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화가 비공 스님이 ‘비움의 미학 선면전(禪面展)’ 초대전을 25일부터 3월 7일까지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 장은선 갤러리에서 갖는다.

비공 스님의 이번 작품은 불교적인 것과 더불어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세상의 모든 현실적인 풍경을 시각적인 이미지 보다는 의식세계를 투영하는데 무게를 두고 있다.

비공 스님은 “수행자로서 불성을 의식세계로 갖고 있는 건 당연하다”면서 “그림 또한 불성과 같이 보는 것과 느끼는 것, 생각하는 것이 서로 무관하지 않다”고 강조했다.

물감은 그래서 사유의 흔적을 표현하는 하나의 도구로 사용된다. 비공 스님은 처음 수묵화에서 산수화와 문인화를 거쳐 유채화로 변화를 시도했다. 이번 선면전 역시 유채화로서 의식세계에 연원하는 만다라의 이미지를 아주 자연스럽게 끌어내는 데 집중했다.

▲ 비움의 미학 선면전 53X41cm oil on canvas
▲ 비움의 미학 선면전 33.3X24.2cm

어떤 특정의 색깔이 아니라 감정대로 놓음으로써 더욱 더 추상적인 이미지로 가게 되고, 붓의 흐름이나 색깔 선별에 아무런 구속 없이 작가만의 의식세계가 지시하는대로 작품이 완성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작업에는 붓과 나이프, 넓적한 도구를 이용해 칠하고, 긁고, 덮고, 밀어내고, 덧붙이고 등 다양한 표현기법을 동원했다. 순간에 일어나는 의식의 흐름이나 미적인 흥취에 이끌려 물감이라는 질료를 겹침으로써 행위 및 사유의 축적을 담아내는 작품세계의 특징을 보여준다.

▲ 비움의 미학 41X31.8cm

비공 스님은 법주사 승가대학을 졸업한 이후 제방선원에서 15년간 안거했다.

서울국제현대서예전, 현대서각회원전, 서울아트쇼, 남송국제아트페어, 세계종교미술제 PANCHILLA전 등 수많은 개인전과 단체전을 가졌다.

다음은 이번 선면전에 대한 신항섭 미술 평론가의 평론이다.

추상적인 언어로 풀어내는 선미의 세계

  신항섭(미술평론가)

수행자의 의식세계는 협곡과 같은지 모른다. 오랜 세월 바위를 파고드는 깊은 물살에 의해서건 또는 지각이 갈라지는 틈으로 이루어졌든 간에 아찔한 깊이와 높이를 지닌 협곡의 형세와 유사하다는 생각이다. 협곡에 들어서면 시야가 극도로 제한된다. 보이는 것은 앞뒤 물줄기와 양옆 바위절벽 그리고 하늘뿐이다. 시야가 좁아지면 자연히 의식과 감정이 가라앉게 된다. 보는 것으로부터 사고하게 되는 인간의 한 속성과 무관하지 않다. 보는 것이 적어지면 자연히 의식은 침잠하게 되고 깊어지기 마련이다. 그러기에 무언가에 대해 의문을 일으키게 되면 오직 거기에만 몰두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비공스님의 작업은 수행자로서의 이미지에 합당한 주제 및 내용을 지니고 있다. 단적으로 말해 추상적인 이미지로서의 만다라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의식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당연히 불성이고 보면 그로부터 연원하는 그림이나 사상 또는 철학은 거기에 근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림이란 결과적으로 보고 배우고 느끼며 생각하는 과정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역시 보는 것과 느끼는 것, 생각하는 것이 그림의 모든 것을 지배한다는 점이다.

그가 보는 세상은 불교적인 것과 더불어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세상의 모든 현실적인 풍경이다. 그러고 보면 그의 종교적인 사유 및 일상적인 사고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으리라. 결과적으로 회화적인 조형세계나 그를 이끌어가는 의식세계는 이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다. 거의 반세기 가까운 세월동안 불가에서 생활해온 수행자로서의 습속이나 사유체계가 어떠하리란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수행하는 과정에서 처음으로 수묵화를 접하게 된 이래 산수화와 문인화를 거쳐 유채화로 변화하게 된 것은 일체무상一切無常, 즉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불교적인 사상에 반응하는 결과에 다름 아니다. 무엇을 손에 드느냐의 문제일 뿐 수묵화나 채색화 또는 유채화를 구분하는 것은 수행자인 그에게 큰 문제는 아니다.

