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위대한 어머니 신의 시대

중국의 왕이나 귀족들은 천하의 학자, 문인, 예술가들을 모아 그들의 지혜를 얻는 일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이렇게 모인 학자ㆍ문인들의 수는 곧 권력자의 힘과 덕의 상징이 되었다. 춘추전국시대 맹상군(孟嘗君), 평원군(平原君), 춘신군(春申君), 신릉군(信陵君) 등은 도덕성과 지혜로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았는데, 이들의 휘하에는 수천의 문객들이 있어서 지식과 예술을 나누고 다투었다. 전한(前漢)의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 BC179?BC122)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이다. 그의 막하에도 수천의 학자와 문인들이 있었고, 그들 중 10여 명이 모여 편찬한 책이 《회남자(淮南子)》이다.

하늘과 땅이 아직 형성되지 않았을 때는, 휑하니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태소(太昭)라고 하는 것이다. 도는 허확(虛廓)에서 시작되는데, 허확이 우주(宇宙)를 낳고 우주가 기(氣)를 낳는다. 기에는 구분이 있어서, 맑고 가벼운 것은 위로 얇게 퍼져 하늘이 되고, 탁하고 무거운 것은 아래로 가라앉아 땅이 되었다.1)

지금과도 같은 하늘과 땅이 생기기 전에 허확이 있었고 허확 이전에 태소가 있었다는 말인데, 허황한 이야기 같지만 이 이야기는 매우 논리적이다. 하늘과 땅이 지금처럼 나누어져 있다면, 이들이 나누어지기 이전에는 하나였을 것이다. 무엇이 하늘이고 무엇이 땅인지 구분이 되지 않은 채 뭉뚱그려 한 몸으로 있는 것을 허확이라고 한 것이다. 그렇다면 허확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전지전능한 창조주를 고려하지 않는 한, 무(無)에서 생긴 것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가 없다. 이 원시(原始) 무(無)를 태소(太素)라고 하였다. 태소란 말 그대로 아무 것도 없다는 의미이다. 단어 하나하나에 신경 쓰며 자꾸 뭔가를 상상할 필요가 없다. 그냥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다. 노자(老子)가 말하는 “천하만물은 유(有)에서 나오고, 유는 무(無)에서 나온다.”는 말을 그대로 형상화하면서, 여기에 기의 운동성을 부과한 것이다. 가벼운 기운은 위로 올라가 하늘이 되고, 무거운 것은 아래로 가라앉아 땅이 되었으며, 하늘과 땅이 상호작용하는 사이에 만물이 생겨났다는 우주론이다. 지극히 논리적이며 과학적인 이야기다.

맨 처음 생긴 것은 카오스(Chaos, 혼돈)고,
그 다음이 눈 덮인 올륌포스의 봉우리들에 사시는 모든 불사신들의
영원토록 안전한 거처인 넓은 가슴의 가이아(Gaia)와
〔길이 넓은 가이아의 멀고 깊은 곳에 있는 타르타라(지하)와〕
불사신들 가운데 가장 잘 생긴 에로스(Eros)였으니,
사지를 나른하게 하는 그는 모든 신들과 인간들의
가슴 속에서 이성과 의도를 제압한다.
카오스에게서 에레보스(지하의 어둠)와 어두운 밤〔닉스〕이 생겨나고
밤에게서 다시 아이테르(하늘의 빛)와 낮〔헤메라〕이 생겨났으니,
밤은 에레보스와 사랑으로 결합하여 이들을 낳았던 것이다.
가이아는 맨 먼저 자신과 대등한 별 많은 우라노스(하늘)를 낳아
자신의 주위를 완전히 감싸도록 함으로써
그가 축복받은 신들에게 영원토록 안전한 거처가 되게 했다.
가이아는 또 여신들의, 산골짜기들에 사는 요정들의
즐거운 처소들인 긴 산(山)들을 낳았다.
가이아는 또 거칠게 파도치는 추수할 수 없는 폰토스(바다)를 낳았다.2)

복잡한 듯싶지만, 이야기의 논리구조는 간단하다. 천지만물이 있기 전에 이들이 한데 뒤섞여 있던 시기, 즉 혼돈상태가 있었고, 그 혼돈으로부터 차례로 하나씩 하나씩 천지만물이 생기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신화의 외피를 쓰고 있을 뿐, 내용은 지극히 논리적이다.

여기에서 ‘생겼다’, 혹은 ‘낳았다’는 말에 주목해 보자. 어디에서 무엇이 나오고, 혹은 어디에서 무엇이 생기고 하는 논리를 생성론이라고 한다. 무엇이 생하는 그 어디를 찾아 거슬러 올라간다면 태초의 시원(始原)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그 시원으로부터 무엇인가가 생겨 나왔다면, 그 무엇은 어머니의 자궁과도 같은 것이리라. 위대한 어머니신은 이렇게 탄생한다. 노자(老子)는 ‘현묘한 암컷〔玄牝〕’이라고 하며 ‘천지의 뿌리’라고 했다. 그리스 신화에서 이 현묘한 암컷은 바로 가이아이다. 가이아는 대모신(大母神), 즉 모든 존재가 그로부터 나오는 터전이요 바탕이다.

