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국제시장>을 아내와 함께 봤다. 영화관으로 들어가는데 아내가 티슈를 쥐어줘 모른 척하고 받았다. 영화를 본 지인들이 ‘무척 울었다’는 말을 듣고 준비한 모양이다. 더군다나 난 이북이 고향(평북 철산)인 부모님에 서독 광부였던 자형과 간호조무사였던 누나를 둔 개인사가 있다. 공무원이었던 자형이 서독 광부를 지원하자 누나가 간호학원에서 조무사 자격을 취득해 따라갔던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생각만큼 재미있지도, 감동적이지도 않았다. 나도 물론 몇 차례 눈물을 흘렸다. 탄광매몰과 이산가족찾기 등은 누구라도 가슴이 울컥할 만한 장면이었다. 역사와 허구를 적절히 버무려 한국현대사 60년을 ‘경제적 성장과 발전’의 포커스로 조명한 <국제시장>은 예술적 실험성이 강하거나 영상미학이 뛰어난 작품이 아니라 감독의 의도가 분명한 대중적 영화일 뿐이라는 게 내 감상이다.

<국제시장>의 감독은 이 영화에서 ‘가족애’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한다. 실제로 이 영화의 주인공 덕수는 서독과 월남에서 목숨을 담보로 번 돈으로 가장의 역할을 다 한다. 뒤늦게 해양대학에 합격한 덕수가 여동생 결혼비용 때문에 월남에 가려하자 아내 영자가 “당신 인생에 왜 당신은 없느냐?”고 울며 항의하는 데서 알 수 있듯 덕수의 평생은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삶이었다. 그런데, 덕수가 서독에서 보내준 돈으로 서울대학교를 졸업했을 남동생은 아무 역할도 없고, 여동생은 처음부터 끝까지 철딱서니 없는 캐릭터로 나온다. 뿐만 아니라 덕수의 아들딸은 늙은 부모에게 자식을 맡겨 놓고 자기들끼리만 놀러 가고, 가게를 팔지 않는 아버지를 고집쟁이로만 여긴다. 아내 영자의 말대로 덕수의 삶에는 ‘나’가 없지만, 그의 두 동생과 자식들의 삶에는 ‘나’만 있었다. 이것이 감독이 말한 ‘가족애’라면 실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덕수는 흥남부두에서 헤어진 아버지의 부탁을 잊지 않고 실천한 전세대 인물이다. 그는 홀어머니와 어린 두 동생을 먹여 살리느라 자기를 챙기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더 큰 잘못은 자식교육을 소홀히 한 데 있다. 그는 아버지를 기억하고 유언(?)을 지키려 노력했으나, 그의 자식들은 아버지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모르고 관심도 없다. 덕수 또한 가족과의 적극적인 대화와 소통에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덕수 같은 전세대 인물에겐 부모자식, 혹은 형제간의 대화가 낯설었기 때문이다. 영화 마지막 부분에서 어린 손녀가 <굳세어라 금순아>란 유행가를 부르자 모든 가족이 덕수를 비난하는데, 혼자 방으로 들어간 그가 돌아가신 아버지를 향해 “저 정말 힘들었어요”라며 우는 장면은 이 영화의 가장 가슴 아픈 부분이다. 평생 가족을 위해 노력하다 다리마저 불구가 된 그는 늙어서도 자식들에게 인정이나 위로조차 받지 못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이삼십대 젊은층은 이 영화를 본 뒤 자기도 모르게 나쁜 아들딸이 되었다는 자책감에 불쾌해졌을지 모른다.

덕수로 대표되는 세대가 자기희생적이고 목표지향적인 ‘강한 아버지’라면, 삼사십대 젊은 세대는 자기밖에 모르는 ‘약하고 이기적인 자식’으로 표상된다. 그 전형적인 예로 생활고에 대한 우려 때문에 아내와 어린 두 딸을 죽인 비정한 가장을 들 수 있다. 강남 지역의 아파트에 사는 중상층이었던 그는 실직한 뒤 주식투자에도 실패하자 가족을 죽이고 자신도 자살하려 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는 아내와 자식들이 고생할 것이 걱정되었다고 하지만 그것은 그의 생각일 뿐이었다. 이 사건과 <국제시장> 사이에서 우리는 묘한 공통점과 이질감을 확인할 수 있다. 두 가장의 행동은 모두 ‘가족’을 위한 것이라 하지만 덕수가 가족의 안녕을 지킨 반면 강남 가장은 그들을 죽였다. 덕수가 가족의 안위를 위해 자신을 버린 데 반해 강남 가장은 가족을 버리고 자신은 살아남은 것이다. 그것을 가족을 위한 행동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큰 잘못이 아닐 수 없다.

가족애란 한 사람의 일방적 희생과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덕수는 자신의 고생을 가족이 알아줄 것이라 여겼는지 모르나, 동생과 자식들은 그걸 당연히 여겼다. 그들을 나무랄 수만은 없는 것은 덕수의 고생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대화와 이해다. 대화와 이해 없는 사랑은 어떤 형태로도 이루어질 수 없다.

-동국대 교수, 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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