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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영웅시대가 열리다
‘괴물’은 영웅 필요해 만들어낸 허상
2015년 02월 05일 (목) 14:37:45 김문갑 meastree@naver.com
   
▲ 티치안의 ‘다나에’. 메두사는 본래 아름다운 여인이었는데 신의 저주를 받고 흉측한 몰골로 변했다. 황금비로 변한 제우스와 다나에 사이에서 영웅 페르세우스가 태어난다. 여인의 아름다움은 치명적인 재앙이며, 영웅은 고귀한 혈통에서 태어남을 함축하고 있다.

1. 황금시대에서 철의 시대로

흔히 옛날이 좋았다고 한다. 과거가 대개 아름답고 좋았던 시절로 기억되는 건 인간심리라는 게 쾌락 원칙을 따르기 때문이겠지만, 실제로 좋았던 점도 있었으리라. 과거는 젊고 현재는 늙었으니, 젊음이 훨씬 좋은 건 사실이지 않은가.

한비자(韓非子)는 말한다. 먼 옛날에는 물자는 많은데 사람은 적어 힘들게 일하지 않아도 되었고, 당연히 싸울 일도 없었다고. 이 말 또한 상당한 진실성이 있다고 하겠으니, 옛날이 좋았다는 말이 단순한 심리적인 요인에서 나온 말만은 아니다.

올륌포스의 집들에 사시는 불사신들께서 맨 처음에 만드신
죽게 마련인 인간의 종족은 황금(黃金)의 종족이었소.
그들은 크로노스가 하늘에서 왕이었을 때 살았소.
그리고 그들은 신들처럼 살았소. 마음에 아무 걱정도 없이,
노고와 곤궁에서 멀리 벗어나, 비참한 노령(老齡)에도 그들을
짓누르지 않았고, 그들은 한결같이 팔팔한 손발로
온갖 재앙에서 벗어나 축제 속에서 즐겁게 살았소.
그리고 그들은 마치 잠에 제압된 양 죽었소.1)

헤시오도스(Hesiodos)가 《일과 날》에서 그리고 있는 최초의 인류는 아무런 근심 걱정 없이 평생을 축제처럼 즐기며 살다가 잠자듯이 죽는다. 헤시오도스는 이들을 황금의 종족이라고 불렀다. 이들이 정말로 황금시대를 마음껏 누리며 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뺏고 빼앗기는 전쟁으로 날이 새는 일은 없었지 않았나 싶다. 한비자 말마따나 널린 게 열매고 뿌리일 텐데, 굳이 남의 것 빼앗아야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다만 질병이 무섭고 맹수와 해충이 두려워, 사람들끼리 서로 의지하고 아끼며 주어진 하루를 감사히 살았을 성 싶기는 하다. 이런 게 황금시대라면 과히 틀린 말도 아닐 것이다. 하여튼 세월은 흘러 은(銀)시대, 청동(靑銅)시대, 그리고 마침내 철(鐵)시대가 개시된다.

그들은 밤이나 낮이나 노고와 곤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고통 받을 것인즉, 신들께서 그들에게 괴로운 근심거리를 주실 것이오.
……
주먹이 곧 정의고 서로가 서로의 도시를 약탈할 것이오.
맹세를 지키는 사람이나 의롭고 선량한 사람에게는 아무도
감사하지 않을 것이오. 그들은 오히려 악행이나 범죄를 저지른 자를
존경하게 될 것이오. 정의는 주먹 안에 있고
염치는 사라질 것이오. 악한 자가 더 나은 사람을
굽은 말로 모함하고 거짓 맹세로 이를 뒷받침할 것이오.
증오에 찬 얼굴로 남의 피해를 기뻐하는 시기는 험담을 하며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어디든지 따라다닐 것이오.2)

철의 시대라면 생산력이 급속히 증가하여 물자는 이미 풍부해졌을 때이다. 지난 호에서 살펴보았듯이 이 시기는 잉여생산이 가능한 시기인데, 인류는 오히려 서로가 서로의 성(城)을 약탈한다. 염치는 사라지고 거짓과 증오가 횡행한다.

인류의 역사를 퇴보의 역사로 보는 고대인의 관념은 지구 전체에 폭넓게 퍼져 있었다. ‘금 → 은 → 동 → 철’로 형상화되는 쇠락의 역사관은 고대 인도(印度)에서 이집트, 중동 등등으로 폭넓게 퍼져 있었다.

