여 법을 설하지만 진실로 보면 말하는 것이 없다고 한다. 말로 다할 수 없다는 것은 열반적정이나 부처님의 깨달음의 경지이므로 낙(樂)에 비유한다. 어린 영아는 말로 다할 수 없으니 비록 말을 하더라도 실로 마음이 다 들어 있는 것이 아니다. 여래도 말없음 속에 비밀의 법장이 들어있으니 비록 말을 하더라도 중생들이 알지 못하므로 말로 다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치우친 행으로서의 영아행을 들어본다.

《열반경》에서는 치우친 영아행을 다섯 가지로 설하고 있다. 첫째, 대자영아행(大字嬰兒行)이니 ‘큰 글자 영아행’이다. ‘대자’란 여래의 법문을 뜻하는데 반자교(半字敎), 만자교(滿字敎)와 비슷한 의미이다. 곧 큰 글자란 뜻으로 화(和)와 바(婆)를 가리키고, ‘화’는 무상법문을, ‘바’는 항상하는 법문을 뜻한다. 보살이 유위의 반자교 무상법을 설하여 영원한 법을 얻게 한다는 것이다.

둘째, 무지영아행(無知嬰兒行)이니 ‘알지 못하는 영아행’이다, 어린 아이는 괴로움과 즐거움, 낮과 밤, 아버지 어머니를 알지 못한다. 보살도 이와 같아서 중생을 위하여 괴로움과 즐거움을 보지 않고, 낮과 밤이 없으며, 아버지나 어머니가 친하고 친하지 않음을 구별함이 없다. 이러한 치우침과 차별을 알지 못하고 모든 중생에게 평등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셋째, 부작영아행(不作嬰兒行)이니 ‘지음이 없는 영아행’이다. 어린 아이는 크고 작은 여러 가지 일을 짓지 못한다. 큰일이란 나고 죽은 업이니 오역죄 등과 같은 일이고, 작은 일은 이승의 마음이다. 보살은 이런 악업을 짓지 않고 보리심에서 물러나서 성문 벽지불을 짓지 않는다.

넷째, 황엽영아행(黃葉嬰兒行)이니 ‘낙엽을 주는 영아행’이다. 어린 아이가 울 때에 그 부모가 누런 버들잎을 주면서 돈이라고 하면서 달래면 아이는 정말 돈일줄 생각하고 울지 않는다. 그러나 버들잎은 실제 돈이 아니니, 이와 같이 부모는 때로는 나무로 만든 소와 말, 남녀 인형 등으로 달래면 아이는 참인줄로 생각하므로 어린 아이라고 한다. 여래도 이와 같아서 중생들이 악업을 지으려고 하면 그들을 위하여 천상이 항상 즐겁고 청정하고 단정하고 자재하고 훌륭한 궁전에서 오욕락을 받으며 육근으로 상대하는 것들이 모두 즐거운 곳이라고 설한다. 중생들은 즐거운 일을 들은 까닭에 부러워하는 마음을 품고 악업을 짓지 않고 천상에 태어나 선업을 짓게 된다. 무상하고 영원한 낙(樂)이 없으며 영원한 아(我)가 없고 구경의 청정한 곳이 아니지만, 방편으로 이와 같이 설한다는 것이다.

다섯째, 흔염영아행(欣厭嬰兒行)이니 ‘좋고 싫은 영아행’이다. 어떤 중생이 나고 죽음을 싫어할 때 여래가 이승(二乘)의 도를 말하거니와 실제로는 이승의 실상이 없는 것인데, 이승법으로 인하여 나고 죽는 허물을 알고 열반의 낙을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중생들이 끊을 것과 끊지 못할 것이 있고, 참된 것과 참되지 않은 것이 있으며, 얻을 것과 얻지 못할 것이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여래는 영아행을 통하여 어린 아이에게 돈이 아닌데 돈이라 하고, 청정하지 않은 것을 청정하다고 설하는데 이는 제일의 진리에 있는 여래가 중생으로 하여금 능히 도를 내는 인연을 위하여 이와 같이 설한 것이다.