위대한 어머니신이 여성으로 그려지는 이유는 생(生)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남성과 대립하거나 상대되는 여성성은 없다. 이 대모신은 홀로 새끼들을 낳는다. 노자가 왜 현묘한 암컷이라고 했는지 이해될 듯도 하다. 천지의 근원으로서 최초의 암컷은 수컷 없이 만물을 낳았다. 그래서 현묘한 것이다. 모든 존재의 근원이면서 포괄하는 한 몸, 이 어머니는 상대성을 초월한 절대(絶對)이다.

2. 절대왕권이 세워지기까지

인류문명은 석기시대 청동기 시대를 지나며 어느덧 철기시대에 접어들었다. 철기의 보급은 인류역사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이룬다. 철기는 생산력을 획기적으로 높였고, 높아진 생산성은 잉여생산을 가능하게 하였다. 잉여생산은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운 계층, 즉 군인과 관료 계급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들 전문지식인, 혹은 전문기술자들은 절대왕권에 필수적인 요소였고, 고대국가에서 고대제국으로의 전개는 이들이 두텁게 모일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춘추전국시대 왕이나 실력자들이 그토록 애타게 널리 인재를 모으고자 했던 것이리라.

중국에서 춘추전국시대는 지방분권적(地方分權的) 봉건제(封建制) 사회에서 중앙집권적(中央集權的) 군현제(郡縣制) 사회로의 전환을 모색하던 시기였다. 서주시대까지 천하는 이른바 제후들에게 나뉘어졌고, 이들 봉건 제후들은 완벽하게 자치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천자와의 군신관계를 유지하며 예절을 차리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것이다. 천자는 제후들의 일에 일일이 간섭하지 않았다. 스스로 알아서 할 문제였다.

이런 분권제가 진시황(秦始皇)은 싫었다. 진시황이 꿈꾸었던 천하는 왕의 명령이 시골구석까지 그대로 하달되는 것이었다. 모든 권력은 오직 단 한 사람 왕에게 집중되고, 모든 명령은 오직 왕 한 사람으로부터 나오는 체제였다.

그러나 이런 시스템은 원한다고 주어지는 게 아니다. 때가 무르익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진시황이 한 300여 년 전에 태어났더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세계이다. 진시황이 꿈꾸었던 중앙집권적 절대왕권체제는 자신의 명령이라면 불속에라도 뛰어들 수 있는 용사들과, 자신의 뜻을 제대로 시행해 줄 전문 행정가 집단이 충분히 축적되어야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생산성 혁명이 필요했고, 철제 농기구가 충분히 보급되기까지 진시황은 기다려야만 했다.

마르크스의 말마따나 경제적 하부구조의 변화는 법과 제도, 철학과 종교, 문학과 예술 같은 상부구조에 심대한 변화를 일으킨다. 철기의 보급에 따른 잉여생산은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가능케 하였고, 이는 고대 제국의 건설로 이어졌다. 동양의 진(陣)ㆍ한(漢) 제국과 서양의 마케도니아 제국, 그리고 로마 제국은 이렇게 탄생한다. 이런 변화에 따라 신화의 세계 또한 변한다. 이제 위대한 어머니 신은 잘난 아들에게 자리를 물려주어야 한다. 여신의 시대가 저물고 저 하늘 위에서 땅 밑까지 남신들이 지배하는 시대가 도래하였다.

3. 두려운 아버지신의 시대가 열리다

▲ 장 도미니크 앵그르, 〈제우스와 테티스〉. 아들 아킬레우스를 위해 제우스에게 애걸하는 여신 테티스의 모습에서 뒤바뀐 여신과 남신의 위상이 보이는 듯하다.
장 도미니크 앵그르, 〈제우스와 테티스〉. 아들 아킬레우스를 위해 제우스에게 애걸하는 여신 테티스의 모습에서 뒤바뀐 여신과 남신의 위상이 보이는 듯하다.

위대한 어머니신 가이아는 우라노스를 낳고 그와 결혼하여 남편으로 맞아 주면서 점점 통치권을 잃게 된다. 우주의 통치권은 우라노스에서 그의 아들 크로노스로, 그리고 크로노스에서 다시 그의 아들 제우스로 계승되어 마침내 제우스가 집권하게 된다. 천상에는 신중의 신 제우스가 번개창을 들고 권좌에 앉아 있으며, 가이아는 자신의 대부분의 권능을 다른 신들에게 물려주고 조용히 물러나 있게 된다.