헤시오도스에 의하면 황금시대는 크로노스(Kronos)가 하늘을 다스리던 때이다. 이후로는 크로노스의 아들인 제우스(Zeus)가 다스리게 된다. 따라서 제우스라는 가장 강력한 신이 군림하는 동안 인류는 철의 시대로 쇠락하게 된다는 말이 되는데, 어쩌다가 이리 되었나?

2. 영웅의 탄생, 괴물의 탄생

헤시오도스는 청동시대와 철의 시대 사이에 영웅들의 시대를 끼워 넣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영웅들은 무수히 많은 괴물들을 처단하며 사람들을 공포에서 해방시킨다. 재앙에서 인류를 구하고, 고통에서 중생을 제도하는 존재가 영웅이라면, 괴물은 인류가 처한 고통과 재앙의 알레고리(Allegory)이다. 알레고리란 풍유(諷諭)이다. 추상적인 관념을 구체적인 형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하여튼 만약 괴물이 없었다면 어찌될까? 당연히 영웅도 없었을까?

   
▲ 카라바조가 그린 ‘메두사’.

메두사(Medusa)는 본래 머릿결이 특별히 고운, 매우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그녀에 반해 서로 사랑에 빠졌다. 이 사랑은 포세이돈을 흠모한 여신 아테나의 질투를 불렀고, 아테나는 그녀를 흉측한 괴물로 만들었다. 메두사의 얼굴은 무섭게 부풀어 올랐고, 눈은 튀어나왔으며, 입은 커지고 긴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아름다웠던 머리카락은 한 올 한 올 뱀으로 바뀌었다. 그녀의 얼굴을 직접 보는 자는 모두 돌로 변하는 저주가 내려졌다. 메두사는 페르세우스((Perseus)에게 목이 잘린다.

히드라(Hydra)는 여러 개의 머리를 가진 뱀이다. 히드라의 머리는 작가에 따라 5개, 6개, 9개 혹은 1만 개로 묘사되기도 하는데, 그중 하나는 불사이고 나머지도 자르면 다시 목이 솟아 나온다. 특히 히드라가 가진 독은 매우 강해서 그가 내뿜는 숨결이나 그가 지나간 후의 냄새를 맡기만 해도 사람이 죽는다고 한다. 히드라는 헤라클레스(Herakles)에 의해 죽는다.

미노타우로스(Minotauros)는 황소 머리에 인간의 몸을 한 괴물이다. 크레타의 왕비 파시파에와 황소 사이에서 태어났다. 미노스왕의 요청으로 포세이돈이 황소 한 마리를 보내주었는데, 미노스왕은 그 황소가 욕심나 포세이돈에게 한 맹세를 어기고 다른 소를 제물로 바친다. 화가 난 포세이돈이 저주를 내리고, 저주는 엉뚱하게도 왕비 파시파에로 하여금 황소와의 교접을 갈구하게 만든다. 그녀는 최고의 명장 다이달로스에게 부탁하여 마침내 황소와의 교접에 성공하고 그 결과로 괴물 미노타우로스가 생긴 것이다. 미노타우로스는 테세우스(Theseus)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키마이라(Khimaira)는 앞은 사자, 중간은 염소, 뒤는 뱀으로 되어 있고 불을 뿜는 무서운 괴물로 벨레로폰(Bellerophon)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사자 몸에 여자의 얼굴과 가슴, 그리고 새의 날개와 뱀의 꼬리를 하고 있는 스핑크스(Sphinx)는 오이디푸스(Oedipus)에게 죽는다.

이들 괴물에게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이들은 모두 이종합체(異種合體)이다. 인간과 동물, 날짐승과 들짐승, 혹은 뱀과 같은 파충류 등이 한 몸에 뒤엉켜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둘째, 이들은 여자이거나, 여성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메두사, 히드라, 키마이라, 스핑크스 등등 괴물은 온통 여자의 얼굴과 몸뚱이를 하고 있다. 어쩌다가 등장하는 수컷괴물조차도 여성과의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문제의 핵심이 된다. 예컨대 미노타우로스는 그 존재 자체보다는 파시파에왕비와 황소와의 교접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문명은 분리와 함께 시작한다. 문명의 시작은 인류가 원시 야만상태에서 분리되어 나왔음을 의미한다. 문명의 총화는 도시이다. 그리스나 이집트, 그리고 인도나 중국의 고대도시들은 고대문명의 집합이다. 이들 도시들은 인류의 인위적인 성과가 얼마나 찬란하였는지를 증명한다. 고대도시의 성벽은 곧 인위와 자연, 문명과 야만을 나누는 경계였다. 따라서 문명화된 인간은 자연물과는 달라야한다. 인간과 동물이 하나일 수는 없다. 공자(孔子)는 말한다.

