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어스맨(A Serious man)>(미국, 2009)의 주인공 래리는 스스로에 대해 성실하고 도덕적이고 선량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더욱 자신에게 닥친 불운을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이런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겠고, 신의 뜻을 종잡을 수 없어 그는 혼란에 빠지는 인물입니다. 영화는 래리의 의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형식으로 진행됩니다. 가벼운 화법과 유머로써 코미디를 표방하지만 철학적인 메시지는 묵직한 편입니다.

영화를 만든 에단 코엔과 조엘 코엔은 형제 감독으로 유태인입니다. 그들은 40여 년 전 자신의 이웃에 살았던 유태인 가족을 소재로 해서 래리 가족의 이야기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1960년대 후반의 미국 내 유태인 공동체를 배경으로 그 시대를 살았던 평범한 인물의 일상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영화에는 이 세상을 움직이는 원리에 대한 고민이 담겨있습니다.

먼저 이 영화가 보여주는 심각한 질문을 살펴보겠습니다. <시리어스맨>의 주인공 래리는 제목처럼 아주 심각한 사람입니다. 제목에는 중의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는 그가 매우 진중하고 성실하고 도덕적인 사람이라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래리는 매우 심각한 문제를 갖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래리의 가장 친한 친구와 바람 난 아내는 너무나 당당하게 이혼을 요구하고, 한술 더 떠 래리에게 집에서 나가라고까지 합니다. 딸과 아들은 아빠에게는 관심조차 없습니다. 안테나가 고장 났을 때라던가 돈이 필요할 때만 아빠의 부재를 알아 챌 정도입니다. 또 동생은 도박과 매춘을 하다가 집에 경찰을 불러들이고, 직장 또한 쉽지 않습니다. 물리학 교수인데 종신재직권 심사를 앞둔 어느 날 한 학생이 학점을 수정해달라고 떼를 쓰면서 돈 봉투를 두고 가더니 협박까지 일삼고, 또 누군가는 학교로 래리를 모함하는 투서를 보내오고, 도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할지 모를 정도로 모든 문제들이 한꺼번에 래리를 괴롭혔습니다.

래리는 자신에게 닥친 이 불운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은 죄 짓지 않고 성실하게 살아왔는데 자신에게 왜 이런 나쁜 일들이 일어나는지 그는 억울했습니다. 신의 섭리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래리가 가진 이 문제의식은 유태인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가질법한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름 신의 선택을 받은 민족이라는 선민의식을 갖고 있는데 그들의 역사를 보면 수난의 역사였습니다. 그러니 ‘신의 뜻이 도대체 무엇인가’ 하고 항상 고민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이 영화는 유태인들의 그런 고민의 흔적이라고 여겨집니다.

래리는 자신의 처지의 불합리성을 설명 듣기 위해 랍비를 찾아갑니다. 유태인들에게 랍비는 상담가이자 종교적 리더인데, 세 명의 랍비는 래리를 만족시키지 못했습니다. 첫 번째 랍비는 래리의 질문과 정말 관련이 없는 얘기를 열을 내면서 아주 장황하게 늘어놓았고, 마지막 랍비는 매우 나이가 많았는데, 뭔가 현명한 답을 줄 걸로 기대했지만 그는 바쁘다면서 래리를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 랍비만이 《탈무드》에 나올 법한 얘기를 해줬는데, 그 이야기 또한 래리에게는 의미 없는 대답이었습니다.

래리는 세 명의 랍비를 만났지만 자신의 억울함을 해결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집에서 쫓겨나 동생과 함께 모텔에서 생활하던 래리가 한밤중 물이 빠진 수영장에서 동생과 부둥켜안고 우는 장면에서 오히려 해답을 찾은 것 같았습니다. 수영장에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면서 동생 아서는 이런 말을 합니다. 나를 보라고, 나는 직장도 없고 가족도 없이 고름 덩어리를 달고 형한테 얹혀살고 있는데, 형은 직장도 있고 가족도 있지 않느냐고, 동생의 말을 듣고 보니까 자신은 가진 게 많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신이 가진 것에 감사하지 않고 오히려 랍비를 찾아다니며 신에 대한 회의감을 드러냈던 것입니다.

래리는 자신을 매우 도덕적이고 성실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꼭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학생이 전해준 뇌물을 받고 점수를 고쳐주었으며, 또 이웃에 사는 샘스키 부인의 유혹을 거부하지도 못 했습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그의 마음속에는 사실 가벼운 인물이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래리의 불운에 대해 감독은 원인을 래리에게서 찾았던 것입니다. 결국은 래리의 나약함에서 래리의 불운이 시작됐다고 보았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사탄의 유혹에 넘어갔던 아담과 하와처럼 인간은 기본적으로 유혹에 약하고, 이런 약점이 인간에게 불운을 가져온다는 결론이었습니다.

앞에서 래리는 신의 섭리에 대해 의심했습니다. 신은 과연 공정하게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가에 대해 일말의 의심을 가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받는 고통이 불합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니까 신은 공정했고, 래리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결론은 우리 인간이 어리석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어서 그렇지 신은 분명 놀라운 섭리로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영화는 이런 의문 자체가 의미 없다고 말합니다.