아버지를 죽이고, 티탄족들을 지하세계인 타르타로스로 몰아내고, 기간테스무리들마저 평정한 제우스는 마침내 최고신이 되었다. 그리고 하늘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지배한다. 그는 권력을 주기도 하고, 빼앗기도 하며, 범죄자를 처벌하고, 질서를 유지한다. 그는 정의와 법의 수호자이다. 이런 제우스의 이미지는 곧 고대 제국의 황제들의 이미지와 다르지 않다. 진시황이 만든 체제, 오직 단 한 사람을 중심으로, 그 사람만을 위해 모든 게 통제되는 질서, 그건 제우스를 정점으로 하는 올륌푸스 신들의 계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진시황릉 병마용갱. 1974년 우물을 파던 한 농부에 의해 우연히 발견된 진시황릉은 그 규모를 알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다. 이 큰 무덤을 만들기 위해 최대 70만여 명이 동원되었고, 이들은 모두 도굴을 막기 위해 생매장되었고 한다.

남신들은 전쟁에서 승리한 신들이다. 초점은 승리가 아니라 전쟁에 맞춰져야 한다. 싸움은 남성성의 숙명과도 같은 것인지 모른다. 수컷은 자신의 씨를 퍼트리기 위해 싸워서 이겨야한다. 사슴이든 사자든, 암컷을 거느리기 위해 싸워 이겨야만 하는 수컷의 운명은 다르지 않다. 승자는 모든 암컷을 거느린다. 제우스가 건드린 여신이나 여자들이 한둘인가. 이 모든 싸움은 결국 독점하기 위한 싸움이다. 인간이라고 해서 다를 건 없다. 철기시대가 도래하면서 인류에게 풍요의 시대가 열렸는데, 정작 싸움은 이때부터 치열해졌다. 왜 그런가? 맹자 말대로라면 나눠 쓰고도 남을 만큼 풍족한데, 인류는 왜 더 싸우는 것일까? 이런 면에서 남성성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 진시황릉 병마용갱. 1974년 우물을 파던 한 농부에 의해 우연히 발견된 진시황릉은 그 규모를 알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다. 이 큰 무덤을 만들기 위해 최대 70만여 명이 동원되었고, 이들은 모두 도굴을 막기 위해 생매장되었고 한다.
원시시대에는 모든 게 부족했다. 먹고 산다는 게 지극히 어렵던 시절, 인류는 서로 뭉쳐야만 했다. 그렇게 공동체를 이루고 함께 협력하지 않으면 살 수 없던 시절, 그런 사회에서 내 것 네 것은 없었다. 그냥 우리의 것이었다. 당연히 내 여자, 네 여자도 없었다.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도 않았고, 따질 이유도 없었다. 다만 어머니가 누구인지는 분명했기에, 어머니를 중심으로 사회는 구성되었다. 자손을 낳고 기르며, 공동체를 유지하는 역할은 온전히 여자들의 몫이었다. 이런 사회에서는 싸울 일이 없었다. 사람들은 협심해서 먹을 것을 찾고 사냥하고, 함께 나누어 먹었다. 구성원 하나하나가 다 소중한 시절이었다.

그런데 생산이 늘고, 늘어난 생산물이 큰 권력이 되면서 내 것과 네 것을 나누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힘을 다투는 시대가 된 것이다. 여자보다는 힘이 센 남자들이 역사의 전면에 나서면서, 남의 것을 빼앗아 내 것을 늘리려는 싸움은 더욱 더 치열해지게 되었다. 여자들을 내 여자 네 여자로 나누게 되는 것은 내 새끼와 네 새끼를 분명히 구분하여야만 했기 때문이다. 권력을 쥔 남자들은 보다 더 많은 여자들을 취하여 내 새끼를 더 많이 퍼트리려고 한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천하를 손에 넣어야만 만족해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중국의 진시황, 이집트의 파라오 같은 고대의 절대권력자들은 이승의 권력을 저승에서도 누리고자 거대한 무덤 밑에 지하궁전을 짓고, 사막 한 가운데에 피라미드를 만들었다. 이를 위해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노예로 부려졌다.

잉여생산의 시대가 시작되며 난폭하고 두려운 절대권력자, 아버지신의 시대도 함께 열렸다. 인류는 풍요를 누리기도 전에 자애로운 어머니신의 시대가 저무는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아야만 하였다. 그래서 인류는 늘 아주 먼 옛날 어머니의 품속처럼 포근하던 시절을 그리워하나보다.

김문갑 | 철학박사, 충남대 한자문화연구소 연구교수

주) ------
1) 《회남자》 〈천문훈(天文訓)〉
2) 헤시오도스, 천병희 옮김, 《신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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