이와 같은 전제는 그의 유채작업이 어떻게 만다라로 변환하는가를 이해하는 단서가 될 수 있는 까닭이다. 일반적인 인식으로는 불교 수행자와 유채화는 어딘가 괴리감이 있다고 생각될 수 있기에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유채작업을 보면 그런 전제가 오히려 어색한 편견일 수도 있지 않느냐싶다. 그만큼 추상적인 이미지로서의 만다라 세계에 아주 자연스럽게 녹아들고 있다.

추상적인 이미지 작업으로서는 이번이 두 번째이다. 첫 번째 전시회에서는 순색으로서의 원색적인 색채이미지를 자유롭게 배열하여 구성하는 방식의 만다라 세계를 표현했었다. 반면에 이번 전시회에서는 의식세계에 연원하는 만다라의 이미지를 아주 자연스럽게 끌어내는데 집중하고 있다. 이전 작업에서는 유채색 중심이었던데 비해 최근 작업은 무채색 중심으로 색채의 중심축이 이동했다. 시각적인 이미지보다는 의식세계를 투영하는데 무게를 두고 있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추상적인 언어로 표현되는 만다라의 세계는 그의 의식세계를 그대로 투영한다. 현실에서 보고 느끼는 사실과 더불어 수행자로서의 의식 활동이 한데 어우러져 추상적인 이미지로 표현되는 것이다. 추상적인 이미지여서 난해하다는 선입견을 버린다면 작품세계에 쉽사리 공감할 수도 있다. 언급했듯이 추상적인 이미지도 결과적으로 일상적인 생활과 수행자로서의 의식 활동이 교직하여 만들어진 것일 수밖에 없겠기에 그렇다.

형상성을 버리고 추상적인 세계로 진입하게 된 것은 모든 생명체가 궁극적으로는 흙으로 귀일하듯, 존재하는 모든 것은 언젠가는 무로 되돌려진다는 공空의 세계를 갈파하려는데 있다. 채운 것을 비우고 또 비우다 보면 그 비움의 축적이 다름 아닌 의식 및 감정의 찌꺼기인 회화적인 이미지로 나타나게 된다는 논리다.

이와 같은 조형의 원리에 따라 전개되는 최근 작업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조형적인 특징은 무채색이 중심축이라는 점이다. 이전의 작업이 물감 자체의 순색을 통해 만다라의 세계를 조형화하려 했다면 최근 작업은 검정색, 흰색, 회색 톤으로 이어지는 무채색 계열로의 변화가 현저하다. 색채이미지가 무채색 계열로 변함으로써 시각적인 즐거움이 감소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하지만 시각적인 즐거움이 감소하는 대신에 순연한 의식의 흐름이 그 자리를 대체한다. 무채색으로의 변화는 보이는 사실, 즉 현상계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의식의 심층으로 침윤하는 과정을 여실히 드러낸다. 한마디로 무채색은 사유의 공간으로의 여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세상의 모든 물상은 색채를 지니고 있다. 빛에 의해 깨어나는 색채를 통해 물상은 저마다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그림을 색채로 표현하는 것도 세상이 곧 아름다운 색깔로 이루어져 있음을 뜻한다. 색깔이 없는 물상을 색깔로 표현하는 것은 비실제적이다. 다시 말해 색깔이 없는 물상을 색채로 묘사한다면 이상한 일이다. 현상계에 존재하는 물상은 고유의 색깔이 있어 색채물감으로 묘사하게 되는 셈이다.

그러나 시지각으로부터 차단된 수행자의 의식세계는 색깔의 영역이 아니다. 현실상을 근거로 하여 색깔이 있는 물상을 사고할 수는 있지만, 의식세계 그 자체로만은 색깔이 없을뿐더러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무채색의 세계도 아니다. 의식 활동이란 색깔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까닭이다. 의식세계는 오로지 캄캄할 따름이다. 그렇다고 해서 칠흑과 같은 어둠은 아니다. 캄캄하다는 것은 시지각으로는 인지되지 않는 공간을 의미한다. 그 공간은 다만 사유가 마음껏 유영할 수 있는 무한대의 영역이다.