《법화경》에서는 “여래의 방에 들어가서 여래의 옷을 입고 여래의 자리에 앉아서 사부대중을 위하여 이 경을 널리 설해야 한다.”고 한다. 곧 대자비심이라는 여래의 방에 들어가서, 인욕이라는 여래의 옷을 입고, 차별심 없는 공(空)의 자리에 앉아서 법을 펴야 한다고 하였다. 천태의 《법화현의》에서는 이를 《열반경》 오행에 배대하여 ‘여래의 방’은 자비의 기쁨이니 범행(梵行)에 배대하고, ‘여래의 좌(座)’란 일체법(一切法)의 공(空)함을 아는 마음이니 원만한 천행(天行)에 배대하였으며, ‘여래의 의(衣)’란 인욕(忍辱)의 마음이니 병행(病行)의 마음에 배대하고, 이를 유화(柔和)심으로 보면 영아행(嬰兒行)에 해당한다고 하여 원만한 여래행으로 해석하였다.

대열반에 들어가는 보살행으로 《열반경》에서는 오행을 설하고 있다. 오행이란 병행(病行)·성행(聖行)·범행(梵行)·천행(天行)·영아행(嬰兒行)을 말한다. 병행이란 보살이 중생과 평등하다는 마음에서 번뇌의 병이 있는 중생과 더불어 이들의 번뇌의 괴로움을 함께 하는 행이다. 여래는 병이 없지만 중생이 병이 있으므로 방편으로 병에 걸려 아파하는 보살행이다. 성행이란 계·정·혜에 의해서 닦는 보살의 성스러운 수행을 말한다. 범행이란 십이부경 청정 계행 등을 닦아 중생의 괴로움을 없애주고, 즐거움을 주는 행이다. 천행이란 보살이 천연의 이치에 의해서 일을 이루듯이 중생을 제도하는 훌륭한 행을 말한다. 영아행이란 어린아이가 괴로움과 즐거움, 사리분별을 하지 못하듯이 보살은 평등하게 대하여 작은 선행으로 제도하는 것을 말한다.

이중에서 이번 호에는 영아행에 대해 알아본다. 영아는 어린아이들이니 인(人)·천(天)·이승(二乘)들의 지혜와 행은 보살에 비해서 얕고 작으므로 어린아이의 지혜와 행동에 비유한 것이다. 여래도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방편으로 영아의 선행(善行)을 베풀게 됨을 말한다.

《열반경》에서는 원만한 행으로서의 영아행과 치우친 행으로서의 영아행을 밝히고 있다.

먼저, 원만한 행으로서의 영아행을 보기로 한다. 어린 영아들의 본심에서는 첫째 치우친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不能起〕, 둘째 좋고 나쁨에 집착하여 머무는 바가 없고〔不能住〕, 셋째 마음이 오락가락하지 않고〔不能來〕, 넷째 말로 다하지 않음〔不能語〕이라고 한다.

영아행이 대열반행이 될 수 있는 것은 첫째 여래는 제법의 모습에 대해서 치우침이 없이 항상된 마음으로 대하니 상(常)을 뜻한다. 그러므로 보살들은 보이고, 들리고, 냄새나고, 맛보고, 감촉하고, 느끼는 것에 대해서 차별상을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집착하여 머물지 않으므로 세상사에 물들지 않고 생사 열반에 머무는 바가 없으니 정(淨)을 뜻한다. 세상에 살다보면 타성에 젖어서 점점 탐욕에 물들어 집착하게 되니 보살은 영아와 같이 청정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마음이 오고감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래의 몸과 행동이 동요하지 않음이니 여래는 이미 열반에 들어 있어서 오고감이 없는 것처럼 마음의 주인공인 아(我)가 있다. 보살도 이익과 권력에 마음을 빼앗겨 마음이 오락가락하면 악업을 짓게 되니 진심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넷째 말로 다하지 않음이니 여래가 모든 중생을 위하여 법을 설하지만 진실로 보면 말하는 것이 없다고 한다. 말로 다할 수 없다는 것은 열반적정이나 부처님의 깨달음의 경지이므로 낙(樂)에 비유한다. 어린 영아는 말로 다할 수 없으니 비록 말을 하더라도 실로 마음이 다 들어 있는 것이 아니다. 여래도 말없음 속에 비밀의 법장이 들어있으니 비록 말을 하더라도 중생들이 알지 못하므로 말로 다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치우친 행으로서의 영아행을 들어본다.

