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맺기가 공정하지 못할 때
 저항에 직면, 상호주의 윤리 심화돼야


우리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살아간다. 가정에서는 아버지, 어머니이거나 딸, 아들 또는 손주이고, 직장에서는 사장이거나 사원, 아니면 아르바이트생이다. 그런 역할 중 어떤 것은 우리의 선택 범위를 벗어난 것이지만, 상당한 것들은 스스로 선택하거나 받아들인 것들이다. 물론 그 역할을 받아들일 때 그 후 벌어질 모든 일들을 예견하고 그 과정과 결과를 책임지겠다는 마음으로 한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선택이 전제되면 비교적 받아들이기가 수월하다.

그런데 살아가다 보면 그렇게 자발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역할이나 상황이 너무 가혹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감당하기 어려운 가장 역할이거나 직장 상사의 모든 비리까지 책임져야 하는 비정한 상황이 그런 경우에 속하고, 그럴 때 우리는 하늘을 원망하거나 겨우 견뎌내면서 버티다가 쓰러지기도 한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역할이나 상황으로 인해 고통 받을 때 주변에서 해줄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은지 모른다. 단지 그 어려움을 마음으로 느끼며 공감해 주거나 하소연해 오면 기꺼이 들어주는 정도에 머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그런 사람의 존재는 소중하고, 우리는 그런 사람과의 관계를 넓은 의미의 우정이라고 부른다. 고대 그리스의 윤리학자 아리스토렐레스가 자신의 아들에게 주는 간절한 윤리학 책(『니코마크스윤리학』, *니코마코스는 그의 아들 이름이다.)을 쓰면서 우정에 그렇게 많은 비중을 부여한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흔히 윤리를 금지와 억압의 명령으로 받아들이곤 한다. 조선 500년의 유교 이데올로기와 그것의 왜곡된 형태인 맹목적 충효교육 중심의 국민교육을 펼친 일제 식민지, 그 아류인 박정희 정권 유신교육의 질긴 그림자 때문이다.

물론 하늘과 땅이라는 수직적이면서도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중심에 두고 인간들 사이의 관계를 부모와 자식, 임금과 신하, 스승과 제자, 남편과 아내, 선배와 후배 등으로 펼쳐가고자 했던 유교윤리 자체가 수평적인 관계 중심의 현대윤리와 긴장 관계를 형성할 수밖에 없는 지점이 분명히 있다. 그렇지만 그것이 바람직한 지향과 건강성을 잃지 않았을 때에는 최소한 당시 세계사적 맥락에서는 상당한 수준의 바람직한 윤리 질서를 만들어냈다는 사실 또한 동시에 기억될 필요가 있다.

우리 시대의 윤리는 기본적으로 서로 주고받는 상호주의가 근간을 이룬다. 국가와 국민, 부모와 자식, 교사와 학생, 선배와 후배 모두 서로 동등하게 주고받는 인격체로서의 관계 맺기가 윤리의 근간이고, 그렇지 못했을 때는 공정하지 않다는 평가를 내린다. 즉 정의롭지 못한 관계이고 사회라고 판단하면서 저항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 윤리의 근간은 분명히 우리 시대의 기본 정신이고, 어느 누구도 쉽게 그 정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 현대사는 이 정신을 한편으로 매우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동아시아국가 중에서 가장 평등의식이 높은 나라가 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여전히 폭력적인 관계망 속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이 등장하고 있다. 그 폭력적인 관계 속에 돈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관계가 추가되면서 21세기 초반 한국사회는 오랜 정의 지향성을 놓쳐버린 것이 아닐까 하는 절망감을 안겨줄 정도로 혼란스럽다.

이 지점에서 우리들이 꼭 생각해야 하는 지점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현대윤리의 근간인 상호주의가 윤리의 모든 것은 아니라는 인식의 필요성이고,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우리 사회에서는 그 상호주의가 좀 더 건강하게 심화될 필요가 있다는 다소 역설적인 현실 인식의 필요성이다.

부모자식 관계가 상호주의 윤리로 온전히 포섭되지 않는 관계의 상징이고, 알량한 권력이나 돈에 기대서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이른바 ‘갑질’을 해대는 자신을 포함하는 21세기 초반 한국인의 윤리적 자화상이 상호주의 윤리 확산의 필요성 근거로 제시될 수 있다. 이 두 뿔 사이를 슬기롭게 통과해내야 하는 의무와 책임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져 있는 셈이다.

-한국교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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