“사람으로 태어나 새나 짐승과 함께 살 수는 없지 않느냐.”3)

아름다운 여성의 모습에 왕뱀의 하반신을 한 에키드나(Echidna), 그리고 그녀가 낳은 온갖 괴물들, 히드라, 키마이라, 스핑크스 등등 이종합체들은 곧 야만의 알레고리이며, 자연의 어두운 비의(秘義)이다.

사람들은 메두사의 얼굴을 보면 돌로 변하고, 세이렌의 노래를 들으면 그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세이렌의 유혹은 곧 죽음이다. 보아서도 안 되고 들어서도 안 되는 것이 괴물이다. 왜 괴물은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존재인가? 처음부터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었기 때문은 아닐까?

괴물은 언제나 영웅들과 함께한다. 괴물은 영웅시대에 등장한다. 괴물이 없다면 영웅도 없는 것이다. 헤시오도스가 ‘금 → 은 → 동 → 철’의 흐름에 영웅시대를 끼워 넣은 건 참으로 교묘하다. 《한비자》 〈오두편(五蠹篇)〉에 이런 얘기가 있다. 조금 각색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요(堯)임금이 천하를 다스릴 때, 그의 궁궐은 갈대를 엮어 지붕에 덮고는 가지런하게 자르지도 않았고, 서까래도 다듬지 않은 채 그대로 썼다. 먹는 건 조밥에 콩죽이요, 겨울엔 사슴가죽, 여름에 갈옷을 걸쳤다.

우(禹)임금은 천하의 왕노릇하며, 스스로 괭이를 들고 백성들 앞에서 일하기를 다리털이 닳아 없어지도록 하였다. 그 고생은 오늘날의 노예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러니 옛날 천자의 자리란 게 몸만 고될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작은 고을의 수령조차도 자손 대대로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데, 하물며 왕이 된다는 건 어떻겠는가.

왕은 화려한 궁궐에 미녀들을 모아 놓고 온갖 산해진미를 맛보며 인생을 즐길 수 있다. 철의 시대가 도래하고, 급증한 생산력은 이런 화려한 삶을 가능케 하였다. 이제 권력은 지상 최고의 매력덩어리가 되었다. 권력이 매력적일수록 권력을 차지하려는 수컷들의 싸움은 더욱 더 치열해졌다. 필멸의 수컷들이 불멸의 신처럼 권력을 누리고자 무덤을 그리도 크게 만들고, 권력을 세습하였다. 이제 정말로 내 것과 네 것, 내 핏줄과 네 핏줄을 구분하는 게 중요한 시대가 된 것이다.

옛날 모계사회에서는 누가 누구의 아버지인지를 몰랐다. 알 수도 없었고, 알 필요도 없었다. 이 시절에는 함께 먹이를 찾고 함께 나누어 먹었다. 이들은 한 운명공동체로 생사를 함께하였다. 그러니 무슨 다툼이 있고, 시기와 질투가 생겨나랴.

하지만 남성중심의 가부장사회가 되면서 내 자식이 누구이고 내 것은 어디까지인지를 분명히 구분하여야할 필요가 생겼다. 이를 위해서는 내 여자와 네 여자가 확실히 구분되어야만 했고, 여자는 남자에게 종속되어야만 했다. 이제 여자는 소유물이 되었다.

남자와 여자, 주인과 노예, 문명과 야만은 엄격히 구분되어야만 하였다. 전자의 우월성과 후자의 열등함이 확연히 구분되며, 여신은 남신에 비해 격이 떨어지거나 남신에게 종속되어 갔다. 그리고는 마침내 영웅들에 의해 퇴치되어야할 괴물들은 최악의 여성성을 지내고 나타나게 된 것이다.

괴물은 본래 존재하지 않았다. 영웅이 필요했기에 만들어진 허상이다. 그렇듯 영웅도 만들어진 허상이다. 장자(莊子)는 말한다.

태곳적 복희씨는 잘 때는 지극히 편안해 하고 깨어서는 지극히 여유로웠다. 때론 자신을 말이라 하고, 때론 스스로를 소라고 여겼다. 4)

인간과 우마를 굳이 구분하지 않았던 시절, 그 시절에는 내 것도 내 것도 없었다. 그냥 우리 모두가 있었다. 이들은 실재하던 사람들이었다.

김문갑 | 철학박사, 충남대 한자문화연구소 연구교수

주) -----

1) 헤시오도스 지음, 천병희 옮김, 《신통기》, 한길사.
2) 위의 책.
3) 《논어(論語)》
4) 《장자(莊子)》, 〈응제왕(應帝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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