최근 작업은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 그의 사유체계는 참선에 기반을 두고 있다. 따라서 그림을 그린다는 행위란 참선을 통해 들여다보는, 내면에서 일어나는 무엇을 받아쓰는 일에 다름 아니다. 가능한 한 유채색을 지양하여 무채색으로 표현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어느 면에서 그의 작업은 선미禪味의 표출이라고 할 수 있다. 물감은 참선으로 일어나는 사유의 흔적을 표현하는 하나의 도구일 따름이다. 그러기에 어떤 특정의 색깔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일 아무런 이유가 없다.

색깔을 놓음으로써 더욱 더 추상적인 이미지로 갈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 그 표현적인 이미지는 자유롭기 그지없다.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만큼 붓의 흐름이나 색깔의 선별에 아무런 구속을 느끼지 않는다. 다만 의식세계가 지시하는 대로 따르기만 하면 된다. 현상계와 관련이 있는 그 어떤 의식의 흐름과도 무관하게 진행되는 표현적인 순수성만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작품에서 읽혀지는 그 어떤 이미지도 현상계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참선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무상無相의 세계란 색깔이 관여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기에 그렇다.

최근 작업에서는 붓과 나이프 그리고 넓적한 도구를 이용한다. 칠하고, 긁고, 덮고, 밀어내고, 덧붙이고, 짓이기고, 밀쳐내는 등 다양한 표현기법을 동원한다. 그러는 과정에서 신체적인 힘과 그 힘을 촉발하는 감정의 흐름에 따라 풍부한 시각적인 이미지가 형성된다. 구체적으로 특정의 이미지나 문양을 의식하는 것은 아니다. 작업하는 순간에 일어나는 의식의 흐름이나 미적인 흥취에 이끌린다. 미적인 흥취가 길어지면 일정한 형태의 표현행위가 반복적으로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때 특정의 문양이 하나의 패턴으로 화면을 장악하게 된다.

선미를 통해 발현하는 표현적인 이미지는 담담하기 마련이다. 정제된 순연한 의식 및 정제된 감정의 흐름에 이끌리게 되는 경우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창의적인 미적 감각이 개입하게 되면 돌연 미적 흥취가 일어난다. 미적 흥취는 창작의 희열을 수반함으로써 감정선이 두터워질 수도 있다. 실제로 작업하는 순간에 일어나는 감정의 흐름을 때로 돌발적이고 우연적인 상황에 놓일 수가 있다. 다시 말해 감정선이 다양하고 풍부해지면 표현적인 이미지 또한 거기에 반응하는 것이다. 즉, 감정의 흐름이 커지면 표현적인 이미지 또한 커지게 마련이다. 반면에 감성선이 섬세하고 여릴 때는 자연히 세밀해지고 밀도가 높아질 수밖에 없다.

작품 하나하나가 다른 것은 조형적인 패턴이 없음을 의미한다. 작업하는 순간에 일어나는 의식 및 감정의 흐름에 반응하기 때문이다. 정적인 이미지가 있는가 하면 시각을 자극하는 매우 동적인 이미지가 있다. 이로써 알 수 있듯이 선미의 세계와 그를 통해 시각화되는 조형의 세계는 반드시 일치하는 것이 아니다. 그림이란 어차피 주정적인 세계이기에 그렇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쳐 현현하는 그의 조형세계는 카오스를 연상케 한다. 시각적으로는 혼란스럽다. 다양한 색채가 혼재하는 국면을 연출하는 까닭이다. 특정의 색채 패턴을 추구하는 것도 아니다. 무엇을 의식하며 이루어지는 표현행위가 아니기에 그렇다. 그래서일까. 다양한 색채들이 겹쳐지고 덧쌓이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시각적인 혼란스러움은 되레 작품의 심도를 깊게 한다. 물감이라는 질료의 겹쳐짐은 행위 및 사유의 축적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러한 표현적인 이미지는 선미의 현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의 작업에서 무엇을 찾아내고 구하려 하는 일은 부질없다. 단지 수행자의 의식세계가 일으키는 감정세계를 물감의 흔적을 통해 엿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물감이 만들어내는 추상적인 언어에서 조금이라도 선미의 세계 그 자취라도 감지할 수 있다면 말이다.



-김종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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