래리가 물리학 교수이기 때문에 영화에서는 물리학 이론이 영화를 이해하는 데 핵심 키워드로 등장합니다. 물질세계는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것처럼 원인과 결과가 분명한 세계입니다. 그런데 현대 물리학인 양자역학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인 원자니 전자니 하는 미시세계를 다루고 있는데, 이 세계는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불확실성의 원리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물리학의 이런 원리를 영화는 인생사와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이 세계를 지배하는 원리가 고전 물리학처럼 원인과 결과가 분명하고, 그래서 예측 가능한 세계인가, 아니면 양자역학처럼 불확실성의 원리의 지배를 받는 예측이 불가능한 세계인가 하고 나름 진지하게 묻고 있습니다. 양자역학처럼 예측이 불가능하다면 신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낼 수밖에는 없으니까요.

그런데 영화에서는 양자역학을 비판하기 위한 사고실험인 ‘슈뢰딩거의 고양이’라는 이론이 등장합니다. 이 이론은 뚜껑을 열어보기 전에는 죽은 고양이가 들어있을지 산 고양이가 들어있을지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이론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나름 신의 의도를 추측하지만 인간은 결코 신이 될 수 없기 때문에 그냥 떠들 뿐 어느 누구도 신의 뜻을 제대로 알기는 어렵다는 뜻을 슈뢰딩거의 고양이 이론에 빗대어 표현한 것입니다.

두 번째 랍비에게서 들은 이야기는 이 의문에 대한 답을 주고 있습니다. 어떤 치과의사가 환자 아랫니 본을 떴는데 안쪽에 ‘도와주세요’라는 글자가 있었습니다. 치과의사는 이것의 의미를 열심히 찾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이 글자가 거기에 왜 적혀있게 된 것인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점점 피폐해져갔습니다.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생각의 무게가 그의 일상을 짓눌렀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그 생각을 그만두게 됐습니다. 그랬더니 예전처럼 다시 건강하고 행복한 일상으로 돌아올 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결국 이 말은 신의 영역을 건드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누가 만든 것이고 어떻게 이뤄져 있는가와 같은 철학적 질문은 그만두라는 것입니다. 이런 질문들은 어차피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것이고, 현실의 행복을 방해만 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래리 이야기가 시작하기 전 보여준 프롤로그에 해당하는 이야기는 감독의 의도를 더욱 정확하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눈 오는 날 밖으로 나갔던 남편이 눈보라를 뚫고 왔습니다. 눈길에 수레바퀴가 빠졌는데 지나가는 노인이 도와줘서 그 노인과 함께 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남편에게서 노인의 이름을 들은 부인은 굉장히 놀랐습니다. 그 노인은 3년 전에 죽은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남편과 함께 온 사람이 악령이라고 확신한 부인은 노인이 집안으로 들어왔을 때 그의 가슴팍에 송곳을 꽂았습니다. 그런데 노인은 피를 흘리는 사람이었습니다. 부인의 견해가 잘못됐던 것입니다. 피를 흘리면서 노인은 눈보라 속으로 사라졌고, 남편은 이젠 우린 망했다면서 한탄했습니다.

부인은 현실보다는 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입니다. 노인이 죽었다는 소문을 믿었던 부인은 악령을 쫓아내야 한다는 관념에 사로잡혀 있었고, 그게 남편과 자신을 궁지에 몰아넣었던 것입니다. 즉 이 이야기에서 감독은 주어진 현실에 집중하면 된다는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노인이 악령이든 사람이든 그걸 밝혀내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는 뜻입니다. 결국 시리어스맨과 연결시켜보면 신의 의지나 메시지를 찾아내기 보다는 지금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더 의미 있는 일이라는 뜻이지요.

물리학교수인 래리가 ‘불확실성의 원리’를 증명하기 위해 칠판 빽빽하게 수식을 적어놓고 열변했지만 학생들은 ‘그래서 어쩌라고?’ 하면서 학점이나 걱정하면서 나갔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닥친 인간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면 될 것이지 왜 인간의 영역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신의 섭리에 관심을 갖는가, 하는 지극히 기독교적 사고에 의해 만들어진 영화였습니다.

영화 말미에 아내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고, 아들은 무사히 성인식을 마쳤고, 교수 종신재직시험을 무사히 통과했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습니다. 그의 의지와 관계없이 일어났던 모든 문제는 그의 노력과 무관하게 스스로 해결됐습니다. 그런데 래리는 병원으로부터 방문하라는 전화를 받습니다. 큰 병일 지도 모른다는 암시가 깔려있는 것이지요. 아들의 학교에 불어 닥친 검은 회오리바람이 깃발과 깃대를 부러뜨릴 것 같이 흔들렸는데 래리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 것 같은 회오리바람이 불어오고 있음을 암시하면서 영화는 막을 내렸습니다.

이 상황에서도 래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영화에서 가장 기대를 갖게 했던 세 번째 랍비는 아들 대니에게 ‘착하게 살라’라는 말을 합니다. 최고 현명한 사람으로 비쳐졌던 그가 한 말이기에 뭔가 의미심장하게 들리는데, 아마도 파도치는 바다와 같은 삶에서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뜻인 것 같습니다. 파도가 치는 이유 같은 건 신의 영역이니 그런 것엔 관심을 두지 말고 그냥 착하게 살면 된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의문이 남습니다. 어른이 당하는 고통이라면 이런 식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정말 아무런 죄도 짓지 않은 순수한 아이들이 당하는 고통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할까요? 지금 이 시간에도 세계 도처에서는 정말 많은 아이들이 고통 속에서 죽어가고 있는데, 신이 정말 전지전능하고 정의롭고 자비롭다면 어린 애들이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것을 왜 지켜만 보고 있는 것인지 의문은 더욱 꼬리를 물었습니다. 이 의문에 대해 명쾌한 답을 줄 수 없는 것이 유일신 종교가 가진 한계가 아닌가 싶습니다.

김은주 | 자유기고가

저작권자 © 불교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