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가 수행자의 모습이
 위태로움을 넘어 소리없이
 무너지는 단계가 아닌지...


어느 시대든지 그 시대 고유의 특성과 곤경이 있기 마련이지만, 21세기 초반 한국 사회라는 시공간만큼의 복잡성과 복합성을 지닌 경우는 흔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지눌이 살았던 고려 중기도 말법시대(末法時代)라는 생각이 통용되고 있었고 더 올라간 원효의 시대 또한 만만치 않은 혼돈과 혼란이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려 보면, 우리 인간들은 늘 자신이 사는 시대를 가장 어렵고 힘든 시대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음을 알 수 있기는 하다.
그럼에도 우리들의 시공간이 지니는 특수성을 부인할 수는 없다. 신분에 따라 삶의 양상이 달라지는 조선 오백년을 지나 개화와 일제 강점기, 미·소 점령기를 넘어오면서 정착한 남북한 체제가 서로를 극복의 대상으로 설정한 한국전쟁의 소용돌이로 이어졌고, 그것은 다시 전쟁의 폐허를 딛고 일어서는 남북한 체제 경쟁으로 연결되었다.

2015년 1월 현재를 기점으로 판단해보면 그 경쟁에서 승리한 것은 남한의 대한민국임을 부인할 수 없지만, 그 남한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삶이 그토록 열망해왔던 삶과 얼마나 거리가 있는지를 실감하지 않을 수 없는 신산한 구비를 건너고 있다는 사실 또한 부인할 길이 없다.

이런 진단은 우리 시대 수행자들의 삶에도 예외 없이 적용된다. 마음 속 모든 욕망이 돈으로 환원되는 물신주의 시대를 건너면서 삶을 온전히 바쳐 진리 또는 절대자를 향하는 길을 찾고자 투신한 출가자들의 모습이 아슬아슬해 보이고, 어떤 때는 연민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도박이나 술, 여자 등에 빠져드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저럴 거면 왜 출가했는지 모르겠다는 멸시의 시선을 받는 출가 수행자들은 물론 불교만이 아니라 가톨릭이나 개신교 같은 이웃 종교에도 예외 없이 존재한다. 다만 불교가 더 많은 시선을 받는 것은 머리 모양과 옷이 바로 구별되는 외적인 이유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불교 공부를 하면서 ‘대한불교조계종’으로 상징되는 한국 불교계의 승가공동체를 지켜볼 수 있는 기회를 갖기 시작한 지 어느새 20여년을 헤아리고 있다. 그 과정에서 법정이나 성철 같은 올곧은 수행자들이나 혜민이나 법륜으로 상징되는 이른바 스타 수행자들의 일상과 법문을 만나는 행운을 누리기도 했고, 다르마를 향하는 여정 속에서 끝없는 번뇌의 수렁을 견디지 못해 방황하는 수행자의 눈빛과 마주해야 하는 곤혹스런 순간과 만나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이제는 쉽게 수행자들에게 경멸의 눈빛을 보내거나 말을 내뱉는 사람들을 만나면, 당신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되돌아보라는 반론을 펼칠 정도의 공감력을 지닐 수는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우리 출가 수행자들의 모습은 위태로움을 넘어서 수행공동체 자체가 소리 없이 무너지는 단계로 접어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우려를 떨칠 길이 없다. 수행자들의 선민의식은 수행에 온전히 몰입하고 있을 때만 비로소 존중받을 수 있음에도, 삼귀의의 마지만 승보를 자신들이 입은 승복 자체에 대한 존경과 귀의라고 강요하는 듯한 수행자를 만나는 일이 어렵지 않다. 더 나아가 자본주의 사회 부르주아적 삶의 풍요로움과 편의성을 맘껏 누리면서 명품이나 고급 외제 승용차를 소비하는 것으로 자신을 과시하는 속물스러움이 뚝뚝 떨어지는 ‘수행자’를 마주해야 하는 고통 또한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출가 수행자들의 이런 끝없는 추락은 당연히 출가공동체를 뒷받침하고 있는 재가공동체 구성원들에게도 그 책임을 물을 수 있는 현상이다. 더욱이 사부대중공동체를 지향하는 대승불교권의 재가자들인 우리에게는 단순한 책임을 넘어서서 그들이 초발심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고 그 수행의 과정을 공유하면서 이 시대 보살로서 살아내야 적극적 책임이 있다. 새해 벽두에 잠시라도 일상의 구비에서 물러서 그 책임의 막중함을 깊이 새기는 시간을 갖고 싶다. 그런 성찰에 기반한 작은 실천만이 희망이기 때문이다.

-한국교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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