《열반경》에서는 치우친 영아행을 다섯 가지로 설하고 있다. 첫째, 대자영아행(大字嬰兒行)이니 ‘큰 글자 영아행’이다. ‘대자’란 여래의 법문을 뜻하는데 반자교(半字敎), 만자교(滿字敎)와 비슷한 의미이다. 곧 큰 글자란 뜻으로 화(和)와 바(婆)를 가리키고, ‘화’는 무상법문을, ‘바’는 항상하는 법문을 뜻한다. 보살이 유위의 반자교 무상법을 설하여 영원한 법을 얻게 한다는 것이다.

둘째, 무지영아행(無知嬰兒行)이니 ‘알지 못하는 영아행’이다, 어린 아이는 괴로움과 즐거움, 낮과 밤, 아버지 어머니를 알지 못한다. 보살도 이와 같아서 중생을 위하여 괴로움과 즐거움을 보지 않고, 낮과 밤이 없으며, 아버지나 어머니가 친하고 친하지 않음을 구별함이 없다. 이러한 치우침과 차별을 알지 못하고 모든 중생에게 평등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셋째, 부작영아행(不作嬰兒行)이니 ‘지음이 없는 영아행’이다. 어린 아이는 크고 작은 여러 가지 일을 짓지 못한다. 큰일이란 나고 죽은 업이니 오역죄 등과 같은 일이고, 작은 일은 이승의 마음이다. 보살은 이런 악업을 짓지 않고 보리심에서 물러나서 성문 벽지불을 짓지 않는다.

넷째, 황엽영아행(黃葉嬰兒行)이니 ‘낙엽을 주는 영아행’이다. 어린 아이가 울 때에 그 부모가 누런 버들잎을 주면서 돈이라고 하면서 달래면 아이는 정말 돈일줄 생각하고 울지 않는다. 그러나 버들잎은 실제 돈이 아니니, 이와 같이 부모는 때로는 나무로 만든 소와 말, 남녀 인형 등으로 달래면 아이는 참인줄로 생각하므로 어린 아이라고 한다. 여래도 이와 같아서 중생들이 악업을 지으려고 하면 그들을 위하여 천상이 항상 즐겁고 청정하고 단정하고 자재하고 훌륭한 궁전에서 오욕락을 받으며 육근으로 상대하는 것들이 모두 즐거운 곳이라고 설한다. 중생들은 즐거운 일을 들은 까닭에 부러워하는 마음을 품고 악업을 짓지 않고 천상에 태어나 선업을 짓게 된다. 무상하고 영원한 낙(樂)이 없으며 영원한 아(我)가 없고 구경의 청정한 곳이 아니지만, 방편으로 이와 같이 설한다는 것이다.

다섯째, 흔염영아행(欣厭嬰兒行)이니 ‘좋고 싫은 영아행’이다. 어떤 중생이 나고 죽음을 싫어할 때 여래가 이승(二乘)의 도를 말하거니와 실제로는 이승의 실상이 없는 것인데, 이승법으로 인하여 나고 죽는 허물을 알고 열반의 낙을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중생들이 끊을 것과 끊지 못할 것이 있고, 참된 것과 참되지 않은 것이 있으며, 얻을 것과 얻지 못할 것이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여래는 영아행을 통하여 어린 아이에게 돈이 아닌데 돈이라 하고, 청정하지 않은 것을 청정하다고 설하는데 이는 제일의 진리에 있는 여래가 중생으로 하여금 능히 도를 내는 인연을 위하여 이와 같이 설한 것이다.

《법화경》에서는 “여래의 방에 들어가서 여래의 옷을 입고 여래의 자리에 앉아서 사부대중을 위하여 이 경을 널리 설해야 한다.”고 한다. 곧 대자비심이라는 여래의 방에 들어가서, 인욕이라는 여래의 옷을 입고, 차별심 없는 공(空)의 자리에 앉아서 법을 펴야 한다고 하였다. 천태의 《법화현의》에서는 이를 《열반경》 오행에 배대하여 ‘여래의 방’은 자비의 기쁨이니 범행(梵行)에 배대하고, ‘여래의 좌(座)’란 일체법(一切法)의 공(空)함을 아는 마음이니 원만한 천행(天行)에 배대하였으며, ‘여래의 의(衣)’란 인욕(忍辱)의 마음이니 병행(病行)의 마음에 배대하고, 이를 유화(柔和)심으로 보면 영아행(嬰兒行)에 해당한다고 하여 원만한 여래행으로 해석하였다.

이기운 |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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